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9:30-38
제목: 죄는 커집니다.
지난 주간, 대구 샘터 교회를 시무하는 정용섭 목사의 글인 ‘목사 구원’이라는 대단히 도전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정 목사는 수년 전,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설교 비평서인 여러 책들을 출간하여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경종을 울리며 목회자로 그 이름을 알렸습니다.
‘목사 구원’이라는 책이 2년 전에 출간되었기에 저는 조금은 늦깎이로 지각 독서를 했습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미리 전제하지만 정 목사는 대단히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조직신학자이기에 기존 복음적인 교단에서 주장하는 가장 보편적인 교리의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목사가 던진 화두에 대해 상당수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아멘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의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서기관들은 죄를 가치론적으로 대했다면 예수는 죄를 존재론적으로 대했다.”(정용섭, “목사 구원”, 새물결플러스, 91)
저는 정 목사가 개진한 이 문장을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정직하게 토로하자면 나 또한 목회의 연륜이 쌓여져 가면서 죄를 가치론적으로 대하려고 했던 적이 적지 않았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후의 후속 기록입니다.
부끄럽게 구원을 받은 롯과 그의 두 딸들은 소알에서 거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롯과 그의 두 딸들은 소알에 거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익명으로 기록된 산으로 다시 도피처를 삼아 피신했다고 30절은 증언합니다.
오택현 교수가 이들이 소알에 머무르지 않고 산으로 도피한 상태에 대해 이렇게 주석했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처음에 롯은 천사의 간곡한 명령을 거부하고 소알에 머무르려 했다. 그런데 설마 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실현되자 다시 두려워 두 딸과 함께 산에 올라가 굴에 거주하게 된다. 롯은 처음에는 천사의 명령을 거부했고, 다음에는 소알이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또 믿지 못하고 산으로 도망한다. 믿음이 없이 갈팡질팡하는 나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신앙 상태로 보았을 때 다른 범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택현, “연세신학 100주년 기념 주석-창세기”, 163.)
오 교수는 롯이 결코 의인이지 않았고 부끄럽게 구원받았던 자였기에 그에게 나타난 치명적인 죗성을 여지없이 고발한 셈입니다.
믿음이라고는 1도 없었던 롯이었기에 그가 또 다른 죄에 노출될 가능성에 대해 그 여지를 남겨놓은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롯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죄의 확산성은 그의 두 딸들에게서 절정에 이르게 됨을 본문이 고발합니다.
31-35절의 정황입니다.
큰딸이 동생에게 소돔이 멸망하였고, 아버지는 늙었고 이로 인해 우리들이 후손을 이을 방법은 윤리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가능성이 없으니 비윤리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하자고 모의합니다.
모의의 내용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인 뒤에 그에게로 들어가 동침하여 후사를 잇자는 천하가 공로할 일이었습니다.
두 딸들의 모의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두 딸들은 임신하여 아들들을 낳게 되었다고 본문 36-38절은 진술합니다.
“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
계획 성공입니다.
두 딸들의 모략은 성공해서 모압을 낳았고, 벤암미를 낳았습니다.
이 행위에 대한 오택현 교수의 해석을 다시 한 번 교우들에게 그대로 알려드립니다.
“그들이 종족 보전을 위해 취했던 방법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손을 퍼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딸들의 방법은 인간적으로도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늙고 자신들의 배필이 될 사람이 이 땅에 없다는 것이 그들이 아버지와 동침한 이유였는데 인간적으로는 위기에서 벗어난 아버지 롯이 죽은 어머니 대신 새로운 아내를 맞아들이는 방법이 더 타당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도덕적으로 방법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 딸들은 새로 시집을 가더라도 롯의 후손을 낳을 수 없었고 자신들의 어머니가 소금기둥이 되어 죽지 않았을 경우라도 아버지를 통해 자식을 낳으려 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딸의 행위는 종족 보존을 위한 필사의 노력이라기보다는 자기주장에 가득 찬 인간의 편의적인 범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위의 책, 167.)
