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0년 1월 19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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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깨기 (WELCOME)
일주일을 살면서 신앙인으로서 가장 당하는 비 신앙적인 유혹의 내용이 있다면?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41장 – 십자가를 내가 지고
●  복음성가: 무엇이 변치 않아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3)
● 본문 : 로마서 14:17
1) ‘캐리그마’ 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⓵ 정의: 설교를 참고하세요.
⓶ 내용
사도행전 2:22-36절에 있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설명해 봅시다.   

2)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경험한 내용에 대한 상고를 해 봅니다.
⓵ 설교 제목과 연관하여 설명해 봅니다. (예컨대 고린도의 시대적 정황과 영적 상태에 비추어)
⓶ 그럼에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사역을 승리한 이유는?   

3) 적용하기
⓵ 엘리 시대의 법궤 사건을 통한 반면교사 삼기 
⓶ 나는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대안을 찾고 있는가?
⓷ 십자가 신학을 사수하려면?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월 사역을 위하여
2) 환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김현섭 청년, 황홍일 집사, 장경석 형제 등등)
3) 새롭게 편성된 지역 셀 사역의 승리를 위하여 (리더와 인턴을 위해)
4) 설 명절 기간 동안에 주님의 향기를 바라는 행복한 연휴가 되도록
5) 담임목사의 목양 승리를 위해


셀 사역

1) 셀 예배 형식으로 드리지 않기.
2) 모이는 가족들에게 영적 덕담 선포하도록 독려
3) 고향에 가는 교우들은 고향 교회에 가서 헌금하고 오도록 권면하기.
4) 수요 심야기도회 준비하기
5) 사업체 심방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제목: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2)
본문: 고린도전서 2:1-5
성령이 그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 캐리그마(십자가 선포) 신학을 사수하는 교회입니다.
‘캐리그마’라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풀면 ‘설교’ 혹은 ‘권위의 선포’ 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사용하던 예수님 사역 당시의 캐리그마는 어떤 것을 의미했을까요? 가장 적합한 성경의 근거는 사도행전 2:22-24, 32-36절에 기록하고 있는 성령 받은 이후 처음 선포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먼저 22:24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그리스도의 부활)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중략)
32-3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그리스도의 승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리스도의 주 되심)
캐리그마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선포요, 설교입니다. 환언하자면 캐리그마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 선포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본문 3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왜 이리 심약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돕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이 땅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외딴 섬에 유배된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바울의 참담함과 더불어 그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게 만들었던 또 한 가지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에 첫 발을 디딘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제반적인 영적 상태를 직면하고는 이곳에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도무지 스스로 이겨 나아가기가 쉽지 않은 곳임을 직감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당시 헬라 지역에 만연했던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즉 미의 여신인 비너스 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더불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도시에는 아폴로 신전까지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폴로 신은 태양의 신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남성미를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를 섬기는 이방적인 종교성들이 고린도에 가득하였기에 남성들은 육체를 탐미하는 잡류들로 항상 들끓었고 이 현상은 고린도로 하여금 동성애가 가장 활성화된 지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고린도는 당시 최대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항구 도시의 특징은 현금 통용이 활발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업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바른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경제적인 부가 도리어 큰 자산이고 나눔의 도구들이었을 텐데 고린도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린도는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이런 고린도에 바울이 도착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다시 3절을 의미 있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정이 이 정도이라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정서상 맞습니다. 3절만 놓고 보면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 사역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한 반전이 오늘 본문 나머지 구절에 담겨 있음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린도의 정황으로 볼 때 고린도적인 세속의 풍성한 말잔치, 언어의 유희, 그리고 고린도라는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헬레니즘의 총아라고 하는 소피아(지혜)로 하나님을 증거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전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4-5절에서 바울이 사용했고 의지했던 영적 무기를 그들에게 다시 복기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무기는 성령의 나타나심,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무기를 사용하여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요? 그 선명한 답이 오늘 본문 2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본문을 오늘 설교 제목으로 바꾸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견인할 수 있었던 무기는 캐리그마 신학의 사수 즉 십자가 신학의 사수였습니다. 바울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로 인하여 살았고. 예수로 인하여 죽었던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아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예수의 사람이자 십자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능력을 공급 받아 예수를 증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캐리그마 신학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정항에 따른 해석을 기초로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 교회가 가져야 할 세 번째의 캐리그마(십자가) 신학의 정수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 캐리그마 플러스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사무엘상 4:5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엘리가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사사로 사역할 때 이스라엘의 영계는 만신창이였습니다. 엘리는 가정 목양에 실패한 무능력한 자였습니다. 단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함 이외에 그의 자식들이었던 홉니외 비느하스를 방치하여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아들들로 떨어지는 데 일조한 무능한 자였습니다. 마침 그 때, 블레셋이 아벡에 진을 치고 영적으로 무기력했던 이스라엘을 유린하며 괴롭혔습니다. 아벡 전투에서 4,000명가량의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스라엘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패배한 것은 엘리의 무능력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패역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는데 그 영적 민감함을 알 리 없었던 이스라엘의 장로 무리들은 우리가 아벡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가 전쟁의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내세워 실로에 있었던 법궤를 전쟁터로 옮기는 해프닝을 벌립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올 때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에서 이긴 것을 가정하고 큰 소리를 외치며 열광하였다고 사무엘상 4:5절은 증언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의 법궤가 이스라엘 군대 진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안 블레셋 진영은 더 강하게 단결하여 전쟁에 나섭니다. 사무엘상 4:6-1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지침과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자백처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견인하여 자유하게 하셨고 해방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도착한 이스라엘은 백전백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도착한 이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도착하기 전에 당했던 패배보다 8배에 달하는 더 큰 참패를 당합니다. 무엇을 시사 하는 성경의 교훈입니까? 아벡 전투에 끌려나온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전인격적인 하나님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아벡 들판으로 질질 끌려나온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고 필요할 때만 사용되던 얼마든지 만들고 또 만들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당용 부적에 지나지 않는 도구였습니다. 다시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비슷한 그 어떤 플러스를 동원한 종교적 쇼를 벌였다고. 그러면 이길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런 경거망동이 어디 사무엘 시대만 일어나는 망령된 일이겠습니까? 오늘도 매일반인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분명히 선포하지만 캐리그마의 선포를 기초로 하는 십자가 신학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유일하게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이고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당신과 나의 구주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명제입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는 여기에서 0,1도도 빗나가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만이 당신과 나의 주군이십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