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제목: 심장이 뛰는 감사 본문: 시편 100:1-5 서론) 오늘은 2023년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주일 오전에 살피는 느헤미야 강해를 한 주 쉬고 오늘은 절기 설교로 여러분을 섬기려고 합니다. 모쪼록 오늘 주일에 주시는 말씀이 교우들의 심장을 움직이는 주님의 음성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운동을 하기 위해 탁구장에 나갔습니다. 주말이라 회원들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지 평소보다는 적은 회원들만이 나와 운동을 했습니다. 마침 저는 그날 처음 보는 여성회원과 함께 운동을 하며 교제했는데 그 회원이 운동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시죠? 제가 그렇게 관장님께 소개 받았는데 목사님처럼 생기지 않으시고 교직과목 교수님처럼 생기셨네요. 특별히 도덕이나 윤리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 같으셔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가 목사 같이 생기지 않고 교직 과목 교수처럼 생겼다는 표현이 제게는 마치 율법주의자처럼 살지 말라는 야단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성 회원이 이어 뒤에 던진 말은 제게는 확인사살 같았습니다. “요즈음 너무 이상한 목사님들이 많은데 목사님은 진짜 선생님 같은 목사님 느낌이 들어서요.” 병 주고 약주고 야단치고 어르고 그날 저는 K. O패를 당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가만히 탁구장 회원의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한 방 먹었지만,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왜요? 너무 이상한 목사들이 많다고 평가 받는 오늘이지만, 다른 과목이 아니라 그래도 윤리나 도덕 선생님으로 봐 주니 그래도 감사의 조건이라고 자위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제 시대로 말하면 무식하고 무자비하기에 끝이 없었던 교련 선생이나, 엄하고 엄했던 체육 선생님, 아니면 까칠하기 그지없었던 수학, 물리 선생으로 보지 않고, 윤리, 도덕 선생처럼 보아 주었으니 웃프지만 그나마 위로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런 소회를 밝히면 교우들은 별 큰 감동의 소회가 없을 것입니다. 상투적인 멘트라고 여길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러든 말든 저는 제가 고백할 수 있는 진솔한 멘트를 교우들에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지난 상반기를 살면서 큰 대과(大過)없이 목사라는 직을 감당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150개의 시편 중에 전형적인 찬양 시로 분류되는 시입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찬양할 것을 요청합니다. 1-2절을 노래해 보겠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시인의 찬양의 요청은 시를 읽는 일체의 독자들 전체에 해당하는 요청입니다. 결국 찬양을 해야 하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의 당연한 의무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렇게 찬양을 요청한 시인은 이어지는 3-5절에서 왜 우리가 찬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역시 3-5절을 노래하겠습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저는 시인이 요구한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본문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나’라는 존재의 소유권이 주군에게 있음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인은 주군이 하나님이심을 밝힙니다.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너희들은 알라고 하십니다. 그런 뒤에 시인이 강력하게 제시한 주군의 실제는 이러했습니다. 본문 3절 하반절입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주군은 우리들을 기르는 존재이시기에 우리는 주군의 양이며 백성이라고 천명합니다. 동시에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는 그의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위해 대조하여 보는 10개의 영어성경 중에 반수가 번역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We are his.” 우리가 그분의 소유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시편 2편의 저자는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익명의 저자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시편 2편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동의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시편 2편은 제왕 즉위식 때 부르던 시라고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원하던 유다 왕조를 통한 왕국 건설이 물거품이 될 것처럼 여겨지자 영원한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시는 것으로 대체하면서 왕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선언한 선포를 이렇게 시인은 표현했습니다. 시편 2:7-8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의 일 순위는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6개월을 살아왔습니다.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버텼습니까? 그냥 얼떨결에 그렇게 지내왔습니까? 마냥의 일상이 그랬기에 또 그러려니 하고 달려왔습니까? 저는 지난주 목요일에 성서일과 큐티의 내용을 예레미야 25:3-4절로 삼고 큐티 했습니다.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이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저를 강타한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꾸준히 일렀으나”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 받은 시기는 요시야 즉위 13년째인 주전 627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25장의 시기적 배경은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주전 604년을 묘사합니다. 무려 23년 동안이나 야훼 하나님의 신탁을 눈물 흘리며 전했다고 술회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탄식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여타 진실한 선지자들을 유다에게 보냈는데 결과, 그들이 순종하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탄식했음을 보고합니다. 그날 이 구절을 성서일과로 택하면서 이렇게 저는 묵상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지긋지긋하게 속 썩이는 신자들이 있다. 그냥 몇 몇이 아니라 즐비하다. 목사의 마음이나 생각을 무시하고 예의 없이 행하는 신자. 교회는 나오지만 도무지 성경과는 담 쌓은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 어리고 어려서 뭔가를 말하기가 쉽지 않은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 같은 신자 등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이런 신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내공이 생겨서 그런지 뭐 또 그러려니 한다. 이런 경우와는 질이 다른 경우의 신자들이 있다. 목회자의 마음을 가히 없이 괴롭히는 신자들이 있다. 아는 게 너무 많아 무슨 말을 해도 다 안다고 허드레 치며 듣지 않으려는 신자들이다. 오랜 전에 친구 목사가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이 목사, 신자들 머리에 뭔가를 많이 알게 하지 마!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정신 차려. 너는 고사하고 나중에 부임할 2대 담임목사를 죽일 수도 있어!” 나를 아끼는 친구의 고언으로 받았다. 하지만 친구가 이렇게 힐난하고 충고해도 나는 내 길을 걸었다. 이상하다. 근래 친구의 말이 다시 복기되는 것은 왜일까?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는데 심장이 서늘하다면 그건 내 죄가 분명하다는 상념 때문이다. 정말 머리만 크게 만든 기형아를 생산해 낸 목사로 훗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나는 어떤 말로 주님께 대답할 수 있을까 심히 고통스럽다. 아는 게 너무 많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교묘하게 담을 쌓으며 거부하는 괴물 신자들을 만들어낸 공범의 죄를 하나님이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까 싶어 힘들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성서일과인 예레미야의 일성은 뼈를 때린다.