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22:1-14
제목: 함께 나아가서 우리는 창세기 22장을 읽을 때마다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지르는 것이 거의 공통적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바칠 수 있단 말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야! 세상에 이런 엄청난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지? 등등의 소회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극찬합니다. 한편으로 보면 너무 마땅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금 더 본문 해석을 진중하게 살펴본다면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더 소중한 것들이 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음에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이 구절은 본문 해석에 있어서 창세기 22장 구절 중에 가장 감동적이자, 드라마틱한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이라고 여겨지는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명령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두 명의 종을 대동하고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진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마침내 제 3일이 되는 날, 모리아 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5절에 기록된 대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후반절을 주목해야 할 구절입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5절 2f)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너희들은 더 이상 나와 내 아들을 따라오지 말라고 명한 뒤에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들에게 돌아오리라. 왜 아브라함은 이삭을 아들로 지칭하지 않고 아이라고 칭했을까? 이 점에 대해 영국 글로체스터 대학교의 고든 웬함 교수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이’(나아르)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목하라. 이는 아브라함이 초연해지려고 애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어떤 의미에서 이삭은 더 이상 그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고든 웬함, WBC-창세기 주석, 231)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행위에서 얼마나 초인적으로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더 주목할 것은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구절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믿음으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자가 아브라함이라면 마땅히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지만 창세기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아브라함과 이삭)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1인칭 단수가 아닌 복수로 주어를 삼은 아브라함의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콜롬비아 대학교의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해석은 기가 막힌 해제이기에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을 통하여 나는 자라야 아브라함 후손이라 칭함 받을 것이라는 데 있다. 창세기 21:12절의 약속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하나님의 명령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데 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후손도, 미래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다시금 불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11:30절 이후 순례 여행도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 약속이 취소될 지경에 이르렀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죽음을 명하실 수 있는 것일까?”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 창세기, 291-292) 브루그만 교수의 해석에 동의하는 것을 전제할 때,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선언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살리실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아들과 함께 모리아를 행하여 길을 떠난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이 브루그만의 해석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살리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가 허용되지 않음을 설교자인 저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테스트에 대해 아브라함이 승리할 수 있도록 견인차의 역할을 한 또 한 명의 주연 같은 조연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창세기 22:1-19절까지 기록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삽화의 기록 중에 단 한 구절도 사라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생리가 끊어졌기에 신체적, 생리적 조건으로는 결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사라가 90세에 초자연적인 은혜와 기적으로 낳은 아들을 남편이 자기와 일말의 상의도 없이 번제로 드리겠다고 모리아 산으로 떠나는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림 하나를 보겠습니다.
(샤갈의 이삭의 희생)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인 마크 샤갈이 그린 ‘이삭의 희생’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소개한 이유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아닌 사라 때문입니다. 나무 밑에 숨겨진 양 뒤로 한 여인이 보입니다.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여인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절규하고 있습니다. 사라입니다. 아들을 죽이려는 남편에 대해 사라는 도대체 무엇을 하였을까? 성경이 제시하는 사라의 반응은 사라짐이었습니다. 샤갈은 그림을 통해 사라의 마음을 캔버스에 담았지만, 창세기의 내증은 사라를 사라지게 했다는 점에 독자인 우리들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당시 족장 시대는 철저한 가부장적인 권위 구조였습니다. 여성의 인권적인 발언은 묵살되던 시기였습니다. 대단히 보수적인 학자들은 시대의 상황이 그러하였기에 아브라함은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사라와 논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방해 요소들은 근원적으로 제거했다고 해석하기를 주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접근해 보려 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몸이 묶여 번제로 드려지는 아들보다 더 큰 절망과 아픔이라는 묶임을 당하여 모리아 산에 함께 누워있는 여인이 바로 사라였다고 말입니다. 그녀도 공간은 다르지만 이삭과 같이 희생을 당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본문 7-8절을 읽겠습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저는 이 구절에서 가슴 벅참으로 음미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특히 8절 하반절의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입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죠?’ 이 질문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번에는 ‘나아르’ 즉 ‘아이’라고 호칭하지 않고 히브리어 단어 중에 상속자로 지정한 ‘아들’을 의미하는 ‘벤’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답합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을 거다.’ 아마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마음으로 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번제에 사용할 장작을 들고 모리아 산행을 이어갔음을 창세기 기자가 표현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해석이 갈라집니다. ⓵ 이삭은 자신이 제물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⓶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대해 짐작했다. 저는 후자에 한 표를 던집니다. 이유는 이어지는 본문 9절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이 구절에서 엿 볼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장작을 들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정도의 체력이라면 장년은 아니더라고 청년의 육체를 갖고 있었던 이삭이라고 짐작해도 됩니다. 