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2:11-19
제목: 사라진 이삭, 그러나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 구절에 익숙한 우리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라는 개념으로 항상 인용하는 상용어가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저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할 제물을 미리 준비해 두셨다는 사실에 대해 1%의 의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핵심적 교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는 결과가 아니라, 지난 주 수요일에 선포한 77번째 강해의 메시지처럼 아브라함, 사라, 이삭 등 세 사람의 신앙적 합일이 결론을 아름답게 만들어낸 동기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수요 예배 설교에서는 모리아 산에서 행해진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의 위대한 합작품 후편에 대한 은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쥐고 이삭을 잡으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의 이름을 연속해서 부르셨습니다.
11절에서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렀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대단히 급하셨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치려는 그 가장 급한 위기일발의 상황을 만난 하나님께서 두 번에 걸쳐 연속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본문(11절)에서 창세기 기자가 신명(神名)을 바꾸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로 바뀝니다.
왜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신명의 이름을 여기에서 바꾸었을까?
고든 웬함의 해석이 돋보여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사자’라고 기록한 것은 약속된 이삭이 태어나는 장면에서 마지막으로 쓰여진 언약과 관련된 하나님의 이름이다.(21:1)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낯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은혜로운 여호와라는 것을 보여준다.” (고든 웬함, WBC-창세기 주석, 235)
창세기 21: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존재로 성경은 묘사한다. (21:17, 28:10, 32:1 등등) 하지만 11절에서 ‘하나님(엘로힘)의 사자’라고 표현하지 않고, ‘야훼의 사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손을 대지 말라’는 천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11절의 명령이 단순히 아브라함이 있었던 모리아 산에서 천사에게 대언하게 한 외침이 아니라, 하늘 거처에 존재하시는 야훼께서 너무 급해 직접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불러 금지명령을 내리신 것임을, 창세기 기자가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킹덤북스, 103-104)
무슨 말입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너무 다급한 나머지 아브라함이 진행하려는 아들 살해 중단을 명하셨다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신속한 명령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이 전해지는 대목입니다.
12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구절을 갖고 삐딱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일체의 무리들이 기회를 잡아 공격하는 빌미가 있습니다.
이 대목이야 말로 야훼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정하지 않게 하는 증거라고 책잡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자들에게 혀를 내두르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전지함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의미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내적 신앙의 사실을 행동을 하나님도 인정하신다고 도장 찍으신 감동의 표현입니다.
시비 걸기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 텍스트의 압권에 도착했습니다.
13-14절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의 순결한 믿음과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에 쓸 숫양을 보이게 하셨고, 그 숫양을 제물로 드리는 번제 행위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공동 행위를 통해 진행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더불어 아브라함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번제를 드린 장소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고 명명함으로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는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의 공동으로 합작한 승리의 결과로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언제나 모리아 산에서의 번제 사건은 독자들에게 이런 해피엔딩의 은혜를 제시해 줍니다.
창세기 기자는 해피엔딩을 이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을 본문 17-18절에서 다시 확인합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전에 아브라함에 주어졌던 복에서 한 가지가 더 첨가되었는데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라는 첨가된 복입니다.
아마도 이 복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거머쥐게 될 열방을 향한 승리 정도로 해석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감동적으로 다가온 마지막 구절 19절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이 구절을 읽으면서 혼돈스러운 점 하나가 생깁니다.
창세기 기자는 모리아 산의 승리를 경험한 아브라함이 산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던 종들과 함께 브엘세바로 돌아갔다고 증언합니다.
무엇이 혼돈스럽습니까?
앞에서 해석한 번제 사건을 전제한다면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이삭이 사라지고 없다는 점입니다.
