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풀꽃2024-06-11 10:0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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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나태주
ㆍ출판사 도서출판 지혜
ㆍ작성일 2021-06-01 10:27:19

 

나태주의 ‘풀꽃’(지혜 간)을 읽고


어느 대중 가수의 노랫말에 ‘구멍 난 가슴’이라는 가사다. 아마도 자세히 알지 못해도 이 노래는 사랑앓이 일 것이라 짐작한다. 어제 내 가슴도 구멍이 났다. 사랑앓이는 아니지만 시 한 소절에 감동의 치명상을 입었기에.

누군가 죽어서
밥이다.
더 많이 죽어서
반찬이다
잘 살아야겠다.

나태주의 ‘생명’이라는 시다. 이 글을 읽다가 내 가슴에 치명적인 구멍이 났다. 시구(詩句)를 읽는데 한 동안 멍했다. 이런 성찰을 누가 하나? 잘 사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러니 정말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다.

지난 주일에 ‘아린 목회’라는 제하로 설교했다. 설교를 준비할 때도 그랬고, 말씀을 전할 때는 더 더욱 그랬다. 목사가 아리고 아린 마음을 갖지 않고 사역한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다. 그 목사가 삯군이든지 아니면 아직은 목회를 모르든지. 목사로 잘 사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결기를 해 본다.

아름다운 사람
눈을 둘 곳이 없다
바라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니 볼 수도 없고
그저 눈이
부시기만 한 사람

그랬다. 시인이 말한 이 아름다운 사람이 누굴까? 아마도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를 하며 고백했던 그의 아내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불특정 다수의 사람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인이 말한 대상은 사람이다.
나는 목사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물리적인 성공의 숫자로 보이는 목사로 산다면 그는 정말 로브를 벗어야 한다. 하나님은 고사하고 타인들에게 너무 수치스럽기에 말이다. 사람이 영혼이자,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야 그게 목사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난 얼마 전에 너무 사랑했던 대상을 잃었다. 천 갈래, 만 갈래가 찢어졌다. 내 살점이 뜯겨 나간 듯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그 상처와 아픔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았다. 나는 사람을 언제까지 영혼으로 그리고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까. 아주 가끔, 더 이상은 상처당하기 싫어 더 이상은 사랑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백이 나를 옥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절친이 쓴 ‘예레미야 다시 보기’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 (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 프리칭 아카데미, p,219.)

사람들로 인하여 당하는 상처와 고통 그리고 등 뒤에 꽂는 수많은 비수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 행해질 때,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내가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 줄 아세요.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했는데 왜 내게 이런 아픔을 주시죠?”

이렇게 하나님께 삿대질 한 것도 목회 여정 중에 너무 많아 이제는 떼씀도 그만하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사람은 영혼이며 사랑의 대상이라고.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행복’이라는 시다.

이제 조금 있으면 환갑의 생일이 된다. 의학이 발달해서 61세는 청춘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래도 환갑은 돌아갈 집을 생각할 때다. 서서히. 나는 돌아갈 집이 있어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 천상병이 말했던 것처럼 ‘소풍 잘 마쳤다.’고 고백할 수 있나! 지금도 긴장하며 산다.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기막힌 시인의 詩想이자, 삶의 고백이다. 목사로 산지가 어언 30년이다. 나는 내 얼굴에 목사라고 쓰였는지 몰두하며 살았다. 근데 자신 없다. 뒷모습도 목사인지. 두렵고 또 떨리기까지 한다. 더 우울한 것은 뒷모습은 고치지 못한다고 시인이 못 박고 있어서.

시인을 오늘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한 명시가 ‘풀꽃 1’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어느 날이었다. 새벽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일어나 세면을 하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를 보았는데 소천하신 장모님이 보였다. 이제는 장모님의 모습이 보이는 아내를 보다가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 양복을 입는데 목이 메었다. 나 같은 놈하고 인생의 반쪽으로 살아준 아내에게 미안해서. 그리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내는 젊어서 너무 예뻤다. 지금은 그 예쁨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아내에게 시간의 흐름 속에 새겨진 사랑이라는 化粧이 더해져서이리라!

시인 박용철은 시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시인은 하나님 다음 가는 창조자다.”
100% 동의한다.
근래, 나태주의 시를 읽으며 더 절감한다.

어제 아내와 함께 영월에 있는 ‘젊은 달 아이파크’라는 소규모 미술관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관람을 하고 자투리 시간에 읽은 나태주의 대표 시선 집인 ‘풀꽃’을 접했다.
아무래도 나태주의 총에 맞은 것 같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한 동안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나태주가 말했다.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사랑이 아니다/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중략)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다시 한 번 태어나고/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다시 한 번 죽는다”
 

또 한 주간, 서툴지만 사랑하며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