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8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58) 본문: 히브리서 13:20-25 제목: 은혜가 단절되지 않기를 서론) 2021년 10월 3일 주일 오전 예배부터 시작한 히브리서 강해를 오늘 58번째 사역을 마지막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라는 책 자체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성경 텍스트 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잘 경청하며 따라와 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히브리서를 통해 배웠으니 이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세인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더불어 특히 주군이신 예수께서 총 13장을 통해 말씀하셨던 아름다운 삶의 내용들을 살아내는 세인 지체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20곳을 선교합니다. 제가 선교를 받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교 보고서를 써서 내라는 압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농촌 교회에서 3년 간 시무할 때, 매 년마다 선교하는 교회에 전도된 사람의 명수 등등을 보고하라는 명을 받았니다. 그때마다 전도된 인원 없음이라고 보고할 때는 마음이 매우 찹찹했습니다. 그냥 교회가 있어주는 것만도 감사한 농촌의 상황을 거짓으로 만들어 보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매우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너무 뼈저리게 안 저는 선교하는 교회 목사가 된 이후 단 한 차례도 피선교지에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종용하거나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1년 내내, 단 한 번의 교제 전화도 없는 피선교지는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매년 12월이 되면 연락하는 피선교지는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선교를 받는 교회에서 소식을 단절하는 것은 결코 상식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셀 리더들에게 도리어 안부 전화를 드리라는 해프닝도 벌입니다. 가장 나쁜 사람은 은혜를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받은 은혜는 공유하는 것이며 나누는 것이며 감사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이런 은혜를 선포하고 나누고 공유하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을 나누어 보십시다. 본론) 오늘은 히브리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들을 향하여 표현한 저자의 마지막 끝인사입니다. 본문 20-21절은 저자가 독자들을 위해 행한 의미심장한 축복기도입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축복기도면 축복기도인지 제가 왜 의미심장하다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그 이유는 저자가 행한 축복기도 안에는 그 동안 저자가 강조하고 역설했던 히브리서 전체 안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도가 다시 표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예수를 우리 주라고 정의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줄곧 이스라엘 신앙공동채의 죄 용서의 방법으로 매년 죄를 짊어진 제물들이 흘린 피를 성소에서 뿌릴 때 가능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의 한계를 폐기하시고 직접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자인 수신자들에게 몇 가지의 복이 이루어주시기를 강복하고 있습니다. ⓵ 너희들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⓶ 구주 예수로 말미암아 즐거운 일이 너희들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분명히 저자의 축도입니다. 그런데 이 축도의 매개는 저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기도를 마친 저자는 다시 끝인사를 수신자들에게 전합니다. 22-23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히브리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본서는 많은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편지가 아니라 분명히 설교 원고에 가깝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저자는 이 글의 성격을 권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했습니다. ‘파라클레시스’(권면)는 하나의 의미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애원함, 충고함, 위로함 간청함 훈계함, 격려함 등등의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설교입니다. D, 거쓰리 교수는 그래서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파라클레시스’를 해석했습니다. “히브리서 안에는 격려가 주요 특성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데 기꺼이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내용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분명히 설교로 준비되었을 것이다.” (D, 거쓰리, “텐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15-히브리서”, 413.) 저자는 설교문을 마무리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 데 극도로 절제하면서 글을 줄였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간단히 썼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13장 전체의 글 중에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입니다. 이 말은 저자와 같은 시기에 같은 동역의 사역을 감당했던 사역자가 디모데였음을 알려줍니다. 23절의 글감에 따르면 디모데의 몸이 자유롭지 않은 구금 상태에 있었다가 석방된 지 얼마 안 되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더불어 수신자들에게 하나의 위로와 격려를 남깁니다. 디모데가 내게 오면 그를 설득해서 이 설교문을 읽고 있는 디아스포라 기독교 공동체에 그를 속히 보내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전합니다. 아마도 두 가지를 추측하게 해 주는 데 하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디모데를 요구했든지. 아니면 또 다른 하나는 저자의 입장에서 배교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수신자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기에 최적임자가 디모데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지 디모데의 동역이 절실함을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라클레시스(권면)를 한 저자는 설교문의 대단원의 막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24-25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은 아마도 저자와 함께 있는 리더 그룹을 총칭할 것이며,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은 원래 거주하던 곳이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달리야였는데 지금은 그곳을 떠나 저자가 거주하고 있는 여타 지역으로 들어와 함께 교회 공동체 안에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의미할 것이고, 또 이런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라는 이 설교문은 이달리야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보내진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끼리 비록 거주하고 있는 공간적 장소만 다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고 그 분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자고 역설한 설교 메시지가 히브리서인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며 저자는 바울을 정신을 따랐던 제자였을 가능성 그대로 선생이 주로 썼던 관용구로 끝맺음의 축도를 행함으로 설교문을 맺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저는 저자의 마무리 멘트를 교우들에게 전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나눔으로 히브리서 강해를 마치려 합니다. ※ 교회 공동체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교통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24-25절에서 은혜가 이어지기를 소망했던 저자가 언급한 공동체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 전체를 말합니다. 