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28일 태신자 초청 예배 설교 (성령 강림 주일) 제목: 사랑하면 됩니다. 본문: 요한일서 4:7-11 오늘은 노래 하나를 다 같이 부르고 설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제가 젊었던 시절, 대단히 감성적인 노래를 부르며 인기 몰이에 성공했던 남성 듀엣 ‘해바라기’가 부른 ‘사랑으로’ 라는 대중가요 안에 담겨 있는 가사입니다. 설교 시간에 경건하지 못하게 가요를 부르다니 라고 힐난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태신자 전도 축제의 날이고, 조금은 의미가 다른 주일이라서 예배에 참석한 회중 공동체 중의 지체 중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지를 아는 교우들과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이 함께 있는 자리이기에 후자의 지체들에게 교회라는 곳의 낯 섬을 극소화해 주는 의미에서 이 노래를 부른 것을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부른 남성 듀엣 ‘해바라기’의 히트곡인 이 노랫말 안에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두운 곳에 있는 타자에게 손을 내밀어 줌으로 빛을 비추어주는 일입니다. 저는 ‘사랑으로’라는 노랫말에 담긴 이 가사에 동의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거창하게 말하게 되면 추상명사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상명사는 현실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체감 온도가 너무 낮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몰아가는 것에 반대합니다. 도리어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어두운 환경에 놓여 있는 누군가에게 찾아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하지만 명확한 정의입니다. 내가 힘들었을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낍니다. 파주에서 목회할 때, 교회 멤버십을 이루고 있던 교우들 중에 상당수가 청년,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출석하던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에서 사춘기를 보내던 때였기에 극심한 정서적 불안에 있었던 학생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학생은 고질적인 만성 두통에 빈번히 노출되어 극도로 삶의 질이 추락하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결국 어느 날, 이 아이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교회에서 실컷 울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찾아 나왔습니다. 마침 그날 제가 목양실에서 늦은 시간까지 대학원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던 터라, 그 아이를 교회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저 역시, 사택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는데 그날따라 논문 초고 마감 시일이 얼마 남지 않아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흐릿하게 예배당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예배당으로 나가보니 그 학생이 절규하다시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자리에 옆에 가서 조용히 앉아 그 아이의 고통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그 아이를 위해 중보 했습니다. 이후 너무 오랜 시간이라 자세히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아이가 제게 후에 해준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날 제게 두 가지를 해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심장소리를 들리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를 제게 주셨습니다. 그 두 가지 때문에 살아야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그날 제가 그 아이에게 해준 것이 안아준 것과 손잡아 준 것임을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가 목회 여정 중에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회의 방법론을 손잡아 주는 것과 안아주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그게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선명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미국으로 출국한 사서호 형제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어머니의 진솔한 소원을 대신 말해 주었습니다. 물론 종교적 상투성을 갖고 전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사랑을 담보로 전해주었습니다. 헤어지기 직전에 서호 형제를 위해 안수기도를 하면서 이렇게 중보 했습니다. “하나님,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 대단히 낯설고 때로는 불편한 하나님일 수 있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 어머니가 그토록 말했던 하나님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때가 오면, 그 하나님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간섭할 시간이 없어 대신 파송한 어머니가 사랑했던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붙잡게 해주십시오.” 기도가 끝나자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한 서호 형제의 아멘 소리를 들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 서호 형제를 안아주자 제게 이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본론) 예수께서 종말의 때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24-2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님이 하셨던 메시지 중에 오늘 설교와 연관하여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메시지를 하나 전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4:12-13절입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더 리얼하게 표현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악이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파멸에 빠뜨려서 사랑은 간 곳 없고 잿더미만 남을 것이다. 그대로 견뎌라.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이다. 끝까지 견뎌라. 그러면 너희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2023년, 이 땅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들여다봅니다. 저는 목회를 하는 목사이기에 대한민국의 여러 영역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특히 제가 주목하는 영역은 영적 영역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은 영적으로 안전합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답으로 제시하려는 데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마태복음 24:12-13절 번역이 답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걷잡을 수 없는 악의 만연, 간 곳 없어 보이는 사랑의 실체, 잿더미와 같은 단어가 오늘을 보며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주간에 목사 안수 동기 모임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친구 목사가 이야기 중에 이런 정보를 들려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출산율이 OECD 국가 중에 꼴찌이고, 세계에서는 198위라는 참담한 결과를 말해 주었습니다. 이런 예를 들었던 친구가 뜬금없이 영국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영국의 출산율은 우리나라를 크게 앞지르는 1,6명이라는 결과를 이야기하며 사족을 달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민법상 혼인신고를 한 경우에만 부부 관계를 인정하는데, 영국은 동거하는 사람들까지 부부로 인정하기에 그렇게 출산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상회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위로가 되십니까? 우리나라는 동거인을 부부로 인정하지 않는 윤리적인 나라이니까 희망이 있어 위로가 되십니까? 잠시 멈추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사랑이야기를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채택한 요한일서는 성경 66권 중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사용된 말씀입니다. 주목할 것은 요한일서에서 저자가 기록한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통상적으로 주후 1세기 헬레니즘 문화권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통용되던 ‘사랑’이라는 단어는 네 단어가 있었다고 다른 여타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중에 세 단어는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이고, 나머지 한 단어는 성경에서는 사용된 기록이 없지만 주후 1세기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⓵ ‘필리아’입니다. 