2023년 7월 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느헤미야 19번째 강해) 제목: ‘늘’이어야 합니다. 본문: 느헤미야 7:1-4 서론) 지난 주간에 프랑스의 철학자인 로랑스 드빌레르가 쓴 “모든 삶은 흐른다.(FIKA 간)”를 행복하게 독서했습니다. 조만간 글감을 서평으로 써서 홈페이지에 남기겠지만 독서 중에 특히 내 마음을 움직였던 한 챕터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자는 ‘바다 소금’이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성찰합니다. “바닷물은 마실 수 없다. 소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소금은 염소, 나트륨, 황산염, 마그네슘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닷물에는 1리터당 평균 34,5g의 소금이 들어 있다. 바다에 소금이 생긴 것은 약 40억 년 전이다. 세상이 첫 아침을 맞은 날, 그러니까 지구가 탄생할 날부터다. 당시에 엄청 많았던 화산에서 수증기, 가스, 염소, 황산이 계속 품어져 나왔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공기에서 독특한 냄새가 났을 것이다. 이후 약 수 천 년 전에 바다가 생겨나면서 공기에서 배출된 혼합물들이 아래로 쏟아지며 바다 속에 녹아들었다. 이렇게 해서 바다에 소금이 생겼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 p,127). 여기까지 말한 작가는 이 과학적인 소금 생성의 과정을 소개한 뒤에 아주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하나 남겨 놓습니다. 연이어 그의 말을 귀담아 보십시다. “바닷물을 마셔본 적이 있는가? 바다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해 보았다면 한 번 쯤은 바닷물의 짠 맛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바다는 아주 짜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짠맛을 못 느끼게 된다. 그 맛을 음미하는 능력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리 행복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과거에 맛 본 만족감을 희미하게 만들고 감흥을 없앤다. 그래서 한때 매력을 느낀 것도 익숙해지면 더 이상 관심이 갖지 않는다. (중략) 익숙한 것은 더 이상 탐구하고 새롭게 감상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욕망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순서대로 수그러진다. 그리고 그 대상을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미 손에 넣었기 때문에 욕망하지 않는 것이다.”(위의 책, pp,128-129.) 이 글을 읽다가 나름 동의하게 된 것이 있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날마다 주시는 선물입니다. 날마다 주시는 은혜이다 보니 어느 날, 나에게 주어진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뎌짐이라는 비극에 빠지게 되어 더 이상 은혜를 은혜로 느끼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하는 아픔을 경험합니다. 어느 책에 기록된 이 문장이 나를 눈부시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은 어제 생명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리운 날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너무 당연한 ‘오늘’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오늘’이라는 날에 대한 감격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습관적인 매너리즘의 소산물인 무뎌짐 혹은 무감각이라는 괴물과 싸워 이기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영적으로 교과서적인 교훈을 줍니다. 찾아내 보십시다. 본론) 우리들이 2주 전에 보았던 느헤미야 6:15절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엘룰 월 25일은 주전 445년 10월 27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월력 계산으로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의 삽을 뗀 날이 8월 11일이라고 산정할 수 있습니다. 실로 놀라운 것은 140년 간 중단되었었기에 감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단 52일 만에 종료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를 통해서 이 엄청난 사역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결정적인 근거를 하나님의 철저한 인도하심과 그 인도하심에 치열하게 순종하며 사역한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합작하여 이루어 낸 쾌거임을 이미 살폈습니다. 이런 은혜를 전제로 오늘 본문은 성벽 완공을 이루고 난 뒤에 느헤미야가 보여준 후속 행위를 보고해 줍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전체로 읽어보겠습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그 성읍은 광대하고 그 주민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제 구절을 세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살피되 구절별로 살피지 않고 설교의 강조점을 두기 위한 문맥에 맞게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총독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이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이끌 제 2선의 지도자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2절을 나누어보십시다.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예루살렘을 다스릴 지도자를 세웠는데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니입니다.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먼 친척뻘 되는 동생인데, 느헤미야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미션을 수행하도록 음으로 양으로 부추긴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하나냐입니다. 