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4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일흔 다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21:1-8 제목: 다바르와 레마 흔히 기독교를 말하는 설명 중에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말씀의 종교’라는 정의입니다. 기독교를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말씀의 종교’라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한 것임이 분명한데 유감스러운 것은 그 뜻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씀의 종교’라는 의미는 설교만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뜻의 진의(眞義)는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가톨릭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 무력화시키고 중요시여기지 않는 종교적 타락이 일어나자 이것은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지성적이자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개신교는 이런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래 기독교에 대해 비난하는 자들의 상당수가 타깃으로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신-히어라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분리된 개신교회가 도리어 그 말씀을 더 무시한다는 것에 대한 비평과 비난이 그 주를 이르고 있습니다. 기실, 그도 그럴 것이 말씀 왜곡은 다반사고, 말씀을 유리하게 해석하는 신-바벨탑을 쌓는 일들이 백주에서 행해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더 인간적인 방법들을 동원하고 견고한 탑을 쌓으며 메머드화 되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유감천만인 것은 이런 왜곡된 교회론이 마치 정답인양 벤치마킹하는 교회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결국은 말씀을 더 무시하는 영적 자화상이 한국교회의 민낯이라는 점입니다. 절치부심함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은 시원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회복 없이는 교회의 회복도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본문의 내용은 드디어 25년 전부터 집요하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고하는 기사입니다.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그 동안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의 천사들을 통해 고지하셨고 약속하셨던 적자의 탄생을 보고합니다. 엘리에제르가 후사가 되지 않고 네 아내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후사가 될 것이라는 언약, 변칙적인 이스마엘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이 후사가 아니라, 네 아내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이 후사가 될 것이라고 재차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하는 텍스트가 본문입니다. 99세의 아브라함, 89세에 사라에게 오셔서 네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재확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아들 탄생의 약속에 대해 믿지 못했던 사라와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의 탄생 고지에 콧방귀를 뀌며 웃었던 그 웃음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아들의 이름을 이삭 즉 ‘웃는 자’, ‘기쁨’이라고 지은 일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징표인 할례까지 이삭이 낳은 지 8일이 되는 날에 실시했음도 창세기기자는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8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하나님의 일하심은 신비의 신비입니다. 90세에 여인 사라가 젖을 만들어냅니다. 만들어낸 젖을 아들 이삭에게 먹입니다. 역사적인 현실성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창세기 저자는 아주 디테일한 묘사를 숨기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젖을 뗐고, 그 젖을 떼는 날 기쁨을 숨기지 못했던 아브라함이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고지하고 있습니다. 아들 이삭탄생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토대로 우리 교우들이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을 찾기로 했습니다. 본문 1절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90세가 된 사라에게 아들을 준 이유는 말씀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에 현현하셔서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18: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소돔 성 멸망 직전에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다시 재차 확인해 주신 아들 이삭에 대한 탄생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약속에 대한 성취를 보고하는 보고서입니다. 보고서의 내용 중에 두 번에 걸쳐서 반복된 용어가 무엇이었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본문 1절에 기록된 ‘말씀하신 대로’는 히브리어 ‘아마르’(rm'a;)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용법 중에 ‘아마르’는 화자가 말하는 말의 내용에 집중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표현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동사가 ‘아마르’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 두 번씩이나 반복된 단어가 바로 ‘아마르’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목하는 단어는 화자가 말한 내용에 대한 것을 강조하는 단어인 ‘아마르’가 아니라 ‘다바르’(rb;D)입니다. ‘다바르’는 화자가 말한 것에 대한 행위에 더 관심을 가질 때 쓰는 단어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드린다면 오늘 본문이 좋은 예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본문 구절에 연이어 등장하는 ‘말씀하신 대로’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둘 다 ‘아마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저는 오히려 두 번째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르’보다는 ‘다바르’에 더 가깝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설교자의 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1절을 재해석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르) 그리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사라에게 행하셨습니다. (다바르)” 제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말씀하신 내용을 반드시 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바르’는 말씀하신 내용을 갖고 반드시 성취하고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바르’의 신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 모름지기 성도라면 말씀하신 것을 실천하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고린도후서를 강해할 때 나누었던 2:17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하십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린도후서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공격하는 고린도 교회 안에 침투한 자들에 대한 방어와 변호의 메시지라고 강해 때 말씀을 드렸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침투한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만 호도하고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치명적인 범죄는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죄악도 자행했습니다. ‘혼잡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카펠류오’의 원뜻은 ‘포도주 원액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을 공격하던 자들의 행태는 율법을 말하지만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사는 자들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언제나 신앙의 위기는 말씀을 변질시킬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의미가 전혀 아닌 불순물을 타서 그 말씀을 희석시키는 행위가 바로 타락한 종교의 본질이자, 그런 류의 신자들이 자행하는 공통분모입니다. 바울을 공격하던 자들이 이런 불순한 동기를 갖고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무엇이라고 방어하며 곧 공격합니까? 