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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시인의 영성 12024-06-11 10:00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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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차준희
ㆍ출판사 새물결플러스
ㆍ작성일 2021-06-09 17:38:46

 

차준희 교수의 ‘시인의 영성(1)’(새물결플러스 간, 2021년)을 읽고

 
시편 50편을 저자는 시편 분류 작업으로 예언시(prophetic psalm)로 한정했다. 이유는 이 시의 중요한 특성을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예언자를 소환하셨을까? 저자는 시인의 노래 중에 17-23절을 소개하며 오늘 목사로 사는 내게도 살 떨리게 하는 영적 긴장감을 갖게 한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이 구절은 목회자인 내게는 대단히 익숙한 성서 텍스트다. 읽다가 미가 6:6-8절이 떠올랐다.
주전 8세기 남 유다의 참담한 영적 패악이 극에 달했을 때,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며 힘으로, 물리력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재산들을 착취하고, 갈취하던 자들이 야웨께 가장 좋은 재물 드리기는 경쟁하듯 한다. 그렇게 악한 지도자들을 향해, 일 년 된 송아지를 번제로 드려도,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기름을 준비해서 드려도, 이방종교의 압권이었던 인신제물의 극치였던 맏아들을 가지고 와서 드린다고 해도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설의 사자후를 던지신 것이 미가 6:8절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슈파트와 헤세드, 짜나가 없는 예배는 의미 없다는 주님의 경고다.
이렇게 미가 6장의 메시지와 아주 엇비슷한 교훈을 남긴 저자가 시편 50편을 주해하면서 적시한 메시지는 예사롭지 않다.
“이 시에서 하나님은 종교적 형식주의자들을 책망하신다. (중략) 그들은 모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고액의 헌금도 거침없이 바친다. 외적으로는 경건해 보이고 입술로는 은혜의 말을 덜고 산다. 그러나 일상의 삶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예배의 자리에서는 한없이 겸손하고 경건하지만, 삶의 자리에서는 한없이 교만하고 세속적이다. 이런 삶은 종교와 일상이 이혼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말과 삶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의 말을 지우고 삶을 주목해야 한다.”(pp,482-483)
저자는 50편의 해설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앎과 삶이 다르면 악인이다.”(p,474)
대단히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평생 선생으로 살아온 저자가 순간순간 본인이 재직하는 학교에 목이 걸려 있었을 터인데, 이런 불온한 발언을 하고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은혜(ㅎ)다.
저자는 본서에서 시편 1-50편을 옴니버스형식으로 히브리어 원어를 풀이하면서 그 뜻과 단어에 담긴 신학적 통찰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몇 가지만 인용해 본다.
시편 42:1-5절도 내게는 낯설지 않은 본문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필자는 이 시인의 고백한 단어 중에 절절하게 아멘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목회를 하다보면 목사로서 제일 힘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부재(the absence of God)’를 느낄 때다. 이렇게 말하면 도대체 목사나 되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공격하며 도무지 신앙 없는 목사라고 매도해도 괜찮다. 필자가 언급한 하나님의 부재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질 떨어지는 이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내가 생각한 대로 결코 움직이시지 않는 하나님,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에서 단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목도하며 살아온 목사로서의 삶이 어떤 경우에는 가장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야 하기에 느껴지는 너무 멀리계신 하나님을 처절하게 체휼한다.
정말로, 내 옆에서 내가 속삭이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 번이라도 내가 졌다고 움직여 주셨으면 할 때가 너무 많다. 특히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는 더 간절하다. 이런 내 느낌을 모를 리 없는 저자가 교과서적인 교훈을 이 시에서 남긴다.
“신앙은 하나님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가운데서도 과거에 현존하셨던 하나님(생명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미래에도 활동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잊혀짐(절망감)은 그 갈망에 대한 ‘기억의 되살림(희망)’에 의해 극복된다.” (p,412)
못 말리는 선생이다. 다시 태어나도 선생 말고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저자인 듯하다. 대체적으로 신학교 선생이 지역 교회 목사보다는 영성이 뛰어난 것을 거의 못 보았는데(이 발언은 몰매를 맞을 각오로 한다. ㅎㅎ) 저자는 조금 돌연변이다.
저자는 필자가 첫 번째 책을 출간할 때, 추천의 글을 써주면서 잔소리를 했다. 35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책을 출간한 나를 보고 요즈음 250페이지를 넘기면 독자들이 고개를 돌린다고.
지금 짧은 서평을 쓰고 있는 이 책을 처음 받고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말과 삶이 달라서야 되겠나!
490페이지 책을 읽다가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책을 보내준 그 정성이 갸륵해서 밑줄 치며 읽었기에 졸필이지만 충고하고 싶다. 말한 대로 책임지라고. 다음부터 250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책을 내면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갈파가 너무 뛰어나 하나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시편 27편을 나누어본다. 역시 이 시편도 필자가 본문으로 택해 수없이 설교한 텍스트다. 또 복음성가 중에 정말로 좋아해 꽤 많이 ‘하가’하는 개인 탄원시다.
이 시를 통해 사사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영적 랜덤의 시대를 사는 목사로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견고한 은혜를 받는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앇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1-4)
저자는 이렇게 갈파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분이 주실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믿음은 바라보고(look), 기대하며(hope), 기다리는(wait) 것이다.” (p,260)
췌장암 투병 중인 팀 켈러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재난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것이다” (팀 켈러, “부활을 입다”, 두란노, p,100.)

어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다. 접종 10시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후유증으로 죽다 살아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심각한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예방 주사를 맞고 난 24시간 어간, 내가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 ‘아파르’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삶의 여정이 팀 켈러의 말대로 주의 얼굴을 떠나지 않고, 그분의 힘의 영광을 의지하는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바로 이것이 저자가 시편 27편을 해제하며 역설한 바라보고(look), 기대하며(hope), 기다리는(wait) 것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내게 이 책을 주며 한 마디 했다.
“이 목사,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정성을 다해 쓴 글이다.”
저자에게 한 마디하며 글을 맺는다.
“친구, 수고했다. 성에 차지 않는 게 아니라 성에 넘친다.”
이 책을 통해 시편과 멀어져 있는 독자들이 더 푸근하게 시인들과 접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의 영성 2,3’도 기대가 된다.
 

(ps: 저자가 언제나 내게 서평 짧게 쓰라고 해서 최선을 다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지천인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