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느헤미야 17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6:14 제목: 이름값 하는 그리스도인 서론)
지난 목회 현장에서 아주 또렷이 기억하는 웃픈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 제가 속해 있었던 지방회의 장로회가 주관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지방회장님이 행사의 설교를 맡게 되었는데 주보를 복사하기에 앞서 전례대로 설교 제목과 말씀 본문을 장로회 서기에게 알려주었고, 지방회장님이 당부하기를 제목에 오타가 나오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행사에 전할 설교 제목은 ‘이름다운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행사 당일, 주보에 복사된 활자는 지방회장님이 그렇게도 신신당부했건만 다르게 활자화 되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그렇게도 당부를 했건만 불길한 예상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넉넉했던 당시 지방회장님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면서 아주 능숙한 스킬로 이렇게 그날 설교를 이어갔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삶은 성도라는 이름에 맞게 이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성도라고 설교 하며 사역을 마쳤습니다. 듣고 보면 정말로 정답입니다. 저는 오늘 ‘이름값’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섬겼던 지방회에서 있었던 지방회장의 설교의 논지와 그리 빗나가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은 다른 스펙트럼으로 오늘 느헤미야 17번째 강해의 메시지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먼저 룻기 서에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룻기 3:7-9절을 소개합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우리는 룻기 서 안에 담겨 있는 보아스와 룻의 잔잔하면서도 따뜻한 러브스토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묘한 긴장감을 주는 스토리입니다. 읽은 본문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룻이 목숨을 건 사랑고백을 보아스에게 하자, 보아스가 그 사랑의 고백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스릴 만점의 장면입니다. 왜 룻은 이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요? 룻기 서의 주석적 내용을 살펴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대 농경 사회였던 베들레헴(빵집)에는 땅(토지)에 관한 법적인 사항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일정량의 토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남편처럼 그 땅주인이 이주를 하거나 사망을 하면 그 집의 아내가 토지의 소유권을 갖게 되어 있었지만 직접 그 토지를 매매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철저한 가부장적인 문화가 베들레헴 사회구조였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남편도, 첫째, 둘째 아들도 다 잃었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본인 스스로가 여성이었기에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포기하지 않고 1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이미 남편이 갖고 있었던 땅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학자들의 도움을 받겠습니다. 학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그 땅을 처분하지 않고 떠났다는 이론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베들레헴이 있는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자가 그 땅을 임시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가설입니다. 문제는 그 땅 주인 엘리멜렉이 죽었고, 그 재산을 승계받아야 할 아들들도 죽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잠시 주지했듯이 그렇다면 소유권은 아내에게 있기는 하지만 한 가지 절차가 필요합니다. 여성은 소유권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매매할 수 있는 사회적인 권리와 법적인 조항이 없기에 그 땅을 완벽하게 다시 찾으려면 기업 무를 자 즉 땅을 관리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친족과 재혼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나오미는 그럴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해서 나오미가 생각해 낸 프로젝트는 베들레헴 같이 올라온 며느리 룻을 고엘 즉 기업 무믈 자에게 재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룻이 일하는 농지의 주인이 남편 엘리멜렉의 계보로 볼 때 두 번째 서열의 기업 무를 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거사를 계획합니다. 이 거사를 증언하는 룻기 본문이 앞에서 읽어드린 3:7-9절인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비록 육체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자기에게 인생을 걸기로 한 룻의 마음을 확인한 보아스는 그녀를 책임지기로 마음먹고 법적인 절차를 밟습니다. 나오미의 남편이었던 엘리멜렉 家에 있어서 가장 족보상 가까운 서열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성경은 ‘고엘’ 즉 ‘기업 무를 자’라고 지칭합니다. 지금 그가 엘리멜렉의 토지를 대신 맡아 관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기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1순위였습니다. 결국 나오미의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룻을 그에게로 재혼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두 번째 서열인 보아스에게 며느리를 재혼시키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법적 절차를 보아스에게 일임한 셈입니다. 이것을 알았던 보아스는 곧바로 베들레헴의 법적인 내용들을 해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갑니다. 