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2022년, 펜데믹 3년 차이지만 이런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누기를 바랍니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54장 – 주를 앙모하는 자 ● 복음성가: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붙잡아야 합니다. ● 본문 : 히브리서 3:12-19 1)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오늘’의 언어로 적용하라고 권한 세 가지와 그 답은? 2) 14절에 기록된 나에게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은 무엇인가? 실례) 첫 믿음, 혹은 첫 사랑을 나누어보자. 더불어 그 외의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나누자. |
3) 적용하기 ⓵ 나는 주님께 받은 첫 사랑의 감격을 복기하며 살고 있는가? ⓶ 내 신앙의 걸음마 시절을 딛고 도약하게 했던 계기가 있다면 무엇이었나? | 사역하기 (WORK)이번 주간 셀 사역
1) 주중에 주일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지체와 반드시 교제하기 (셀 리더가 일차적으로 파악하고, 미비 된 부분이 있으면 이상민 전도사에게 문의해서 안부 및 교제할 것) 2) 지역 셀 안에 있는 지체들의 기도제목 받기 3) 셀 리더가 중보하기 4) 특새 광고하고 스케줄 정하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요약 본문: 히브리서 3:12-19 제목: 붙잡아야 합니다.
서론)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문학 동네, p,71)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이라니!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라니! 일종의 무릎 꿇음이라니! 부패의 긍정성을 보았다. 어떤 사물과 사건에 관하여 주마간산 식으로 지나치는 자는 삶의 농익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일어난 일체의 사건을 1인칭 객관화를 시키면 그 시도는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과 울림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모두가 선생님이자 스승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오늘 나눌 본문은 유감스럽게 이렇게 본인들에게 임했던 은혜를 가볍게 여겨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자들을 소개하며 본문의 독자들이 반면교사 삼아줄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본론)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제사장이시면서, 구원의 도 자체이셨던 분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영적 기상도에 만연했던 주후 1세기 로마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모저모로 아슬아슬한 신앙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지 말 것에 대한 기대감을 배려한 일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라는 경고성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12절에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포스테나이’는 ‘배교’라는 의미로 쓰이는 영어단어 ‘apostasy'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설교 초두에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서 독자들 중에 상당수는 천사, 모세를 예수의 위상과 같은 레벨로 인정하는 위험천만한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들의 배교는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유대교로의 회귀를 배교라고 정의하는 강수를 둔 것입니다. 13-14절을 연이어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죄의 유혹으로 인해 완고해지지 않도록 하라고 권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성경 시편 95편에서 인용합니다.우리는 12번째 강해에서 이미 시편 95편의 배경을 나누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의 불순종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를 이끌던 모세의 총체적 불신앙 사건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5절에서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을 복기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성경이 고증하고 있는 15절의 사건을 시편 기자의 원 텍스트로 읽어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95:7-11절입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 불신앙의 사건을 끄집어낸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향하여 세 가지 수사의문문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 16-19절을 봅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 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①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역하느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다. ② 하나님이 40년 동안 노한 대상이 누구냐? 광야에서 범죄 하여 시체가 엎드려진 자들이다. ③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자가 누구냐? 순종하지 않은 자들이다.
본문에 기록된 사건을 텍스트로 이해하도록 도운 해석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공동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이 준비하신 안식의 장소(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는 교훈적 메시지가 본문 이해입니다. 조재천 교수가 이렇게 적용해 주는 기여를 했습니다. “시편 95편과 출애굽기 이야기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경고였다. 그들은 다시 질문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답은 명백했고 이번에는 주어를 ‘우리’로 내세워야 한다. 히브리서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16-18절을 들은 청중이 마음속으로 던졌을 법한 우리가 지금 던져야 하는 질문과 대답은 아래와 같아야 한다. (조재천, “히브리서 강해”, 홍성사, p,93)
문: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역하는가? 답: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죄의 노예상태로부터 인도받아 나온 우리들일 수 있다. 문: 하나님의 진노는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답: 우리도 죄를 짓는다면 죄에 대한 보응으로 죽게 될 것이다. 문: 혹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인가? 답: 그렇다. 불순종하고 불신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신 하나님,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본문을 ‘오늘’ 나의 언어로 적용하였습니다. 나도 시편 95편에서 인용된 므리바와 맛사에서 범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은혜에 도착합니다.
※ 첫 사랑과 첫 믿음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다시 읽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은 성도들 간에 시작할 때에 확신했던 것은 모두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기도의 응답으로, 어떤 이는 내 질병을 고쳐주신 은혜일 수 있으며, 어떤 이는 수렁에서 건져주시며 강권하셨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누구도 돌보지 않던 나를 찾아오셔서 사랑의 팔로 안아주셨던 감격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전제로 우리 모든 교우들이 견고히 붙들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다는 은혜입니다. 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첫 사랑과 첫 믿음은 주님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를 건져주신 은혜입니다.
신명기 1:29-3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모세가 뒤돌아보는 광야 40년의 회한의 설교입니다. 40년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이제 죽음을 목도하며 외친 모세의 이 설교를 통해 가슴에 부딪히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다 큰 위로가 되는 메시지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나보다 먼저 가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내가 경험했던 첫 사랑이요, 첫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4:19절은 은혜로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본 절을 고백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습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우리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첫 사랑입니다. 첫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과 첫 믿음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겠습니다. 이정일 교수의 일갈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신앙생활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언제나 첫걸음이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샘플이다. 하나님이 ‘나’라는 인생을 이 땅에 심으셨다. 그 목적은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또 다른 나무를 얻기 위해서다. 한 그루, 한 그루가 이어지는 그 길을 따라 주님이 다시 오실 길을 준비케 하기 위해서다.”(이정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 p,354.)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을 향한 첫 사랑과 첫 믿음에 붙잡혀 있어야 합니까?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이끌어주는 신앙생활의 첫 아딧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2-14절은 히브리서 13번째 강해를 통해 붙들어야 하는 은혜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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