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목사의 윤리적 일탈, 변질, 목사답지 않은 궤변, 삶으로 설교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목사들에 대한 염증 등등 오늘의 시대에 목사로 인해 아픔을 당한 신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것을 탓하며 끊임없이 주어지는 말씀을 거부하는 신자들의 면면은 온당하지 않다. 목사도, 신자도 끊임없이 주어지는 레마에 겸손하게 순종하며 행하는 삶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인 공동체의 지체 여러분은 지난 6개월을 어떻게 지내오셨습니까? 이것을 아십니까? 지난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주군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인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꾸준히 말씀을 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곧게 살기를 기대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담임목사를 통하여 주의 말씀을 끊임없이 보냈다는 것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레미야의 일갈처럼 그러든지 말든지 꿈쩍도 하지 않는 신앙의 무감각을 일상으로 살아온 자들도 있겠지만 “꾸준히 일러줌으로”, “끊임없이 보냄으로” 행하셨던 하나님의 그 역동적인 일하심의 결과, 내가 주군의 소유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그 분의 소유됨으로 지난 6개월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노래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께 심장이 뛰는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내가 오늘 같은 참담한 신 사사시대에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소유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심으로 인해 노래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와 찬양은 심장을 뛰게 하는 요소입니다. 상반기도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반기도 여전히 주님의 소유됨에 감사하는 여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2) 감사를 잊지 않게 하신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성실하신 하나님께 찬양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 4-5절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인은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가는 자라면 반드시 갖고 들어가는 필수품목으로 감사를 들고 있습니다. 이 말을 더 공격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적용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감사 없이 예배할 수 없다.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 다음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생은 즐거울 수 없다. 저금통장의 잔고가 늘어도 감사의 창고가 비게 되면 인생을 쓸쓸해지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원망이 많아지고, 얼굴을 점점 더 굳어진다. 삶의 명인들은 감사의 창고를 채울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든 뺄셈 부호보다 덧셈 부호를 즐겨 사용하면 된다.”(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p,231) 감사의 이력이 이러할 진대, 어떻게 하나님의 궁정으로 들어가는 자가 감사라는 예물을 생략한 채로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감사라는 예물을 준비하여 찬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속성을 갖고 계신 주군이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선하시고(토브) 인자하시며(헤세드) 성실하신(에무나) 주군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차준희 교수는 하나님의 이 세 가지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인간을 선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을 괴롭히고 이용하려고 했다. 이런 배경에서 ‘야훼는 선하시다’라는 고백은 매우 파격적인 선언이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요약하는 특유의 신조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구절은 ‘작은 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인류에게 확장되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시간의 한계에 묶이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대를 이어 그 영향을 발휘할 것이다.” (차준희, “시인의 영성2”, pp,554-555.) 그렇다면 이렇게 완벽한 속성을 가진 주군이 우리들을 소홀히 여길 리 만무입니다. 주군께서 자녀 된 우리들을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체로 견인하려는 것은 너무 마땅합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예배하며 그분은 찬양하라고 권합니다. 지난 6개월을 반추하면 도저히 얼굴을 쳐 들 수 없는 황송함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인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성실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께 악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무자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불성실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7월의 첫 주일에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차준희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여전히 내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 세 가지 속성이 불변하시기에 내 삶의 사탄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음에 감사하는 맥추감사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시 한 편 낭송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심장의 노래를 들어보실래요?/이 가방에는 두근거리는 심장들이 들어 있어요 건기의 심장과 우기의 심장/아침의 심장과 저녁의 심장/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오늘도 강가에 앉아/심장을 퍼즐처럼 맞추고 있답니다 동맥과 동맥을 연결하면/피가 돌 듯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지요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 심장을 다해 부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통증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펄떡일 때마다 달아나는 음들/웅크린 조약돌들의 깨어남 몸을 휘돌아나가는 피와 강물/걸음을 멈추는 구두들/짤랑거리며 떨어지는 동전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지나가는 자전거바퀴/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기적소리 다리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동안/얼굴은 점점 희미해지고/허공에는 어스름이 검은 소금처럼 녹아내리고/이제 심장들을 담아 돌아가야겠어요/오늘의 심장이 다 마르기 전에 (나희덕, “그녀에게-나희덕 시선집” 중에 “심장을 켜는 사람”, 예경, pp,174-175) 나희덕 시인의 ‘심장을 켜는 사람’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시를 읽다가 이 시어에서 숨이 멈출 뻔했습니다. “두근거리는 것들은 다 노래가 되지요”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심장이 뛰는 두근거림의 감사를 노래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혈관에서 힘차게 펄떡이는 피돌기가 심장에 닿아 그 뜨거운 감동이 전해지는 감사의 노래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시인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편 100:4) 심장이 뛰는 감사로 어우러지는 맥추감사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나는 네 하나님이니/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널 도와주리니/놀라지 말라 내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너를 사랑하는 내 여호와라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나를 단련하신 후에/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