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질병과 슬픔 앞에서 손 모아2024-06-11 09:5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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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응교
ㆍ출판사 비아토르
ㆍ작성일 2021-06-18 12:40:23

 

김응교의 “질병과 슬픔 앞에서 손 모아”(비아토르 간)를 읽고


2015년 병원 신세를 졌다. 탁구 복식을 치다가 파트너에게 부딪치면서 오른 쪽 손등 뼈가 골절 되어 깁스를 하고 일주일 입원을 했다. 그리고 약 두 달, 오른쪽 손등이라 생활을 하는데 적지 않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일주일 입원을 하는 어간, 병원에 가지고 들어간 책 두 권이 ‘그늘’과 ‘곁으로’였다. 지금도 이 두 권의 책을 서고에서 꺼내 다시 들춰보면 왼손으로 삐뚤빼뚤 쓴 독서 후기가 웃프다. 저자를 그렇게 만났다. 이후 저자의 글에 주목한 이유는 그의 글들이 언제나 약자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를 전공한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다가 그가 에필로그에 남긴 글말을 노트했다.

“상처받는 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 활동을 하다보면, 내가 ‘상대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분명히 상처 받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우리 편’에게서 당하는 상처가 훨씬 더 아플 수가 있어요. 많이 힘들겠지만, 그 상처로 인해서 도망치지 말고 그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과 용기를 내서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간직하세요.”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p,304)

목사로 산지 30년이 넘어섰다. 뒤 돌이켜 보면 유감스럽게도 김승섭의 말이 오롯이 다가온다.
그때마다 참 많이 아팠다. 그 상처는 한때 치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데미지가 있었다. 이기려고 노력하며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 있다. 상대편이 아닌 내편, 혹은 우리 편이라고 갈음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런 결정이 있고 난 후부터 내게 임했던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고, 극소화되었다. 결국 아픔을 당한 ‘나’는 아픔을 당하게 한 ‘너’와  함께 하지 못한 이유 때문에 같이 고통스러웠던 거다.
지난주에 섬기는 교회에서 동역하는 여전도사가 책을 한 권 내밀었다.

“목사님, 근래 읽은 책인데 너무 큰 감동을 받았어요. 몇 주 전, 목사님 칼럼에 100여 권 정도의 책을 버리셨다고 했는데 저는 책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김응교 교수가 쓴 ‘질병과 슬픈 앞에서 손 모아’라는 詩評이었다. 어제 아침에 서재에서 책을 펼치고 독서하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독서 삼매경에 빠졌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오전 독서 시간에는 아내가 좀처럼 서재에 나오지 않는 편인데 어제는 오랜만에 맞닥트렸으니 그렇게 보인 것일 테다. 실상은 저자의 글에서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인데.
저자는 1월부터 12월까지 읽으라고 소개한 네다섯 편의 명시들을 해제까지 달아놓으면서 독자들을 유혹한다. 이 유혹이 치명적인 이유는 말 그대로 웬만한 독서가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명시들이기도 하지만, 펜데믹이라는 초유의 경험을 하고 있는 작금에 적지 않은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가 될 수 있는 시들을 발췌했기 때문이다. 총 51개의 시들을 다시 읽고 저자의 시평까지 접하고 나니 엄청나게 영적으로 부요(富饒)해진 느낌이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p,24)

이미 잘 독서가들에게 잘 알려진 기형도의 ‘우리 동네 목사님’에 나오는 시어다.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 읽었던 ‘그늘’에서 저자가 이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기록했는데 병원 입원실이라는 평상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만난 글이라서 그런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나의 은사이신 고 박두진 시인은 ‘쉽게 십자가니 보혈이니 글에 쓰지 마세나. 그 단어의 아픔만치 살고 그 삶을 글로, 시로 쓰세나.’라고 가르치셨다. 윤동주 시인도 ‘십자가’라는 결정적인 단어를 그의 모든 글(십자가라는 시)에서 딱 한 번 썼다. 삶으로 증명해야 할 단어이기에 함부로 쓰지 않고 그에겐 아끼며 아끼는 단어였다.”(김응교, “그늘”, 새물결플러스, p,158)

립 서비스가 아니다. 나는 성경에 밑줄 치는 목사로 살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생활에 밑줄을 긋는 목사로 살고 있는가를 치열하게 물었다. 그렇다. 그렇게 못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온전하게 살 수 없을 것 같아 슬프다. 목사다운 목사로 사는 것은 정말로 고통스럽다.

