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희 교수는 내게 주군이 허락하신 웬수(?)다. 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지방에서 목회를 한다는 핑계로 동기회를 거의 나가지 않아 친구와는 늦게 친해졌지만, 여하튼 차 교수는 내겐 그렇다. 목회를 하면서 목사가 계속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소한의 양심적 행위이자 목사가 감당해야 할 상식이다. 하지만 특히 나같이 全 목회의 시간을 지방에서 사역한 사람에게 있어서 트렌디 한 신학적 지식과 목회의 지식을 얻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어 매우 아쉬웠다. 특히 계속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성서신학적인 공부는 더 더욱 그렇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설교 파일 목록을 들춰 보았다. 내가 돌연변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구약과 신약의 설교 텍스트 비율이 6:4정도로 파악됐다. 아마도 이 통계는 내게 참 행복한 시간이었던 12 소선지서를 모두 섭렵했기에 그런 통계가 내게 적용된 듯싶다. 친구가 옆에 있어 내게 참 좋은 지지자가 되어 준 것 중에 하나가 바로 12 소선지서다. 친구가 펴낸 『열 두 예언자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간, 2014)은 특히 내게 소선지서 강해 모두를 마치는 데 혁혁한 도움을 주었기에 말이다. 구약 텍스트 설교를 준비하다가 막히면 언제나 전화할 수밖에 없는 친구는 그때마다 나를 자극하며 도전을 주었다. 그렇게 귀찮게 하며 나는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 2년에 걸친 끝에 욥기 강해를 마쳤을 때, 내심 친구에게 감사했다. 욥 강해는 친구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사역이었기에 그랬다. 어제 친구가 미주 사역을 감당하는 강행군 속에서 피어낸 3권의 저작과 역서, 그리고 제자에게 쓴 편지가 담겨 있는 서간체 공저 등 4권을 보내주어 받았다. 특히 전도서 주석은 나 또한 채근하였던 책이라 무척 반가웠다. 책을 받고 났는데 한편으로 조금 염려가 된 것은 친구가 이렇게 계속 해도 괜찮은가에 대한 건강 염려였다.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나 또한 서재에서 책과 씨름하고, 글을 쓰고, 날마다 주어지는 설교 텍스트와 씨름하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의 육체적, 정신적 소진에 시달리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그렇다. 웬수는 책을 보내면 항상 선하게 협박한다. 책 네 권을 보내준 친구가 어제 카톡으로 보낸 협박(?) 글이다. “친구의 날카로운 서평이 무섭다. 후덜덜” 하기야 저자가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 책을 읽고 글을 북-리뷰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책을 읽는 예의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언젠가 사석에서 속상함을 표현한 친구의 마음을 알기에 협박에 또 굴해야 할 것 같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지천(至賤)인지라 책을 받는 순간부터 머리에 쥐가 나고 있다. 철천지(徹天之) 웬수다. 한국교회를 위해 친구가 쓰러지지 않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월터 브루그만의 『구약 핵심사전』은 너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제일 먼저 페이지를 열고 열독하고 있어 서평 일 순위가 될 것 같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사족하나, 또 하나의 의무적인 숙제인 김기석 목사의 신간인 『말씀 등불 밝히며』가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848쪽이다. 하늘이 노랗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