청년 이삭의 나이를 학자들은 약 17-20세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결박하는 117-120세가 된 노쇠한 아버지 아브라함이 행동에 대해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 이삭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서도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저항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묶을 때 저항하지 않은 것은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믿음의 반차를 따라갔을 가능성 ⓑ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행하려는 것에 대한 철저한 순종 이 둘 중에 어떤 것이든 분명한 사실은 둘 다 이삭이 갖고 있는 놀라운 믿음 행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았던 이삭의 반응은 대단히 충격적인 신앙의 반응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모리아 프로젝트의 은혜의 절정을 맛보게 됩니다. 사라의 묶임과 더불어 이삭의 묶임이 아브라함의 모리아 프로젝트를 승리로 이끈 숨겨진 결정체였다는 은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했다고 본문 9절이 보고합니다. ‘결박하다’는 단어 히브리어 동사가 ‘아카다’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바로 이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자유를 속박당하고 쇠사슬에 묶임을 당할 때 쓰이는 단어가 ‘아카다’입니다. 그래서 ‘묶임’이라는 단어를 의미하는 명사 ‘아케다’는 이렇게 해석할 때 가장 적확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케다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이삭은 자기가 제물 될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하여 기꺼이 나아갔던 그 ‘묶임’의 신앙이야 말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신앙의 성숙과 절정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설교의 레마를 나누겠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 묶임(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치열한 신앙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이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교우들과 공유하겠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창세기 41:1-16절을 텍스트로 새벽예배 큐티를 진행했다. 교우들에게 전한 메시지의 논지는 이것이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이 깨닫지 못하는 영역에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2년이라는 시간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잊혀진 시간이었고, 요셉에게는 견디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 들어 있던 카이로스가 가기 위한 크로노스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은 요셉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설교를 새벽예배에 참석하여 교우 한 명이 SNS로 아침에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목사님, 새벽말씀이 가슴에 잔향이 남아 적어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각이 아닌 요셉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었습니다. 2년여의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 참 많은 기다림 속에 있었지만 요셉에게서의 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고통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네요. ‘하나님의 때’ 나에게도 이런 인생의 전환점이 올까요?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보다는 점점 현실의 늪 속에서 한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흘려보내는 어리석음도 드러내게 됩니다. 요셉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때는 전환점이 되겠지요. 16절의 말씀처럼 요셉이 바로에게 전했던 말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2년여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다듬으시고 삶의 경지까지 오른 요셉의 마음이기에 더 깊이 느껴집니다. 인생의 과정가운데서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까지도 주관하시고 일하시고 계셨던 하나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삶의 문제가운데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하나님께 묻고, 기다리고 하는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깨닫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이 주의 손에 달려있다는 주권자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내 남은 삶을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엎드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도 소망으로 갖게 하셨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습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오늘도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를 기다리며. 요셉처럼 옷을 갈아입히시고 인생의 전환점을 만드시며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때를 소망하며 또 기다려봅니다. 요셉의 삶의 깊이가 너무 가슴 뼈저리게 느껴져서 목사님께 토로해봅니다. 오늘도 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해보겠습니다.” 이렇게 글을 보낸 지체가 계속해서 다음의 질문을 제게 던졌습니다. 질문1. 어떻게 하면 요셉처럼 기다릴 수 있을까요? 질문2. 도대체 하나님은 제게 왜 이리 엄격하게 하실까요? 질문을 받고 지체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오전 내내 주군께 지혜를 간구했고 저녁 시간에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돌아오는 수요일 저녁에 교우들과 나눌 창세기 77번째 강해에서 나눌 메시지 논지인데 지체께 간단히 말할 게요. 우리는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친 기사를 읽을 때 항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무대 위에 올리지요. 하지만 이 기사의 주인공은 어찌 보면 이삭이지 않나 싶어요. 묵묵히 묶이는 이삭 말이죠. 묶인다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아케다’라는 단어입니다. 흔히들 ‘묶임’을 부정적이고 피해야 할 그 무언가로 보지요. 하지만 묵묵히 묶이는 이삭을 보면서 아브라함보다 이삭의 믿음이 더 돋보이는 것은 이강덕 목사만의 느낌일까 생각할 때가 참 많아요. 집사님. 골이 깊고 오래되었나요? 그 묶임의 시간이. 요셉이 더 깊게 와 닿았다고 했죠? 전적으로 동의해요. 하지만 매정한 담임목사의 비루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마디 사족을 달게요. 묶여 있을 때가 나는 믿음의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묶이지 않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어지러워지네요. 담임목사가 요셉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정이입하고 싶어 하는 지체의 마음을 함께 안고 달려갑니다. 지체의 그 치열함을 응원할 게요.” 질문1. 어떻게 하면 요셉처럼 기다릴 수 있을까요? 묶여 있다는 것이 은혜라고 믿으면 요셉처럼 기다릴 수 있을 거예요. 단언하지만 ‘아케다’가 은혜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전제하기만 한다면. 질문 2. 도대체 하나님은 제게 왜 이리 엄격하게 하실까요? 담임목사가 무지해서 미안해요.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일하심에 가타부타할 수 있겠어요. 다만 저는 지체의 이성과 감성 속에 진하게 배어 있는 엄격함이라는 단어가 안아주심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이기지 못하는 감동으로 자리매김하기를 중보 할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어요. 엄격하심보다 안아주심으로 지체를 주목하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지체의 하나님이심을. 다시 지체에게 답신이 왔다. “사고의 전환이네요. 믿음의 눈. 믿음의 언어, 묶임의 시간에 은혜가 되고 엄격함이 안아주심으로 이해되는 영적 시각의 전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가슴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묶임’의 자리를 회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묶임‘을 회피하는 자가 올바른 신앙인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입니다. 이삭처럼 ‘묶임’의 자리로 올라가십시오. 사라처럼 희생당하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찢었지만 기꺼이 그 희생을 수용하는 ‘묶임’에 동참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성도와 함께 하시고, 그 현장에서 어린양을 예비해 두십니다. 하나님은 ‘아케다’라는 묶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와 함께 하시도록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묶이지 않는 자’는 이 은혜를 결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내 가슴을 타격하는 구절 때문에 행복해 집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널 붙들어 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