다시 언급해 봅니다. 너희들을 인도해주는 공동체, 모든 성도,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까지 저자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연결된 일체의 공동체를 지칭했습니다. 이들을 묶으면 무엇이 됩니까? 교회가 됩니다. 주목할 내용이 보입니다. 주후 1세기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속 공동체가 서로에게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단어는 ‘카이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시대에 같은 지역적 공간 안에 살고 있었던 저자가 또 다른 교회 공동체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인사를 한 단어는 전혀 다른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주후 1세기 교회 공동체 안에서만 쓰는 단어인 ‘카리스’ 즉 ‘은혜’라는 단어로 문안했습니다. 다시 견주어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속 공동체와는 다르게 교회 공동체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바로 ‘은혜’라는 점입니다. 왜 이 ‘은혜’ (카리스)는 교회에서만 사용했을까요? 이 ‘카리스’는 예수를 그리스도, 즉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만 임하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성탄주일에 영양에 거주하는 이동화 권사님 부부가 정말로 오랜만에 모 교회를 찾아 예배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났는데 아내가 제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봉숙 집사님에게 전화 한 번 넣어보세요. 여타 다른 때보다 얼굴 표정이 많이 안 좋아 보였어요. 어디가 아픈지 염려되니까 당신이 한 번 전화를 넣어보세요. 식사도 안 하고 급히 가셨어요.” 주일 사역을 마치고 전화를 드렸는데 통화가 안 되어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큐티를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문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어제 전화를 무음으로 해 놔서 늦게 목사님 전화 문자를 보았어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목사님 주무실 것 같아 전화를 못 드리고 오늘 아침에 염려하실 것 같아 전화를 드립니다. (중략) 목사님, 어제 성탄예배 시간에 조금 힘들었습니다. 코로나 정국이어서 그러기는 했지만, 너무 오랜만에 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고 나니 힘들었습니다. 나는 왜, 그 멀리 영양으로 가서 이렇게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이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인사도 나누고 식사도 같이 하고 교제할 마음으로 영양에서 올라와 성탄예배에 참석했는데 오랜만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고 나니 도리어 제 마음이 울컥함과 동시에 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해지고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성도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제가 속상했습니다. 목사님, 정말로 오랜만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렸는데도 제 마음이 속상하고 안타까워 제대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나와 너무 죄송했습니다. 다음에 따뜻한 날이 되면 다시 은혜로운 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울컥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맨 문 집사님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문 집사님과의 통화 이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너무 당연하게 세인교회 예배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사모하는 예배인데 드릴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부득불 그 현장에서 예배를 참석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때문에 속이 상하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을 여러분은 갖고 있습니까? 나는 은혜로 점철되고 있는 예배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예배를 엔조이하며 취사선택하는 종교 쇼 관람꾼으로 전락되었는데도 그 은혜의 단절됨에 대해서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은혜 마비 자들이 혹시 우리 중에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목사는 세인교회 예배에서 단 하루, 한 시간도 예외 없이 위로부터 내리는 기름부음의 은혜가 쏟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합니다. 여러분은 그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은혜가 단절되면 그건 그냥 집단에 불과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기대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라 그냥 무리입니다. 세속공동체가 아무리 휘황찬란한 첨단의 시스템을 동원하여 뭇 사람들에게 감동 아닌 감동을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카리스 즉 은혜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히브리서 강해를 마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는 가장 뛰어난 나의 구주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는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모욕을 참으신 당신의 구주이십니까? 여러분은 그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 위에 머물러 있습니까? 나는 히브리서에 저자가 전한 예수가 피상적인 예수가 아니라 여러분의 구주이신 예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로 인해 그분의 삶을 넉넉하게 살아내는 교우들 전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어둠 속 헤매이던 내 영혼 갈길 몰라 방황할 때에 주의 십자가 영광의 그 빛이 나를 향해 비추어주셨네 주홍빛보다 더 붉은 내 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어 완전한 사랑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 주께 얻었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십자가의 그 사랑 능력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놀라운 사랑 그 은혜 아니면 나 서지 못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