이 단어는 종종 우정 등등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⓶ ‘스톨게’입니다. 이 단어는 친족 간의 사랑, 즉 부모와 자식의 사랑, 남매, 자매간의 사랑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⓷ ‘아가페’입니다. 이 단어는 신적 사랑의 의미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해서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에 반해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은 사랑의 단어가 있습니다. ⓸ ‘에로스’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적인 사랑의 형태를 말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형태였기에 줄곧 많이 사용된 단어가 바로 ‘에로스’입니다. 주목할 것은 요한일서에 기록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 한 차례도 ‘아가페’라는 단어 이외의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일서라는 불과 5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텍스트에 무려 36번이라는 횟수에 걸쳐 사용된 단어가 아가페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요? 요한일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대목입니다. 통상적으로 요한일서라는 편지는 주후 2세기 초 즈음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즉 주후 100-110년 즈음으로 추측하는데 이 시기는 교회사의 기록을 전제하여 살필 때 대단히 위험했던 교회의 위기 시대였습니다. 바로 초기 교회 시대를 위협하며 교회의 존폐를 거론할 정도의 이단 사상이 교회를 타격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 무시무시했던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이 이단 사상에 대해 이 짧은 설교시간에 전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설교의 핵심적 가치를 전하기 위해 단순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믿는 이단이 영지주의였습니다. 어떤 깨달음인지 가장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지주의는 이중 창조론을 주장합니다. 선한 신은 영적 세계를 창조했고, 악한 신은 물질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악한 신이 창조한 물질세계의 창조로 인해 악도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바로 이 악한 신의 희생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받으려면 선한 신이 갖고 있는 가장 최고의 권위인 ‘지식’을 깨닫는 것인데 이 지식은 예수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후 1세기에 이런 이단 사상이 창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21세기 지금의 상황과 아주 닮아 있습니다. 획일화의 반대, 다양성의 추구라는 화두가 기독교 신앙으로 일원화되어 있는 숨 막힘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해방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후 1세기 헬라문화권에 있었던 세속의 영역에 있었던 이들은 영지주의에 열광했고 자기들이 원하는 랜덤을 추구하는 탈출구로 영지주의를 이용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한일서가 작성된 이유, 더불어 작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요한일서의 저자는 이런 영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막 살기 시작한 세대에 진정한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흔들릴 수 있는 기독교 신앙의 시금석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 시금석을 지식의 깨달음이라는 대세에 맞서 ‘사랑하기의 재정립’으로 맞선 것입니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렇게 갈파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 대단히 의미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알고’ ‘알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영지주의자들이 최고의 선이자 구원의 도구라고 믿었던 ‘기노스꼬’ 즉 지식을 ‘깨닫는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을 깨닫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냥 대충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 사랑 즉 헌신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일서 저자는 정말로 너무 중요한 메시지를 본문에 남기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9-1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구절이 성경에 있다는 것은 기적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지주의는 구원을 받기 위해 최고의 선이자 구원의 궁극적인 가치인 지식을 인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주체는 바로 ‘나’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력하게 피력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저자는 영지주의자들의 엄청난 공격을 대단히 원색적인 복음으로 일거에 날려 보냅니다.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천명했던 요한일서 저자는 이렇게 역설합니다. 사랑하는 행위의 극치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직접 보내셨다는 점이고, 그 보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빼박의 메시지를 날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이 명제를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인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게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마지막 구절 11절에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구절에 기록된 ‘마땅하도다’는 헬라어 ‘옵헤일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빚진 자가 빚을 갚아야 하는 의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진 빚을 갚지 않으면 사기죄가 성립됩니다. 형사적, 민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책임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사랑하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랑하는 행위를 감당할 때 우리는 구원 받은 자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는 은혜에 도착하게 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세인 교회 예배에 찾아 나오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나오신 것은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의 일치로 얼떨결에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지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우리들에게 보내신 사랑하기의 결실로 존재하게 된 자들이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다짐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도 사랑하기입니다. 나도 사랑하면 됩니다. 누군가를 위해 내 사랑을 전하면 되고,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받은 자의 증거이며, 구원 받은 자가 감당해야 할 빚 청산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 여러분은 그냥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려는 자들의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 지난 시간 동안 노심초사하며 기도한 여러분을 사랑하는 지인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을 일회적인 것으로 끝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는 이 사랑은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의 행위는 위대하고 또 감사한 사랑하는 자의 수고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9년 3월 18일에 출신교회 선배 여전도사님과 후배 사모님이 제 결혼식에 듀엣으로 축가를 불러준 곡이 있습니다. 그날 저를 사랑하는 지체들이 불러준 이 축가는 제 삶의 지대한 영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 설교를 마감하며 이 찬양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났도다/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우리를 살리게 하시려 화목제로 보내셨도다/화목제로 보냈도다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서로 사랑하면 서로 사랑하면/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리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