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문구가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79장 –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오늘, 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 본문 : 열왕기상 18:1-6 1) 엘리야가 홀로 있게 되었을 때, 경험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⓵ 열왕기상 19:9 ⓶ 열왕기상 19:15-16 |
2) 오바댜의 신앙여정을 살펴봅시다. ⓵ 오바댜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했습니까?(열왕기상 18:3-4) ⓶ 오바댜의 길과 아합이 가는 길은 갈라지게 됩니다.(열왕기상 18:6)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⓷ 오바댜가 선택한 길은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나요?(열왕기상 18:7) |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 사역하기 (WORK)1)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가 조속히 진정되도록 2) 신천지 집단이 이번 계기로 와해 될 수 있도록 3) 코로나 사태로 신앙적인 여정이 둔감해지지 않도록 4) 다음 세대가 다시 살아나도록 5) 환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6) 사순절 기간 동안 개인적 영성 훈련이 돈독해지게 하옵소서 (계획 세우기) 7)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서
셀 사역
1) 수요 심야기도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2) 섬기는 피선교지 중보 및 셀 별 기도제목 숙지하고 반드시 중보하기 3) 지역 셀에서 형식적으로 태신자를 품지 말고 최선을 다해 영혼 구원 대상자를 선정해서 품고 기도하기 4) 개인 청결을 통해 건강 유지하기 5) 지역 셀 예배를 형식으로 드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은혜롭게 드리기 6) 셀 헌금 드리기를 통해 지역 셀 사역이 원활하게 진 행되도록 독려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요약 본문: 열왕기상 18:1-6 제목: 오늘, 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서론) “’신’이란 단어는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혼자가 아니면 절박한 현실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가 미국의 칼리 지브란이라고 격찬했던 휴 프레이더 목사가 쓴 ‘나에게 보내는 편지(notes to myself)’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은 고독할 때 신앙적인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에서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를 만납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그 엄청났던 기개로 바알리즘에 빠져 있었던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내에서 척결했던 인물입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이세벨의 살해위협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무력하게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의 한 굴에서 엘리야에게 현현하셔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십니다(왕상 19:9). 이에 엘리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만 남았다고 표현합니다(왕상 19:10). 그러나 외로움에 지쳐 있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을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한 선지자로 세우라는 삼중의 미션을 위임하셨습니다(왕상 19:15-16) 오히려 홀로 있을 때 가장 민감하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엘리야를 돌보신 은혜는 곧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면서 외로우십니까? 그 때가 가장 역동적으로 주군께서 당신과 함께 하는 신앙의 전성기라는 것을 믿고 힘을 내십시다.
본론)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외로워하며 신앙의 경주를 할 때 하나님께서 철저히 함께 하신 또 한 명의 위대한 동시대적인 일군 한 명을 소개합니다. 오므리 왕조를 계승하여 왕이 된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20년간을 통치하면서 재임 기간 최고의 경제적인 번영기를 이룹니다. 하지만 아합은 당시 두로의 왕이었던 잇도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한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종교적인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세벨이 열렬한 바알의 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정책적으로 바알 숭배를 독려했고, 당시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그 근원에는 바알이 돕고 있기 때문이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오도된 교육을 펼치자 북쪽은 하나님을 망각한 바알의 땅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세벨은 하나님을 믿는 예언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살해하는 악행을 자행하기까지 합니다. (열왕기상 18:13)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참담한 영적인 붕괴의 시기에 국가 종교이자, 국가적인 기득권에 힘입은 바알숭배주의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초기 예언자가 엘리야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엘리야는 예언자였기에 바알리즘과 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오바댜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의외의 인물처럼 보입니다. 본문 3-4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오바댜의 직속상관이었던 아합의 아내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색출해서 그들을 죽이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 오바댜는 이세벨이 찾아 죽이려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은밀하게 숨겨 그들을 보호하는 반역의 일을 감당하였다는 사실에서 아슬아슬한 감동을 엿보게 됩니다. 오바댜를 통해서 본문 밑에 깔려 있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충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 오바댜의 이 죽기를 각오한 사역이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②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녹을 먹고 있는 고위 공무원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기독교적인 언어로 바꾸면 그는 철저한 평신도 사역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바댜는 본인이 결정하여 진행해온 죽기를 각오한 하나님의 종으로의 섬김을 지속했다는 점은 대단히 큰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이제 오늘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3년 6개월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을 만난 아합은 자신의 힘의 한 축이었던 말과 노새를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를 느끼자 그가 신뢰하던 오바댜와 함께 동행 하여 물을 찾는 행보에 나섰음을 역사가는 소개합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기르는 가축들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야외로 나온 것입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두 사람의 행보를 밝힌 역사서 기자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아주 묘한 뉘앙스의 표현으로 6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6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말 그대로 두 사람이 더 극대화 된 효율을 얻기 위해 아합은 한 지경으로 갔고, 오바댜 역시 또 한 지경으로 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구절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고 또 다른 강력한 레마로 보였습니다. 아합은 아내가 믿는 바알 숭배를 허용하여 3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을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있는 길에 서 있는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보였습니다. 반면 오바댜는 그와는 반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속상관이 자행하고 있는 바알 숭배라는 최악의 선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서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섬기고 있는 또 다른 진정한 주인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서 있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이 기막힌 운명을 열왕기상 기자가 너무 예리한 역사적인 해석을 우회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 6절이 제 눈에 들어왔고, 제 심장을 타격했습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설정했습니다. “오늘, 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더 필요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외롭지만 세류(世流)와 역류하는 길에 서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나무나 잘 압니다. 세류는 아합의 길인 것을. 그 길에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우리들을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권력의 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며 말초신경적인 인간의 본능을 쾌락으로 인도하는 매력적인 신이 보장하는 꽤 괜찮은 유혹이 언제나 있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안락함까지 보장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길을 꽃길 같이 넓습니다. 반면 오바댜의 길은 언제나 아슬아슬합니다. 동시에 그 길에는 언제나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디 불편함뿐입니까? 그 길에 서 있는 자는 언제나 희생을 당하는 불이익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기가 싫은 데 자기를 부인하라는 종용도 당합니다. 심지어 그 길은 들어가서 걷기에도 결코 녹록하지 않게 길까지 좁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길에 서서 걷는 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해야 합니다. 자, 이 정도의 양 갈래 길인데 감히 누가 오바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누가 오바댜의 길을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10명 중에 10명 모두가 선택하고 싶은 길은 아합의 길일 것입니다. 이제 저 역시 결정해서 성도들에게 취사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결정하겠습니다. 세인 교회의 지체들이여! 절대로, 그리고 결코 아합의 길로 가지 말고,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오바댜의 길로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저 역시 정신병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저는 제 스스로 저를 스스로 다스리는 말씀을 언제나 끄집어내곤 합니다. 고린도후서 5:13-14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왜 우리가 아합의 길이 아닌 오바댜의 길로 가야 합니까? 아합이 간 길이 아닌 오바댜가 간 길에 엘리야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7절입니다.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우리는 왜 불편하고, 외롭고, 고독한 길을 선택하며 가야 합니까? 그 길 끝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여정에 있는 자들을 위해 주님이 그 길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정말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정말로 불안하고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음을 믿었던 오바댜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 길을 갔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교회의 본질마저 흔들고 있는 오늘, 그것과 편승하여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때,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또 어디에 없는가!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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