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편견은 정말로 위험합니다.2024-03-08 17:21
작성자 Level 10

2022년 9월 7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일흔 네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20:1-18

제목편견은 정말로 위험합니다.

 

편견이라는 단어를 풀면 이렇습니다.

치우칠 偏 볼 입니다.

한자 풀이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 본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본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니까 성경적인 치우침을 하나 실례로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사울과 다윗의 치열한 긴장감을 만납니다.

그리고 항상 결론은 다윗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왜 성경은 사울과의 투쟁에 있었던 다윗의 여정에서 항상 다윗의 승리로 결론을 맺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만한 자였고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라는 도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울은 죄 없는 다윗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제거해야 할 일 순위 대상으로 생각하여 갖은 편법과 권력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반면 다윗은 자신의 정적이자 자신의 암적 요소와 같은 사울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믿었기에 그 로드십을 인정하고 그를 죽이지 않은 성자 같은 인물이라고 배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기록들은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구약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언약이 그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후대에 알리기 위한 역사가들의 집요한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세뇌되어 있는 우리들은 다윗의 인간적인 죗성을 드러내면 다윗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죄인임을 알 수 있는데도 다윗은 왠지 모르게 내가 편이 되어주어야 할 인물이고사울은 적대시해야 하는 인물로 각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를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를 알려주는 창세기의 보고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장막을 옮겨 네게브 땅 근처인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 땅에 정착을 했다고 1절이 보고합니다.

왜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그랄 지역으로 장막을 이동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본문에 나오지 않아 그 이유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데스와 이라는 지역 정보를 통해 나름 추측은 가능합니다.

네게브는 가나안 남쪽 지역에 펼쳐져 있는 광야 지역을 뜻한다가데스는 시내 반도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오아시스이며 브엘세바에서 약 75k 떨어져 있는 곳에 있었다. ‘은 나일 델타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가데스와 술 사이에는 짐승을 먹일 만한 목초 지역이 있었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365.)

결국 이런 추측이 가능해 집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브라함은 마므레 수풀 지역의 기근이나 아니면 목축들이 먹을 목초들이 고갈을 경험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입니다.

문제는 아브라함이 이동한 이 지역이 철저하게 이방의 땅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이 땅의 맹주는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 통치하던 그랄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는 블레셋의 고유 영토였습니다.

그러니 정서상 아브라함이라는 이스라엘의 혼이 담겨 있는 자가 살기에는 낯선 곳이었으며 이방의 땅임에 틀림없습니다.

지역 경계가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아브라함 시대였기에 아브라함이 이곳으로 장막을 옮긴 것은 추측했듯이 가축들로 인함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옮기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아브라함의 큰 고민거리는 아내 문제였습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이 구절을 보면 창세기 12장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벧엘에 거주할 때 기근이 임해 이집트로 피신했던 그 일이 기억납니다.

바로에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일그로 인해 바로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갔지만하나님의 개입으로 다시 돌아온 일이 기억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기와 장소만 다를 뿐 그때와 동일한 시나리오를 아브라함이 벌인 셈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아내로 삼기 위해 데려갔는데 역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3-7절까지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사라를 데려간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셔서 사라에게 손대지 말라 경고하셨고그녀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일을 겪은 아비멜렉은 꿈에서 깬 날아침 일찍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의 경박스러운 일에 대해 따지고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이 일을 행한 아비멜렉은 동시에 아주 의미 있는 제안을 아브라함에게 합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6절은 해석하기가 참 어려운 본문인데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설교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니기에 이렇게 요약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는 그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었던 아브라함에게 그랄에서 살 수 있는 혜택을 준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은 천개를 사라에게 주면서 사라가 당했던 수치가 해결되었다는 징표로 삼은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본문 이해입니다.

지금부터는 오늘 설교의 레바로 가기 위한 중요한 구절들을 나누겠습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주지했듯이 사라를 취하기 위해 데려갔던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현몽하셔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이 만에 하나사라의 몸에 손을 대면 너를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경악하며 하나님께 아비멜렉이 반응한 내용입니다.

나는 사라에게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내가 그녀를 데리고 온 것은 그녀는 남편이 없고 오라버니와 함께 있다는 것을 믿고 데려온 것입니다.

이렇게 항변한 아비멜렉이 중요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이 구절이 주는 충격이 있습니다.

그랄에 의인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불가하다는 반응은 흡사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보 하던 기도와 같다는 점입니다.

또 하나본문에서 의미 있게 다가오는 메시지는 9-11절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이 구절을 접할 때 임하는 참담함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의 분노는 너무나 당연한 분노입니다.

반면 이 분노에 대해 반응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참담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11절은 경악할 만한 폭력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세상이 이런 망발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교만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랄 땅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없다는 단호함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일까요?