지금 제가 오택현 교수의 주석을 교우들과 함께 공유하는 이유는 이렇게 롯과 그의 두 딸들이 행한 행위는 분명히 죄를 가치론적으로 판단하였기에 이를 수 있는 결론임을 솔직히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 차원에서 특히 기독교적인 교리의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죄를 해석하다보면 죄에 대한 접근과 해석이 가치론적인 차원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예수께서는 죄를 존재론적으로 다루셨다는 데에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숙제가 있습니다.
죄를 존재론적으로 다룬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과도 연관되어 있는 신학적 해석이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내용도 정용섭 목사의 글로 대체하겠습니다.
“죄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용섭, 위의 책, 91.)
주님이 이것을 아셨듯이, 바울도 철저하게 이렇게 죄를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로마서 3:10절입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바울은 선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죄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인간적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죄는 더욱 커지는 양상을 보이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야고보기자가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야고보서 1:15절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무엘하 11:4-5절을 소개합니다.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 익숙히 알고 있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범죄를 고발한 구절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아름다워 보였던 여인이었기에 그를 취하고 싶어 부하를 시켜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왔고, 그녀가 생리 중이라는 사실을 안 뒤에 안심하고 그녀를 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의 소위를 악하게 보시고 인간의 생리학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밧세바의 임신으로 그의 징계를 시작하셨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밧세바의 임신이 다윗에게 충격이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윗의 한 번의 범죄는 연이어 이어집니다.
그녀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불러 특별휴가를 주어 밧세바에게 들어가 동침하도록 계략을 짰습니다.
자신의 죄가 묻혀지게 하는 비열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충직한 군인이었던 우리아는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그녀와 동침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죄 무마하기 프로젝트에 실패한 다윗이 범한 두 번째 프로젝트는 우리아 죽이기였습니다.
사무엘하 11:14-15절이 고발합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이재철 목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운 확산성이다. 다윗의 간음 행각은 거짓 알리바이 입증 시도를 거쳐 마침내 살인으로까지 확산되었다.”(이재철, “인간의 일생”, 홍성사, 257)
이것이 어찌 다윗만의 문제입니까?
만에 하나, 우리도 이렇게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되는 위기에 몰릴 때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또 다른 죄로 막아보려는 악순환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커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 공식에 예외가 되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롯은 죄의 자리를 제공한 자였습니다.
한 구절이 이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본문 33, 35절을 연이어 읽겠습니다.
먼저 33절입니다.
“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첫째 딸의 범죄 현장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입니다.
백 번, 천 번을 양보하여 이 실수를 술 때문이라고 치부합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치부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게 합니다.
35절입니다.
“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연이은 실수, 가당치 않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롯도 딸들의 모략을 은연중에 수용하였거나. 아니면 방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의적인 수용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해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설교자인 저는 이런 해석에 무게감을 둡니다.
왜?
롯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낳을 가능성 100%라는 죄의 현실론과 인식론에 대해 뭔가 성도로서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 죄를 가치론으로 대하지 말고 존재론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신앙의 여건으로 대입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힘으로 죄와 맞서 싸우려고 하지 말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대안을 붙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개역개정판 번역입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더 의미 있게 번역했습니다.
중요한 NIV 버전입니다.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였느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으로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의 힘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힘에 의해 진압된다고 믿는 믿음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치론이 아닌 존재론으로 인식하는 백성은 하나님의 힘, 능력을 의지합니다.
내 힘으로 결코 죄와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하나님의 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알고 있는 사탄의 일체의 무리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통제 안으로 이동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방해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내 힘으로 죄를 맞서려는 무모한 시도가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죄의 자리를 떠나려는 시도이기에 이런 자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사탄도 알기에 이런 시도를 무력화시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가 암송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15:5-7절은 이런 점에서 너무 중요한 성도가 명심해야 할 실천사항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죄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갈 때 일어납니다.
주님 안에 거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죄를 가치론적으로 접근하면 나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존재론적으로 접근하면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고 나는 주님 안에 거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능력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죄와 맞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죄를 이기게 해 주십시다.
지난 주일예배 시간에 우리는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이렇게 고백한 찬양의 후렴부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출애굽기 14:14절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죄는 커집니다.
확산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 가운데 머물면 죄와 어둠이 결코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