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 토저의 “철저한 십자가, 주의 사자가 앞서 인도하신다, 믿음에 타협은 없다”(규장)를 읽고 필자가 좋아하는 출판사의 책들이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이겠지만 20대 신학 공부에 한참이던 시절에는 한국신학연구소에 나온 책들을 상당수 독서했다. 현장 목회를 막 시작하던 30대에는 교회 부흥이라는 화두에 밀려 두란노 서원, 그리고 규장에서 나온 책들을 많이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40대에는 목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있어서 그랬는지 부흥과개혁사, 홍성사 책들에 열광했다. 40대 후반 즈음에는 분도출판사에 한동안 필이 꽂혔던 시간도 있었다. 50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이동이 있었다.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 책들을 섭렵하려고 나름 노력했고, 한들 출판사와 동연의 책에 몰입하려고 했다. 물론 지금 열거한 것은 기독교에 관련한 분석이다. 그러다보니 지난 세월동안 보수, 중도, 진보적 출판사의 과정을 모두 거친 셈이다. 결론의 이야기를 먼저 들추어내고 싶다. 나름 그런 대로 거론한 일련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들은 내게 많은 공부를 하게 해 준 좋은 길라잡이의 역할들을 해 주었다. 하지만 작금에 거의 손절한 출판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거론해서 유감이기는 하지만 규장의 책들이다. 때늦은 후회이기는 하지만 규장에서 출간한 책들 중에 상당수는 성과주의 혹은 성공주의 그리고 positive thinking을 근간하는 매우 위험한 책들이 많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규장에서 출간한 책 중에서 이런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목회자들이 줄곧 쓰는 상투적인 어구는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이다.” 말한 이를 거론하면 개인적인 공격이 될 것 같아 피하겠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지금 목회현장에서 탈락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글 중에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문구다. 그가 실패의 자리라고 정의한 현장에서 주군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선혈이 낭자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다. 그러기에 그의 선동질은 주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아주 질 나쁜 행위다. 이런 종류의 글을 규장에서 발간한 책에서 곧잘 발견한다. 대단한 유감이다. 사정이 이러기에 나는 규장의 책들을 거의 손절한 상태다. 그런데 틈새가 있어 나도 고민스럽다. 완전히 손절하지 못한 이유는 20세기의 선지자라고 호칭되는 A,W 토저의 글이 규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 2주 동안 토저의 글 3권을 읽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펜데믹 2년의 상황을 거칠게 경험한 2021년 9월 9일인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글 때문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고 다시 불편한 목사 살기를 복기했다. 몇 구절만 나누자. “나는 더 거룩해져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쓸 뿐이다. 내가 지나치다면 이해해 달라. 말씀대로 사는 일이라면 모자라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차라리 낫다.” (믿음에 타협은 없다, p,218.) “당신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영적 무감각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이다. 만일 어떤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멀리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주의와 무관심은 영적 무감각의 독버섯이 자랄 수 있는 좋은 토양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부터 살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적 무감각을 지적하는 것은 쉽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영적 무감각운 잘 찾아내면서도 자신의 영적 무감각은 의식하지 못한다. (중략) 영적 무감각에 빠진 그리스도인은 목적 없는 게으른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위의 책, pp, 260-265) “교회가 편안함에 빠져 버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것을 망각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편해지는 것을 싫어하고 편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편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의 등을 두드리며 ‘여기서 우리는 친구입니다.’라고 말한다.” (주의 사자가 앞서 인도하신다. p,143) “오늘날 우리의 귀에 ‘지루해 죽겠는데 뭐 재미있는 것 없나? 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churchgoer)을 즐겁게 해주는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오락을 제공한다. 오늘날 복음을 믿는 교회에 세상만큼 오락이 넘쳐난다.” (위의 책, p,192) “오늘날 복음주의에 속한 우리가 왜 이토록 약한가? 그것은 그리스도 다음에 + 부호를 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게 무엇을 덧붙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십자가, p,60.)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그분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위의 책,p,64)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쓰지 말라. 편안한 길을 거부하라. 능력도 열매도 없이 교인들을 등을 두드려 주어 편히 잠들게 만드는 교회에 안주하지 말라. 십자가에 물감을 칠하지 말고, 꽃으로 장식하지 말라. 십자가를 십자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것이 죽음과 생명에 이르는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가 당신을 완전히 죽이게 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거룩함을 추구하고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위의 책, p,131)
2주 전에 토저의 이 갈파를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인용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그분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인터넷으로 섬기는 교회의 설교 영상을 매주일 보고 듣는 지체 한 명이 나에게 이런 글을 보냈다. “목사님, 세인 교회 설교가 대단히 불편한데 자꾸만 클릭하게 되네요.” 2022년 세인 교회의 표어를 잠정적으로 정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갈 6:14)다. 서고에 아직 읽지 않은 토저의 책이 4권 남아있다. 규장에서 출간되었지만 큰마음 먹고 구입한 책들이다. 손해보지 않으련다. 9월이 다 가기 전에 전 권 독서를 마무리 할 생각이다. 토저가 쓴 21권은 위드 코로나가 거론되는 이 시기, 소장품이 아니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