룻기 4:1절입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도 룻과 결혼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1위 서열의 ‘고엘’과의 담판을 짓기 위해 고대 베들레헴 사회, 문화의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10인 장로회를 소집하여 엘리멜렉의 토지를 처분하는 법적인 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에 1위 서열자를 청합니다. 그리고 다짜고짜로 지금까지 있어 왔던 나오미 일가에 대한 스토리를 설명하고 기업 무를 자격 서열 1위자에게 나오미와 룻과 그의 가족들을 책임지는 것을 가정하여 기업을 무를 것을 묻자, 이기적인 성품의 제 1위 서열자는 마땅히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10인 장로 공회에서 권리를 포기하는 선언을 합니다. 그러자 제 2위 서열자였던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자기가 물을 것을 천명하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나오미까지 책임지는 통 큰 결단을 내린 끝에 그는 다윗의 증조부가 되는 구속사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역사가는 보고함으로 룻과의 러브스토리를 해피엔딩으로 마감합니다. 지금까지의 스토리가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야기 정황입니다. 제가 왜 이 스토리를 뜬금없이 꺼냈을까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엘리멜렉의 재산권에 대해 제 2의 서열의 기업 무를 자는 이름이 ‘보아스’였음을 살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유력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엘리멜렉의 소유권을 차지할 권리에 있어서 으뜸이 아니라 버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엘리멜렉의 토지를 차지할 수 있는 유력한 자라는 이름처럼 , 결국에는 그 유력함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냈습니다. 다시 말해 보아스는 철저하게 이름값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제 1의 서열이었던 자의 이름은 룻기 저자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무개’라고 서술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서열이 1위라면 베들레헴 농경사회에서 나름의 유지였을 텐데도 왜 룻기 서에서 그의 이름은 삭제 되었을까요? 주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아무개는 룻과 나오미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보다 자기 잇속을 먼저 계산하고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엘리멜렉의 계보가 보존되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기적인 아무개는 친족의 이름을 보존하는데 자비를 베풀기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아무개는 이름도 없다.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룻기”, p,180.) 가장 유리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기적인 삶을 살기로 작정함으로서 이름값을 하지 못한 자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룻기는 이름값을 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이름값을 하는 신앙인이 될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6:14절도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 곧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의 소행을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 역사가는 느헤미야를 끝까지 방해하고 괴롭혔던 인물군(人物群)을 열거하며 이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인물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십시다. 느헤미야는 스마야를 매수했던 도비야의 이름을 맨 앞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토비야’라는 히브리어는 ‘여호와께서는 선하시다.’는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실상 토비야는 이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느헤미야를 대적한 자의 무리들의 수장 서열 1위가 언제나 산발랏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느헤미야의 청원기도에 스마야를 매수하여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도비야가 산발랏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느헤미야가 얼마나 도비야에 대해 비장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도비야, 즉 야훼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이름을 같고 태어난 그였지만 그는 이름의 뜻과는 전혀 다른 악명 높은 이름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에 전하지는 비극적인 인물로 명명되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문 중에 하나님께 제거 일순위로 지정될 정도로 낙인찍힌 이름값을 하지 못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도비야와 산발랏에 이어 또 한 명이 이름이 거론됩니다. 여선지자 ‘노아댜’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모으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여인도 이름값을 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에 하나, 이름값을 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통해 일하시려고 했던 성벽 재건 역사에 힘을 모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느헤미야의 반대편에 있는 적대자들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사역을 반대하는 영역에서 힘을 모았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 딱 한 번, 치욕적인 이름을 남기며 불명예를 얻고 역사에서 퇴장합니다. 이제는 우리는 본문에서 마지막 한 부류를 살펴야 합니다. 느헤미야 역사가가 마지막으로 느헤미야의 기도 중에 거론한 척결대상은 점입가경입니다. ‘그 남은 선지자’ 아예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의 이름조차 거명하기 싫었다. 그러나 총독의 신분과 권위로 그 모든 위협의 요소들을 무력화시키지 않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소행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느헤미야의 이 기도가 유다 공동체를 견고하게 가게 한 원천이었다.” (소형근, “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성경주석-느헤미야”, pp,101-102.) 