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4월 3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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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SUMMARY)
2022년 4월 3일 주일 설교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
본문: 사사기 1:1-3            제목: 말씀이 내 것입니까?

본문을 보십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1절만 다시 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었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가 모세와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리더십의 종말을 맞이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영적 공황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는 선언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본문은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급한 나머지 모세가 이야기했고 여호수아를 통해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했던 가나안 정착을 위해 누가 올라갈까를 하나님께 진지하게 묻는 장면입니다. 이 질문의 타당성을 인정하신 주님께서는 유다가 먼저 올라갈 것을 본문 2절에서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단지 이스라엘의 질문에 유다가 올라갈 것을 대답해 주신 것뿐만이 아니라 친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올라가 점령할 땅을 하나님이 친히 만드셔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넘겨줄 것까지 조명하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조명해주시고 응답해 주신 말씀에 순종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기 좋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본문 3절에서 보게 됩니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네가 올라가라는 명령에 유다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올라가면 되는데 명령으로 지목받은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시므온에게 동역을 요청합니다. 혼자는 못가겠다는 딴 지 걸기를 한 것입니다. 본문을 문자적으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혹시나 모를 가나안 정착 전쟁에서 패배를 염려하여 혼자 짊어지는 것을 분산화하려고 시므온을 불러 들이는 잔꾀를 부렸다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유린하고 본인들의 뜻대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주석서 중 상당수 많은 학자들이 본문을 이 상황을 유다의 충격적인 불신앙 장면으로 해석하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독특한 또 하나의 해석을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합니다.

어제 설교 준비 중에 차준희 교수와 본문에 대한 이해를 나누었습니다. 본인의 해석을 나눈 차 교수가 또 다른 구약학자의 사사기 해석을 소개하며 제게 그 자료를 보내주었는데 읽다가 신선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전성민 교수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who of us)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누’를 ‘우리를 위해’ (for us)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전성민,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p,26.) 전 교수의 해석을 따르면 해석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유다는 가나안에 올라가서 차지할 땅에 대한 이익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실 것을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이익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전체에게 배분하고 싶지 않았고 단지 자기의 친형제 지파인 시므온과 나눠 갖고 싶어 했다는 말입니다. 해서 시므온에게 요청했다는 해석입니다. 결국 극단적 이기주의로 유다의 행태를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왜 제가 이 상반된 해석을 함께 교우들에게 전했습니까? 전혀 다른 해석이기는 하지만 영적 경종의 의미는 전혀 다르지 않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둘 다의 경우, 모두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일의 극치였습니다. 유다 지파가 당시 12 지파 중에 가장 강력했던 세력을 갖고 있었던 지파인 시므온 지파를 끌어 들인 것은 가나안의 정착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수단이 아니라 인위적 수단으로 이루겠다는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가 아니라 시대에 걸 맞는 우리 방식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한 셈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는 아주 질 나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의 ‘살아내기’를 거부하는 시대의 정신은 하나님을 성가신, 귀찮은 존재로 인식하기에 발생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은 현실 안에서 이루어졌던 사사시대의 전형적 자화상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래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가장 시급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어떻게 선포할 것인가? 라고 생각하지만 더욱 긴급한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는가? 이다.”(찰스 링마, “본회퍼 묵상집”, 죠이 선교회, 167)

오늘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우리에게 던지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음을 묻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1인칭 객관화시키려는 몸부림과 치열함이 지금 나에게 있는가를 묻고 계십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일본 전후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사해 부근에서’라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슈사쿠의 작품에서 소름끼치는 작가의 성찰을 읽다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소설 안으로 들어가 보면 마태복음 26:59-68절의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대 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를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심문하는 장면이 슈사쿠의 독특한 필채로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전역에 걸쳐 유대 종교의 최고 권력자인 안나스가 볼품없는 초라한 모습으로 심문당하는 예수에게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체하는 기술을 나는 알고 있다네. 하나님이 없어도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성전의 모든 제사를 경건하게 거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이것은 사회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거든. 그런 지혜를 나는 나이와 함께 배웠다네.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삶의 방식이 그대의 것보다 현명하다고 본다네. 민족이나 나라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유리하지. 인간이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적어도 주거지와 함께 모여 결속을 다지는 장소는 만들어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라네.” (엔도 슈사쿠, “사해부근에서”, 바오로딸, 이석봉역, 2015,172.) 무시무시한 종교인의 껍데기 모습을 엔도가 무섭게 고발한 장면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의 절망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극이 어찌 예수님 당시만의 일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치명적 위기는 예수와 관계가 단절된 자들이 예수를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파악한 마이클 호튼 교수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 에서 각종 심리적 치료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고 있고, 긍정의 힘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질되었고, 이머징 처치가 어느새 복음의 능력으로 단장되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기독교를 좋은 조언 정도로 축소시키면 인생 코칭 문화에 딱 들어맞는다. (중략) 그러나 기독교를 구별시켜주는 핵심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계율이 아니라 예수의 이야기다. 개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김성웅역, 부흥과개혁사, 140-141.) 기가 막힌 통찰입니다.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쟁이라는 레떼르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세간의 판단입니다. 점검하십시다. 우리도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하나님께 묻는데 익숙한 종교적인 매뉴얼에 능숙합니다. 심지어 그 매뉴얼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에게 조명하셨어! 라고 간증하기도 합니다. 왜요? 묻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유다만 올라가라는 주님의 조명하심까지 알아차리는 종교적 민감함이 있는 수준까지 올라와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는 세간의 소리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질문하십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익숙한 종교적인 행위에 민감하기에 혹시 나는 네가 올라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1인칭 객관화시키고 있습니까? 그렇게 순종하는 신실한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왜 나만. 안 됩니다. 내가 가는 길에 시므온도 같이 갈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말씀을 2인칭, 혹은 3인칭 주관화시키는 영악한 종교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베드로에게 두 번째 미션을 주신 주께서 베드로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것에 대항 에두른 예고였습니다. 베드로가 뭔가 찝찝하고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여 주님께 요한에 대한 행적을 묻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의 질문을 받으신 주님의 답변이 의미심장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21:22절을 이렇게 보고를 마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신앙의 승리는 종교적으로 익숙한 행위나 관례 그리고 주워들은 풍월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승리는 오직 한 가지, 나에게 주어진 말씀에 대해 1인칭 객관화를 시키는 것뿐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는 전 주일인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시므온을 끌어들이지 마십시다. 유다인 나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인격적으로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십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성 있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