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부모님에게 가장 불효했던 기억과 나름 효도했던 기억을 되뇌인다면?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소망 중의 소망 ● 본문 : 히브리서 7:11-19 1) 레위 제사장의 대안으로 제시했던 멜기세덱의 정체성을 세 가지만 말해보자. (히브리서 7:3) 2) 멜기세덱과 비슷하지만 레벨이 다른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은? (본문 16-18절 참고) 3) 적용하기 ⓵ 멜기세덱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존재이신 예수님이 가장 중요한 성도의 소망인 이유는? ⓶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은? ⓷ 성도가 간과하기 쉬운 일은? : 거라사 광인을 고친 사건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 사역하기 (WORK)이번 주간 사역
1) 주일 대면 심방에 참여하지 않은 셀 지체 파악 2) 주일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지체 심방하기(전화 심방, 대면 심방) 3) 지역 셀 안에 있는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위해 중보하기 4) 요한복음 성경퀴즈 대회 준비하기 5) 22일 자연심방 참여하기 독려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 설교요약 (SUMMARY)2022년 5월 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부활주일 이후 세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7:11-19 제목: 소망 중의 소망
본문에 설명되고 있는 멜기세덱의 이해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아주 적절한 이해를 우리 독자들에게 줍니다. 본문 12절 말씀은 대단히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지금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수신자는 유대 율법주의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더 극단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에서 이탈하여 유대교라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는 배교자들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율법으로의 회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건강한 보수적인 신앙에서 폐쇄적인 수구적 근본주의로 돌아가는 재앙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12절의 발언은 혁명적 발언이었습니다. 제사의 직분도 바뀌었으니 율법도 바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선포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이런 충격적인 발언이 무대뽀식의 발언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신학적인 근거도 있었습니다. 11절 본문을 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결코 물러서지 않는 불문율이 무엇입니까? 아론의 반열 즉 레위지파에서 제사장들이 나왔다는 절칙입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이것을 어기는 것은 파문을 당할 만한 불온한 행위입니다. 헌데 히브리서 저자가 무엇을 말합니까? 아론 즉 레위 지파에서 나온 제사장들이 온전하지 않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들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래위 지파 제사장들이 온전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이 다른 제사장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세운 제사장은 레위 지파가 아닌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론의 반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멜기세덱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3절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존재가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을 세운 이유는 제사의 직분에 변화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천명한 하나님의 의지는 이전에 유대 공동체가 목숨처럼 여긴 제사와 율법의 불완전함을 지적한 것이었고, 이 불완전함을 다시 완전한 상태로 바꾸겠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불완전함을 고치기 위해 나타난 제사장이 멜기세덱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멜기세덱이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의 불완전함을 메우기 위한 대안이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히브리서 저자가 단지 멜기세덱의 대안론에 머물지 않고 더 중요한 한 사실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본문 13-15절을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분은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해 있는데 그 지파에서는 하나도 제사장 일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유다 지파의 후손입니다. 모세는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다른 제사장이 나타난 것을 보니 우리가 말한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히브리서 저자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 중에 완전한 제사장이 없기에 대안으로 제시한 멜기세덱이 귀하지만 멜기세덱보다 더 귀한 존재가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 즉 유다지파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강조한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지는 본문 16-18절에서 이렇게 강변합니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예수님은 율법에 얽매여 있는 존재가 아님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는 분이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율법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 계명을 폐하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심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능력의 소유자이시기에 그 분이 갖고 계신 능력을 본문 마지막 19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보다 더 좋은 소망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저자는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보다 더 좋은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소망 중의 소망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소망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임하는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나의 소망임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84:10절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구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편 84편의 부제가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6:21-24절에 따르면 고라 자손들도 레위의 후손들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대다수가 성전을 섬기던 성가대 찬양사역자들이었지만 때로는 성전에서 성전 문지기(대상 9:19, 26:1)로, 혹은 빵을 굽는 자(대상 9:31)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소개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을 섬기는 사역자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84:10절에 소개된 그들의 신앙고백과 노래를 들여다 보노라면 그들의 영적 시각과 거룩한 욕심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왜 이들은 휘황찬란한 세속적 영광의 자리보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는 성전 문지기를 선망했을까요? 그곳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출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에게 소중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암송하는 요한복음 14:6절을 곱씹어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도 선교의 성자라고 말하는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던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누가 나더러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구 두 구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다음의 두 구절을 꼽겠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과 이 예수‘(행 4:11)다. 예수의 유일성은 이 두 구절에 있다.”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복 있는 사람,pp,185-186.) 주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 앞에 서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그 분을 나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챨스 프라이스 목사가 갈파한 글을 읽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간구를 듣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이시다. 열매를 내는 것은 우리의 섬김이 아니라 섬김 가운데 있는 능력이다. 실재와 생명을 호흡하는 것은 우리의 교회 출석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챨스 프라이스, ”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사,p,180.)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제가 프라이스 목사의 이 글을 담아 놓은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 삶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궁극의 목적이자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행하셨던 삶을 우리도 살아내야 합니다. 2022년 오늘,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념과 사상이 내 삶의 소망이자 목적으로 변질되는 느낌을 받아 아쉬울 때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예수가 내 삶의 소망일 때만 가능합니다. 그분의 밀씀을 믿고 주님을 소망 삼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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