느헤미야는 그들이 얼마나 싫었으면 이름을 ‘그 남은 선지자’라고 익명으로 처리하며 도매금으로 넘겼을까요? 주목할 것은 익명으로 처리된 자들의 직업이 ‘나비’ 즉 ‘선지자’라는 직을 갖고 있었던 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나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비라는 거룩한 직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마야도, 노아댜도 그리고 이름조차 거론하기 싫었던 타락한 선지자들로 느헤미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름이 거론된 자나, 이름이 익명으로 처리됨으로 싸잡아 무시된 자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값을 전혀 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를 통해 중요한 영적 레마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이름값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젊은 시절이었던 40-50대 중반까지 KBS 9시 뉴스에 꼭 등장하던 기자가 있었습니다. 이강덕 기자입니다. 그때 그 기자가 취재하고 설명할 때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응원했습니다. “이강덕 기자의 리포트가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생면부지의 기자였던 그에게 나도 모르게 그렇게 화살기도가 나왔습니다. 지금 경북 포항시 자치단체장이 이강덕 시장입니다. 제가 지지하는 정당 소속의 단체장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응원합니다. 실수하지 않는 정치가가 되게 해달라고. 이강덕 목사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남양주에도 살고, 용인에도 있고, 전라도 완산에도 있습니다. 감리교회도 있고, 장로교회도 있고 성결교회도 있습니다. 매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강덕 목사들이 섬기는 교회가 승리하게 하옵소서.” 왜요? 그놈의 이름 때문입니다. 제가 교우들에게 정말로 많이 인용하며 설교 원고에 담았던 사도행전 11:26절을 또 다시 읽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는 한글 성경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했지만 ‘크리스티아노스’를 문자적으로 풀면 그 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름은 수리아 안디옥 지방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붙여준 칭찬의 단어가 아니라 ‘예수쟁이’와 같은 폄하하고 비아냥거리는 단어였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 비아냥 단어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뿐만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 가 흘러, 흘러 오늘까지 이르렀고 이제는 우리 세인교회의 성도들도 자랑스럽게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의 이름값임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기 위해 몰려든 방관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들의 상태를 이렇게 보고합니다. 마태복음 27:38-42절입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강도들, 지나가는 자들, 대제사장들, 서기관, 장로들이 예수님들을 모욕하는 장면입니다. 이 구절을 들여다보면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마태복음 기자의 서술 기법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 단 한 명도 이름이 거론된 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름이 복음서에 기록되는 것조차도 싫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장에 기록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5-56절은 보고합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적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실 때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7:51-52절입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이 광경을 목도했던 자들의 이름이 첫 번째 복음서 안에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세베대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이 거명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구속사의 위대한 파노라마의 무대에서 철저하게 무시된 이름들이 있는가 하면 이름을 부르기조차 역겨웠던 자들도 복음서는 증언 합니다. 이름이 무시된 자와 이름이 기록된 자들과의 병행적 비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과 영적 가르침을 줍니다. 저는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세인교회라는 이름이 마지막 날 하나님의 면전에서 빌라델피아, 서머나 교회처럼 이름이 칭찬받는 교회로 새겨지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요한삼서 1:9-12절을 읽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요한 장로는 가이오에게 보내는 본인의 세 번째 편지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소개합니다. 한 사람은 디오드레베이고, 또 한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적어도 요한 장로에게 디오드레베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물로, 데메드리오는 기억하고 싶은 인물로 소개됩니다. 이름을 부르기조차 싫은 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절대로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전자가 아닌 후자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께 이름이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시인은 이렇게 노해하며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91:1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KEY SETTING) 나를 지으신 주님 내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하늘 소망 후렴 만)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