“81년부터는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그동안 두 번의 설교를 하셔서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 교회를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p,83. 천상병의 ‘연동교회’ 중에서)

천상병의 이 시어를 읽다가 만감이 교차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이 이렇게 끝난다.
“이제는 연동교회만 나가겠습니다. 물론 개종하지 않고 말입니다.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p,84)

가톨릭 신자로 평생을 산 천상병은 왜 성당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연동교회를 나가겠다고 변심(?)했을까? 아마도 목사 김형태에게 이끌렸기 때문이리라. 신학적으로 목사에게 끌려 예배의 처소를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비신학적인지에 대해서도 논쟁하지 말자. 필자도 그 정도는 아는 목사니까 진 빠지게 다시 재론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다만 천상병이라는 천재적 소양의 문인이 종교의 색채가 다른 연동교회로 예배 참석의 방향을 바꾸겠다고 한 토로를 그의 작품에서까지 남긴 것은 아마도 영적 투쟁의 결과였으리라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읽다가 든 소회, 나는 누군가에게 영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목사인가? 나는 가고 싶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 자꾸만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나를 보면서 큰 자괴감을 느낀다. 근래 들어 회중석에 앉아 설교를 들으며 행복해 하는 꿈을 자주 꾼다. 천상병은 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동교회로 나가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이 나를 타격한다.

“아, 우리가 그것을 배우게 해주십시오. 만약에 그것을 잊었다면, 백합화와 새들에게 다시 배우게 해 주십시오.” (p,157, 쇠렌 키르케고르의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에서)

저자는 이 시어를 해제하면서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한다.

“백합화와 새들에게는 세 가지의 경건이 있다. 침묵과 순종과 기쁨이다. 백합화와 새는 말이 없다. 침묵은 순종하는 자의 적극적 실천이며, 백합화는 시들어 떨어져 썩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침묵과 순종의 결과물은 기쁨이다. 백합화가 행복한 이유는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합화는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의 삶과 한계에 만족한다.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서 오직 자기 자신의 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는 불행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주체성이다.” (pp,158-159)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이유다. 백합화와 새만도 못한 내 자아가 내뿜는 진리의 주체성이 1도 없는 가운데 30년 이상을 목회했으니 기적이다. 상투적으로 빗대자. 은혜였다. 기적과 은혜로 살았는데 배우는 것에 인색하고 공부하는 것에 소홀하다는 것이 말이 되겠나. 평론가 신형철의 글을 읽다가 섬뜩했던 문장이 있어 비장하게 담았던 적이 있었다.

“질문하는 자가 항상 이긴다. 이제 패배를 무릅쓰고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 동네, p,147.)

글을 맺으려니 조금 아쉽다. 길다고 욕먹어도 하나만 더.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p,247, 기형도의 램프와 빵에서)

요절한 기형도가 너무 아깝다. 그가 살아 있으면 개그 콘서트보다 못한 지금의 시대에서 어줍지 않은 목사로 살고 있는 나 같은 자에게 큰 울림을 계속 주었을 테니.
겨울이 귀하다. 신자 한 명이 사석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 2’가 시작되었다고 좋아한다. 본인이 좋아하는 ‘겨울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겨울이 아름답고 귀한 이유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장겨울이라는 캐릭터 때문인가? 겨울이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나’를 그리고 ‘너’를 겸손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인생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오늘 겨울이 있음에 감사하자. 만에 하나, 나에게 겨울이 없다면 나는 예측 불능의 괴물이 되었을 가능성 100%이니 말이다.

아픈 글이지만 소개하며 마무리하자. 저자가 글말에 이렇게 썼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떠받는 수많은 자들이 있다고. 그러면서 직격탄을 날린다.

“목회자가 정치권력의 노예가 되어 독재자들을 위해 축복 기도할 때, 한 술 더 떠서 교회에서 과시하듯 사진을 보여 줄 때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p,314)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갈무리한다. 기도회라는 말을 찍어내라고. 祈禱의 빌 ‘祈’는 도끼로 나를 잘라내는 성찰을 할 때만 써야 하는 단어이기에 조찬기도회라는 민망하기 그지없는 단어에 祈’자를 오용함으로 스스로 쪽팔림을 당하지 말자고. 
김응교는 이렇게 말해서 주류에게 맹폭을 당하는 비주류 인물 중에 하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난 그의 글에 아멘을 하니 말이다.
코로나 19로 아파하는 이웃이 많다. 성도들도 매일반이다. 그래서 나도 저자처럼 그냥 그들을 위해 손을 모아 본다. 손을 모아 나의 교만한 자아를 도끼로 쳐내고 절대자이시자 주군이신 하나님께 이 곤고함의 아픔들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다. 

섬기는 교회 여전도사님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너무 귀한 선물 때문에 행복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