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
ㆍ출판사 | 비아토르 |
---|
ㆍ작성일 | 2021-07-15 13:12:47 |
---|
김기석의 “그리움을 품고 산다는 것”(비아토르, 2021년)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용기다. 그래서 여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리베카 솔닛은 글쓰기를 ‘멀고도 가까운 작업’이라고 표현했지 싶다. 2020년 2월부터 폭격을 시작한 코로나 19의 공습은 1년 6개월이 지났음에도 그 강도를 더하여 지속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일체의 영역에서 이 공습을 모면할 예외 지역은 없어 보인다. 교회도 매일반이다. 아니, 교회는 더 노출됐다. 이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걸었던 지난 1년 6개월을 반추하면 할수록 절절하게 하나님이 내쉬고 계시는 들숨과 날숨의 호흡 안에서 버티려고 했기에 지금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목사로 사는 ‘나’는 하나님이 주셨던 영적인 호흡의 내음을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전염시키려고 몸부림친 또 다른 은혜로 점철된 시간이 지난 1년 6개월이었다. 그 전염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 목회 서신이다. 바울이 보냈던 목회서신에 견줄 바 있겠나 싶지만, 15번에 걸쳐 보낸 편지들은 어줍지 않은 생색내기 글쓰기가 아니라, 심서(心書)였다. 아마도 그 동안 용기를 내서 쓴 심서를 코로나가 종식되어 훗날 다시 들추어보는 날이 온다면 그때 가서는 혈서(血書)라고 정의를 바꿀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의 간절함이 담보되어 있는 글쓰기를 해왔다. 이 글은 목회자의 사랑 고백이자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이다. 필자가 저자의 글을 접한 지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이 지면을 빌려 소개하는 본서 역시 필자와 같은 마음을 담은 저자의 목회서신이다. 독자 중에 익히 저자를 아는 지인들은 그가 얼마나 지성적 영성에 충실한 사역자인지를 인지하고 있을 줄 안다. 2020년 한 해, 저자가 섬기고 있는 청파교회의 교우들을 향하여 교회 문이 닫힌 아픔을 감내하며 쓴 신앙적 러브스토리로 본서는 채워져 있다. “참 스승은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p,166) 저자의 이 일갈이 사무치게 필자에게 다가왔다. 펜데믹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사지로 내쫓김을 당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언어폭력과 물리적 압박에 시달렸다. 교회 밖이라는 로컬에서 무신론적 가치로 무장한 자들에게는 교회가 백해무익한 집단으로 매도되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히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고,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적인 종교인들에게는 교묘하게 포장된 갑각류적인 영성이라는 무기로 더 예리하게 난도질당하는 가중적인 고통을 당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사정이 이러다보니 살아남기 위해 나 또한 공격적으로 변하고, 섬기는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전투적 체질로 변화시키려는 가르침에 올인 하였던 어리석음을 저지른 듯하다. 주군은 당신의 삶을 언제나 이타적 관계로 저인망을 넓혀 ‘스프랑클니조마이’ 즉 ‘불쌍히 여기심’으로 드러내셨는데 말이다. 아직 멀었다. 주님 닮으려면. “차가운 신학 이론이나 교리를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려는 이들이 있다.” (p,182)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성직자가 아베 피에르 신부다. 그가 말했던 이 정의는 벼락이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마음 산책, pp,226-227)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보면 카라마조프의 셋째 아들인 표트르 알레산드로비치가 왜곡된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정치화와 거기에 보폭을 맞추는 정치적인 종교인들에 대해 이렇게 조소한다. “기독교도이면서 사회주의자인 자는 무신론자이면서 사회주의자들인 자보다 더 끔찍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민음사, 140.) 치욕이다.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만든 교리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이어야 하는데 누군가를 재단하는 악용의 도구로 사용되는 작금, 통석(痛惜)하고 싶은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은 단순히 교회에 적을 둔다는 말이 아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삶의 순간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기를 구한다는 말이다. 그는 그런 삶이 주는 유익을 계산하지 않는다. 계산하는 마음은 이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p,52) 코로나 19의 엄습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갖고 있는 상당히 많은 고정적 틀을 뿌리 채 흔들었다. 그래서 무척이나 혼돈스럽고 당황스러운 일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1년 6개월의 공습 속에서 더 선명하게 각인된 긍정의 내용들도 보인다. 신앙의 정체성을 복잡하고 모호하게 만든 펜데믹 하에서 더 긴장하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신실한 ‘크리스티아노스(그리스도인)’로 살아내기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그리스도인 되기다. 곧 ‘ad fontes’로의 회귀다. “이 낯선 방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다/소리들이 함께 있다.”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p,110.)
오래 전에 만난 나희덕 시인의 이 읊조림을 다시 끄집어내 주절거리는데 울컥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소리다. 나는 그 소리들과 함께 있다. 내가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이 소리들이 내 옆에서 연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세밀하게 들어야지. 그래서 나도 소리가 되어 주어야지. 그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