느헤미야 역사서 기자는 이 사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뛰어난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공교롭게 이 두 사람의 이름의 의미는 같습니다. “야훼는 자비하시다” 말 그대로 이름 값 하며 사는 야훼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하나냐의 직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영문의 관원이라고 언급합니다. ‘관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사르’는 특히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보니 하나냐의 직책은 아마도 군을 통솔하는 長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믿을 만한 신앙의 동역자들을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제 성벽 재건을 완성한 후에 느헤미야가 행했던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행보를 1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완수한 뒤에 군사적 방비를 위한 사람을 세우고 나서 이번에는 그 성벽을 돌보고 지키는 문지기를 세웠다고 소개합니다. 성문 문지기를 세운 느헤미야 연이어 일할 사람을 조각을 하였는데 노래하는 자들을 세웠다고 명시합니다. 그런 뒤에 레위인들을 세운 것이 세 번째의 조각 내용이었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슈르’는 노래하는 남녀 모두를 의미하는 복수형 명사입니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는 남녀의 성비를 차별하지 않고 성가대원을 조직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생뚱맞은 것처럼 보이는 조각입니다. 성전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합은 조금만 더 깊이 성찰하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니라 느헤미야의 영성을 느끼게 하는 의도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느헤미야는 성문지킴이와 제사를 드릴 때 제사를 돕는 사역자인 성가대원들과 제사를 책임진 레위 사람들의 레벨을 같은 격으로 놓았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이 모두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 이후, 제사 공동체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든든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인적 인프라였다는 점을 일게 해 줍니다. 이제 제 2 스룹바벨 성전과 그 성전을 보호하기 위한 성벽이 있는 예루살렘이 명실공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 즉 성도(聖都)가 되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목헤야 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이후 더 긴장하며 늘 염두 해 두었던 중요한 영적 팩트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엇일까요? ※ 주어진 은혜와 승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민감하게 감각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감각해야 하는 은혜의 시기는 ‘늘’입니다. ‘언제나’ 이어야 합니다. ‘항상’ 이어야 합니다. 청파교회가 추구하는 변하지 않는 교회 성도들의 슬로건이 저를 감동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항상, 늘 그리스도인”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민공동체가 성벽 재건 이후 집중해야 하는 사역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역임을 그는 민감하게 감각했습니다. 그러니 노래하는 자들 즉 성가대원과 제사를 수행해야 하는 직분자들인 레위인들을 따로 구별하여 세운 것입니다. 이들의 은혜로운 하모니가 절정을 이룰 때 제사 드림의 사역이 승리할 수 있다고 느헤미야는 확신한 것입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제사 드리기만을 집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같은 적대자들이 상존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고 성벽 방비에도 최선을 다했음을 독자들에게 보고한 것입니다. 1-2절의 긴박성을 느헤미야 기독 연구원 교수인 김근주 박사는 상황적 해석을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6장의 마지막은 유다의 귀족들이 도비야와 결혼 관계를 비롯해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성벽 공사 내내 도비야에게 정보를 빼돌릴 뿐 아니라, 느헤미야를 위협했다. 성벽은 완공되었지만, 느헤미야와 공동체를 맞서는 세력의 위협은 결코 끝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개혁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반대와 저항은 무척이나 집요하고 지속적이다. 성벽 완공은 일차적인 진전이고, 이제 느헤미야는 공동체를 단단히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느헤미야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는 적절한 자리에 사람들을 세웠다.”(김근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봄이다, p,98.) 이렇게 철저했던 느헤미야는 특히 성문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명하라고 하나냐에게 전한 메시지인 3절이 설교자인 저를 절절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해가 높이 뜨기 전에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할 때에 곧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며 또 예루살렘 주민이 각각 자기가 지키는 곳에서 파수하되 자기 집 맞은편을 지키게 하라 하였노니” 이 구절은 주석적인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느헤미야는 성문지기들에게 해가 환하게 뜨기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문을 열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성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침에 동이 트자마자 성문을 열고, 해질녘에 닫는 것에 비하면 예루살렘 성문이 열려 있는 시간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문지기의 수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4절) 또한 햇볕이 가장 뜨거운 대낮, 곧 사람들이 낮잠을 잘 시간에 성문을 걸어 잠그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민감했던 이유는 적에게 어떤 빈틈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 에스라, 느헤미야”,pp,287-288.) 