또 하나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그 이유가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를 죽일까봐 그랬다는 논리가 얼마나 가당치 않는 논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4절에서 밝힌 의로운 백성을 멸하시렵니까?’ 에 등장하는 의롭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짜디크의 번역입니다.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서 밝힌 것 중에서 하나님이 구약성경 전제의 맥에서 강조하신 당신의 속성이 아모스 5:24절에 기록된 속성 두 가지임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모스 5:24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여기에 기록된 정의가 히브리어 쩨다카이고 공의가 미슈파트입니다.

특히 정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아주 중요한 본질입니다.

정의를 의미하는 단어 쩨다카와 오늘 본문 4절에서 언급된 의로운’ 이라고 번역된 짜티크는 어원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랄이라는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백성들이 살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없다고 단정하고 자기의 거짓을 정당화시키는 만행을 행한 것입니다.

또 하나오늘 본문의 내증만 놓고 보더라도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편견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며하나님의 마음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신 발언 속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라를 데리고 온 너의 마음이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았다는 하나님의 동의입니다.

내가 너에게 현몽하여 경고하는 것은 네가 나쁜 일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의 죄를 근원적으로 막아주기 위함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아비멜렉의 선함을 인정한 셈입니다.

한동구 교수는 이런 아비멜렉의 상태에 대해 하나님이 인정하신 이 구절을 이렇게 의미 있게 주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그의 구원의 영역 속에 포함시키시고자신의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신 것이다.” (한동구, “창세기의 신앙과 신학”, 프리칭 아카데미, 341.)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모아야 하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레마입니다.

 

※ 성도의 편견은 위험함을 넘어 해롭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와서 전도를 하는 장면이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목할 구절이 요한복음 1:45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선지자 즉 메시아임을 전하며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합니다.

이 때 반응했던 나다나엘의 반응이 그 유명한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나다나엘의 시큰둥한 반응은 그가 갖고 있었던 나사렛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나사렛은 시골 중에 시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은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버려진 땅으로 매도되었던 갈릴리 중심에 있었던 땅이었기에 불온한 땅으로 간주되었고경멸과 조롱의 땅이었기에 나다나엘이 말한 것은 그만한 시대상을 염두 해 둔 발언이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을 중심으로 성장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셨고구원자이셨습니다.

대체적으로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입니다.

적절한 실례를 들어본다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고려의 역사가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승승장구하던 정치가였기에 당연히 고려 역사 중에 고려의 선한 일들을 중심으로 삼국의 역사를 집필했습니다.

이긴 자의 승자독식구조에 따른 역사 기록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김부식의 기록은 패자 쪽에서 볼 때 왜곡되어 있는 내용들이 상당수 담겨 있습니다.

반면 일연이라는 승려가 쓴 삼국유사는 갑의 기록이 아니라 을의 기록입니다.

역시 사정이 이러다보니 기득권이 아닌 비 기득권 중심의 역사 기록을 드러냅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기록을 내세웁니다.

어느 역사가 정답인가?

그것은 독자들의 선택의 몫일 것입니다.

다만 배우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이 주는 영적인 교훈은 아브라함이 틀릴 수 있고아비멜렉이 맞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신앙이 없는 자로 매도시키는 것이 한국교회의 아픔이자 편협함입니다.

언제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까 무엇을 해도 나쁘게 평가하면 안 된다는 세뇌는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평점 0점입니다.

반면 아비멜렉의 사상은 100점입니다.

편견은 성도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아킬레스건입니다.

지난 휴가 기간에 여수를 다녀왔습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중에 음식이 맛있다는 지방이 어디입니까?

전라도입니다.

반면 맛없는 음식 그러면 떠오르는 대명사는 경상도 음식입니다.

적어도 제가 젊었을 때는 이 공식이 그런 대로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불성설입니다.

여수의 한 음식점에 가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가 전라도 맞나!

맛이 너무 형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풍기에 가면 찾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감회가 있습니다.

여기가 경상도 맞나!입니다.

너무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편견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성도가 신앙의 편견을 갖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23:23절에서 주님은 불화살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의 기저에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중요시여기며 그것을 드리는 자가 유대 율법에 충실한 자라는 인식이 이미 도식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율법에서 중요하게 선포하고 있는 정의긍휼믿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인들의 부를 축적하는 데에 있어서 전자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후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형식화된 종교인들의 무감각과 편견에 대하여 주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성도라면 정말로 버려야 하는 나쁜 종교적 행위를 오늘 지적합니다.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이미 들었던 풍월로 판단하는 일체의 행위를 멈추십시오.

반대로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으로 균형을 잡으십시오.

앞에서 소개한 한동구 박사의 주해로 설교를 갈무리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민족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경외감)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나이방인의 하나님 경외는 오히려 아브라함을 능가하고 있다이방인은 하나님은 경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다이방인들도 하나님과 법에 대한 존중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창세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의 태도를 비난한다그는 이방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그는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과 편견으로 이방인을 대했다이와는 반대로 이방인의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바르게 전하며 그랄 백성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한동구위의 책, 343)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