고린도후서 2:17절 후반절은 보고합니다.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내가 전하는 것은 나에게 면전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순전함을 갖고 받은 말씀이라고 직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다바르’를 지키며, 그 ‘다바르’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정신을 갖고 살았을까요?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 해석을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다시 바울이 고백한 한 구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그 유명한 로마서 10:17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이 여기에서 고백했던 단어 중에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구절입니다. 헬라어 원문 그대로 읽겠습니다. “rJhvmato" Cristou'“ (레마토스 크리스토스)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바울은 ‘레마토스’라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레마’라는 단어의 의미는 재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여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가 요한복음 1:1절에 기록된 ‘로고스’(lovgo")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라는 단어 세 가지가 모두 다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씀 자체를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히브리어 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가장 가까운 단어가 ‘아마르’일 것입니다. 하지만 ‘레마’는 전혀 다른 의미의 단어입니다. ‘레마’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로고스’가 내게 적용되어 그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독려하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레마’는 히브리어 단어로 표현하자면 ‘아마르’가 아니라 ‘다바르’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지난 8월 13일 ‘물이 여기에 있다’ 교재로 묵상한 저의 묵상 내용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날 읽었던 묵상 일과는 사무엘상 6:1-16절이었습니다. 내용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로 인해 블레셋 지역에 재앙이 임하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경험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런 재앙을 내린다는 것을 알고 법궤를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보내는 스토리가 담겨 있는 구절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진영에서 가장 가까운 블레셋 경계 지역으로 법궤를 가져온 블레셋인들이 이제 그 지긋지긋하고 두려운 대상이었던 법궤를 새 수레에 옮겨놓고 그 수레를 이스라엘 벧세메스로 끌고 가도록 택한 도구는 젖 뗀 어린 암소 두 마리였습니다. 결국 이 어린 암소들은 벧세메스까지 법궤를 옮기는 데 성공합니다. 사무엘상 기자는 이 젖을 갓 뗀 어린 암소들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갈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무엘상 6:12절입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더불어 이 어린 암소들은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다 법궤 귀환을 기뻐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번제물로 드려지며 생을 마감합니다. 너무 잘 알고 있는 이 요절을 읽고 묵상한 뒤에 그날 이렇게 묵상집에 적었습니다. 제목: 나는 소보다 뭐가 잘났지? 말씀 묵상 내용을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소띠라서 그런가,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울컥한다. 도대체 소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갓 태어난 어린 암소들을 어미 소에게서 강제로 떼어 놓는 폭력을 가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무런 죄가 없는 어린 암소들을 번제로 잡아 바친단 말인가! 이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하고 핏대를 세우던 어린 시절의 어리숙함이 내게 있었다. 하지만 신앙의 연륜과 신학적 지평이 조금은 깊어지면서 이 구절은 내게 절절한 감동을 선사하는 구절로 탈바꿈되었다. 이 땅에 태어난 수많은 동물 중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실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가 싶다. 벧세메스로 법궤를 옮기는 도구가 되고 이후에 자신의 몸이 번제로 드려진 암소들을 보면서 극단적인 경우에 도대체 나는 주군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복기하고 머리를 숙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벧세메스로 가면서 울었지만 법궤가 흔들리지 않게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곧바로 목적지까지 간 어린 암소들을 보면서 근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의 자화상과 군상들이 떠올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흔들릴 수 있는 법궤를 본인들의 인기와 표플리즘적인 여론몰이라는 광기에 사로잡혀 어깨에 메지 않고 수레를 담아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벧에돔의 집까지 이동시켰던 아효와 웃사들이 오늘날 지천에 깔려 있는데 벧세메스로 법궤를 끌고 갈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나는 소보다 뭐가 잘 났지? 유구무언이다.” 사무엘상 6:12절은 문자 그대로 살피면 로고스이며 아마르입니다. 하지만 로고스였던 6:12절이 읽는 순간, 그날 저는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묵상한 6:12절의 내용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렇게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 순간 사무엘상 6:12절은 나에게 다바르이자 레마였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마르로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에게 다바르로 그 약속을 실천하시며 행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들이 명절이라고 제천에 내려와 2박 3일을 머물다가 갔습니다. 아들이 내려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제게 아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제천이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뭔가 특성화 된 일을 교회가 만들어야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천 세인교회는 물론, 제천에 있는 지방 교회는 앞으로 더 살아남기 힘들어져요. 세인교회가 빚 갚는데 올인하지 말고 과감하게 투자해서 경쟁력을 갖추는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남기 힘들어요.” 젊디 젊은 목회자인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의 말이 어찌 보면 이론적으로 정확한 지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제가 갖고 있는 생각 중에 좁혀 질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젊고 패기만만한 아들이 목회를 한다면 아마도 그렇게 목회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제 목회의 한계를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제가 목회를 하면서 마침표를 찍고 그 다음 목사에게 넘겨주어야 한 사명은 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뿐만이 아니라, 아들은 지금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제 사역의 임기 동안 맡겨준 양들이 나무늘보 같이 느려 터져도 로고스를 레마로, 아마르를 다바르로 적용시키는 사역자로 끝까지 서야 한다는 미션임을 압니다. 그것이 제 대(代)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다음 대에서 그것이 밑바탕이 되게 하는 사역이 제 미션이자 몫인 것을 알기에 제일 먼저 담임목사부터 다바르와 레마에 목을 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교회 지체 여러분!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 교회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같은 교회도 있어야 합니다. 로고스를 레마로, 아마르를 다바르로 변혁시켜 부도옹의 저력으로 교회의 밑거름을 주는 교회도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이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이 부러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교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세인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