느헤미야의 행위를 이렇게 부연하면 어떨까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감각하기 오늘 설교의 제목은 빌린다면 이렇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영적 감각의 빈도는 언제나 항상 늘 깨어 감각하기였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단 한 가지의 단발마적인 표현으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즈음한 접근으로 말씀드리지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각하지 않으려는 무뎌짐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가 너무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매도하는 무감각해짐이 나를 영적으로 쓰러지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책이 있는 풍경 간,p,158.) 아래층에서 물 틀 면 단수가 되는/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베니어판으로 된/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 골목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 소주를 마신 대가로/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제가 함민복 시인의 이 산문시를 읽은 게 2014년 10월 16일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다가 개척 후의 느껴야 했던 여러 가지의 자괴감들로 인해 괴로워했던 불편한 일들을 일거에 날릴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자괴감으로 인해 우울했던 시간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시인이 경험했던 슬펐던 날, 힘들었던 날의 한 사건을 통해 시인에게 일어났던 일이 내게 이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감각하기였습니다. 주어진 환경과 분위기에 함몰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 내외적 환경의 불편함을 인식하고 감각하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용기를 한 편의 시를 통해 체득하였기에 저 또한 정말 중요한 사역의 터닝 포인트를 갖게 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습니다. 감각하기는 ‘늘’이어야 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설교를 마치기 전, 지난 금요일 7월 7일에 제가 감당했던 성서일과 큐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날 제가 읽었던 성서일과는 로마서 7:19-20절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성서일과를 읽고 제게 온 영적인 감동을 이렇게 큐티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이 고백의 주인공이 바울이라는 데에 그 진정성이 더해진다. 만에 하나 다른 이가 이 고백을 했다면 상투적인 멘트라고 치부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바울이 토설한 고백이기에 그의 말마디에 담겨있는 그 간절함이 다가온다. 또 하나, 바울의 이 선언이 마음에 와 닿은 이유는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예외가 아니다. 목사로 이제 전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지금도 숨길 수 없는 진실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삶의 자리에 있다는 자괴감이다. 목사가 무슨 그리 큰 죄의 자리에 있겠나 싶지만, 삶으로 직접 행하는 죄는 아닐지라도 오히려 생각을 지배하는 이성,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 그리고 도저히 변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범하는 원하지 않는 죄는 도진개진이다. 아니, 더할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이 일갈했던 말이 생각난다. “감정의 동의어로 쓰이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죽은 단어입니다. (중략)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을 포함하지 않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시시한 감정이기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행위여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참여하게 합니다.”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p,48.) 목회는 이론이 아니라 삶인데, 살아내는 헌신이 아니라 감정으로 달려왔던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다. 목사라는 레테르로 인해 더욱 갑각의 것들로 치장하고 무장하여 하나님을 향한 순백의 헌신을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저울질하고, 감정의 폭으로 재단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복음인양 선포했던 죄를 하나님께 힐문당할 날이 올 텐데 두렵다. 그래서인지 바울의 토설이 오늘 나에게 ‘다이너마이트’로 다가와 폭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 이 폭격에 무디어지지 않는 민감함이다. 매우 아프고 쓰리지만 그날에 그분 앞에 설 때까지 이렇게 폭격당하기를 소망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심장을 타격하는 아침이다.” 이렇게 말씀을 묵상한 저는 하나님께 큐티를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깨달음에 있어서 둔감하지 않고 민감하게 하옵소서. 주군이신 하나님, 돌이킴에 있어서 예민하게 하옵소서. 마비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영적인 감각에서 무뎌지고 있습니까? 절규하고 통곡함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감각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언제나 하나님의 그 만지심을 감각하고 무뎌지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항상 민감하게 주님을 감각하게 하시고, 무감각해지는 영적 사형선고에서 빠져 나오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감각하는 것은 언제나 ‘늘’이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과 같이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주 손길 치유하네/고통받는 자녀 품으신 이/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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