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1월 23일 (네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 설 명절에 나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46장 –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  복음성가: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살아 있습니다.
● 본문 : 히브리서 4:12-13
1)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다고 언급한 12절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3가지 해석은?
①   

  

2) ⓷ 항에 동의하는 이유를 말해보자.
⓵ 그랜트 오스본 박사의 해석을 참고하라.
⓶ 룻기 1:22절에 따른 적용   

3) 적용하기
⓵ 내 신앙의 여정 속에서 나를 견인했던 성경 말씀 한 구절은? 
⓶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내가 노력했던 것은?
③ 살아 있는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이번 주간 셀 사역

1) 주일 대면 심방에 참여하지 않은 셀 지체 파악  지체 심방하기(전화 심방, 대면 심방)
2) 특새 참석 독려하고 중보하기
3)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반드시 대면 예배 참석할 것 공지
4) 특새 특송 연습하고 준비하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사역지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22년 1월 2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15)
본문: 히브리서 4:12-13              제목: 살아 있습니다.

본문 12절은 너무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출애굽 시대를 지칭하는 과거는 물론 주후 6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기초로 하는 오늘, 그리고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그 날까지 영적인 가나안 입성은 계속해서 유효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 즉 말씀임을 살폈습니다. 이 약속의 현재진행이 무엇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저자가 언급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이 대목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로고스’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1:1절을 다시 복기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저자가 기록한 ‘말씀’이 바로 ‘로고스’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대체적으로 12절에 대한 해석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약 세 가지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교부시대 저자들을 비롯해서 종교개혁 시대의 주석가들은 ‘말씀’을 ‘그리스도 예수’라고 보았다.”(도널드 해그너, “히브리서의 신학적 강해”, 크리스천, p,104.)
하지만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서언에서 선언하고 있는 로고스 기독론이 히브리서의 여타 다른 증언들에서 보이지 않기에 단적으로 말씀을 예수라고 해석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반론에 저도 동의합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과 동일하게 보는 견해입니다. 말씀 중에 구약을 의미하는 구절이 있다고 해석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약만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수가 있어 보입니다. 이유는 세 번째 해석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심령에 행하시는 말씀으로 보는 이해입니다. 세 번째 해석에 담임목사는 동의를 표합니다. 세 번째의 해석이 이어지는 후속 구절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것을 선언한 저자는 이렇게 부연하고 있습니다.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적어도 저자는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 활력이 있다. Ⓑ 좌우의 날 선 검보다도 예리하다. Ⓒ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찌른다. Ⓓ 마음과 뜻을 판단한다. 그렌트 오스본 박사는 12절의 해석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이 어떻게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 즉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살아 있어서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는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말씀을 경청할 뿐 아니라 그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형성되도록 한다.”(그랜트 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성서유니온선교회, pp,109-110.)

지난 주 수요일에 창세기 49번째 강해 설교를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본문 텍스트는 창세기 12:10-20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과정에 일어난 기사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언약은 안중에 없이 불신앙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아브람이 적지 않은 신앙의 실패를 맛보았다는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나누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수요 설교 원고의 프레임에는 없었던 내증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강하게 말씀으로 조명하셨는데, 그 텍스트가 룻기 1:22절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날 저는 성령께서 강하게 역동하신 말씀의 내용을 받아 적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환할 때의 배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땅, 베들레헴의 흉년은 일시적인 흉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땅은 하나님이 풍성하게 하시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임했던 흉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강덕 목사 창세기 강해 1월 19일 설교 원고 중에서) 아브람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간 것과 엘리멜렉, 나오미가 은혜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간 것은 신앙의 패착이었다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랜트 오스본의 해석을 다시 떠올려보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 즉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살아 있어서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요구는 결단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말씀을 경청할 뿐 아니라 그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형성되도록 한다.”(그랜트 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성서유니온선교회, pp,109-110.)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12절에 기록된 대 그대로 히브리서 저자의 메시지인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세밀하게 적용되어야 살아계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3절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하면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꿰뚫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달아날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히브리서 4:13)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접속 부사가 헬라어 원문에 있습니다. 12절에 첫 문장에 ‘가르’라는 접속부사가 있습니다. ‘가르’라는 이 단어의 뜻은 ‘왜냐하면’ 혹은 ∼때문에‘입니다. 이 단어를 부가해서 12-13절을 번역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에 훗날 그 말씀 앞에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단히 세밀하고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마지막 날, 내가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드러날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벌거벗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분명하고도 적확한 명제 앞에서 우리들이 오늘 결단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 말씀이 살아 있기에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30-37절을 보면 성경에 기록된 비유 중에 가장 아름다운 비유 문학으로 칭송받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비유에 대해 열광하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임을 애써 강조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주께서 행하신 이유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율법교사의 저의를 분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저의가 악했던 율법교사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께서 그에게 되묻습니다. 네가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그 율법에는 영생의 취득방법이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를 묻습니다. 그러자 전공자인 율법교사는 율법서 신명기 6:5절 즉 쉐마를 인용하며 아주 담대하게 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7) 완벽한 교과서적인 답이었습니다. 이 답을 말하고 기고만장해 있는 율법 교사에게 주님이 비수를 날립니다. 누가복음 10: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영어성경 NASB 버전은 이렇게 표기합니다. “And He sai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오늘은 영어성경 원문을 여러 교우들에게 보여드렸습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미국의 젊은이들을 겨냥하여 번역한 NASB 누가복음 10:28절에서 이 대목만 대문자로 표기했을까요? “DO THIS, AND YOU WILL LIVE.” 성경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히브리서가 작성되었을 당시인 주후 60년대도 살아 있는 말씀이었지만 2000년이 지난 오늘, 제천세인교회 현장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어 우리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책 한 권에 대한 서평을 써서 나사렛 신문 2월호 기사로 송고했습니다. 박동현 교수가 쓴 ‘하박국 다시 읽기’라는 책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하박국이 1장에서 유다의 범죄를 그대로 묵과하실 겁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면서 유다를 치리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알았다. 내가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멸할 것이다.” 하박국이 화들짝 놀라 하나님께 기도제목을 바꿉니다. “하나님, 유다에게 채찍을 때리는 것을 제가 기도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짐승만도 못한 이방 나라에게 멸망을 시키신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유다의 멸망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고, 바벨론의 교만한 행태를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교만을 정의한 내용을 박동현 교수는 이렇게 기막힌 표현으로 기술합니다. “자기 힘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된 자” (박동현, “하박국 다시 읽기”, 대한기독교서회,p,54.) 북 리뷰를 교단 신문사에 보낼 때 제게 이런 소회가 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따라가며 순종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자기 힘으로 무장한 하나님 같은 나인가?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교사처럼 마지못해 이론으로 들어주고 있는 겉 멋 든 신자인가? 아니면 가서 이와 같이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말씀을 살아내는 자인가?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언젠가 간디가 막 기차에 오르려고 하는데 한 기자가 간디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인도 국민들을 위해 메시지를 하나 던져주십시오.” 그때 간디가 무언가를 종이에 급히 써서 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 (김진, “간디와의 대화, 어떻게 살 것인가?”,스타북스,p,53.)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믿습니까? 성경책에 활자화되어 있는 성경이 사장되어 있는 글입니까? 아니면 오늘 나의 현장에서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견인해 주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까? 13절 본문에 있는 그대로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는 그 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내 삶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흔적이라고, 메시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살아 있는 말씀대로 사십시다. 생각보다 그 날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