브엘세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도 이삭은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일부 중세 유태인 주석가들은 이 구절 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쳤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후 이삭을 하나님께서 부활시켰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유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유일성을 반대하기 위한 포석에 지나지 않는다. 19절에서 이삭이 사라진 이유는 이 담론이 이삭의 메시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메시지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만 묘사한 것이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400-401)
송병현 교수의 주석에 동의하면서 조금은 더 의미 있는 19절 해석의 메시지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동의하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끝났고 생은 계속된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되는 삶은 다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리아 산의 경험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삭이 아브라함과 함께 돌아왔다는 언급이 없다. 이제 이삭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돌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과 섭리에 맡겨진 삶을 살게 된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킹덤북스, 103-104)
하경택 교수의 이 해석이 진하게 가슴에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헤쳐 나가는 신앙의 길목에 모리아 산 이전과 모리아 산 이후는 분명히 달랐을 것이라는 점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모리아 산 이전과 이후, 이삭에게 나타난 가장 결정적인 신앙적 삶의 변화는 主君이 바뀌었다는 변화입니다.
모리아 산 이전, 이삭의 주군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이 갖고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은 가히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리아 산까지 같이 올라갔고, 그는 묶임(아케다)을 당할 때도 반항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대신하여 숫양을 번제물로 ‘이레’하신 야훼 하나님을 목도한 이후, 그의 전 인생의 삶에 있어서 주군은 아버지가 아닌 야훼 하나님으로 전환되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의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환은 혁명적인 전환입니다.
이 전환이 없는 자는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포장해도 진정한 그리스도인 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 목사로 살던 나의 깊은 폐부를 찌는 랭던 킬키의 ‘산둥 수용소’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때의 감동과 흥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중국 위현에 수감되어 있었던 다국적 수용인들의 부류들은 다양했습니다.
지식인들은 물론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섞여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성직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들, 설교자, 선교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일반 성도들이 끼여 있었습니다.
특히 개신교 선교사들의 특이점은 현대판 바리새인이나 유대 종교주의자들과 같은 극단적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로 극혐의 대상이었음을 킬키가 고발합니다.
미국과도 같은 강대국 시민권자들이나 그렇지 못한 약소국의 서민들이 함께 무리로 수용되어 있는 현장에서 자국의 힘을 믿고 최악의 이기주의자들로 소개되며 적나라하게 파헤쳐집니다.
이 책의 말미에서 킬키가 토해냈던 한 문장이 제게는 깊이 내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유한한 대상에게 궁극적인 종교적 헌신을 하는 것이다. 즉 죄란 자아와 자아의 실존, 또는 자아가 속한 집단에 최우선적인 관심과 헌신을 기울이는 것이다.”(랭던 킬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432.)
모리아 산은 이삭에게 있어서 유한한 대상에게 집중했던 나약성을 벗어 던지고, 이제는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주군을 갈아타는 엄청난 현장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엔카운터를 경험한 이삭이었기에 믿음의 후배였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후대에 그의 신앙적 토대를 글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9절을 나눕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극찬한 히브리서 저자의 이 기록에서 저는 ‘동일한 약속의 유업을 함께 받은 이삭’이라는 바로 이 구절 때문에 이삭이 경험했던 영적 눈 뜨임에 대해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구원 그 이후 반에서 지체들과 나누는 텍스트에서 저자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외적 조건을 구비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서 오늘을 걸어가야 하는 싸움입니다.” (박영선, “구원 그 이후”, 무근검, 100.)
전적으로 아멘 합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그리고 제가 선택한 주군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우리들의 현장이 모리아 산이어야 합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신앙의 독립군으로 하산하기를 바랍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구원하신 야훼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타오르는 인생의 사막 길을 걸을 때
타오르는 인생의 사막 길을 걸을 때
갈급하여 지치고 쓰러지던 발걸음
생명수는 어디에 솟아날까 어디에
애태우던 발걸음 생명 샘을 찾았네
사막 길이 끝없어 쓰러지고 말 때에
그 누군가 다가와 생명수를 주시네
인자하신 그 모습 나의 구주 예수님
두 팔 벌려 날 안고 참 평안을 주시네
인생길이 험하나 낙심하지 마세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안에서 살면서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를 마시며
영원토록 샘솟는 소망으로 살아요
저 천국이 내 가슴 설레이게 하네요
광채 나는 주 영광 끝없이 핀 꽃무리
유리 바다 황금 길 열두 진주 문들과
주님 계신 저 천국 내가 갈 곳 저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