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2024-03-07 17:26
작성자 Level 10

2023년 12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대림절 세 번째 주일느헤미야 40번째 강해)

 

본문느헤미야 12:44-47

제목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서론)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예배에 나온 교우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강추위가 몰려왔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이자 본분임을 인정하고 예배에 나온 교우들을 주께서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교훈 주실 것을 믿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신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이기도 했던 쟈크 엘륄은 하나님의 정치학과 인간의 정치학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치 않으시는 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얻은 자유입니다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도전하십니다.” (챨스 링마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쟈크 엘륄 묵상집죠이선교회, 41-42)

글을 읽다가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쉬운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가장 어려운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신앙인의 숙명적인 삶이라는 소회였습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이들이 해병대의 자존심으로 외치는 슬로건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었다면 나는 해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단한 자존심입니다.

상상의 나래를 여기까지 펴다보니 문득 이런 오기가 생깁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결코 막 살면 안 되지!

만에 하나그리스도인으로 세간이 인정하는데 전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그건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성도의 미션입니다.

느헤미야 40번째 강해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은 에스라 8:15절에 대한 해석에 접근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하고도 설득력이 있는 답을 제시해야 본문 강해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지했다시피 에스라는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며 70년간 시달려야 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백성들을 두 번째 이끌고 주전 457년 그러니까 아닥사스다 왕 재위 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이때 에스라를 따라 귀환한 사람들의 면면을 에스라서 2장과 8장이 보고합니다.

2장과 8장을 토대로 학자들은 이 때 에스라를 따라 귀환한 자들의 수를 약 5,000명으로 추산하는데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에스라와 함께 주전 458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의 수는 성인 남자가 1,513명에 달했으니 여자들과 아이들을 더하면 5,000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세스바살이 인도해온 1차 포로 귀환자수인 42,360명에 비하며 초라하지만유다와 예루살렘에 처한 형편을 감안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감수하는 용기를 내어 조상의 나라로 돌아온 것이다.“ (송병현엑스포지멘터리 주석-에스라,느헤미야, 179)

이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한 가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읽은 8:15절에 대한 갸우뚱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대한 2차 포로귀환의 행렬에 레위 자손은 한 사람도 없지?

이 질문에 대답해야 오늘 본문 해석에 진도가 나갈 수 있습니다.

2차 포로귀환 시기에 레위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을까요?

미국 루터교 신학교의 야곱 마이어스 교수는 단 한 문장으로 그 답을 일갈합니다.

포로기 시기에 레위 지파는 등한시되는 집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마이어스국제성서주석-에스라”, 103)

마이어스의 이 일갈은 대단히 유감스럽고 서글픈 토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격려받지 못하는 그룹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는 이 말이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합니다.

레위지파는 여호수아 시대에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레위 지파의 기업은 토지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3:33절입니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주군으로 섬기는 여타 11지파가 레위 지파의 삶을 책임지도록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의 여타 지파들이 레위 지파를 책임지기 위해서 정직한 첫열매와 십일조를 하나님의 성소에 드려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에스라 개혁과 느헤미야 개혁의 모토는 이렇게 불성실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에스라가 약 5,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기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전 457(혹은 458)년으로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그림이 그려집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살핀 것처럼 그 성전을 보호하는 성벽은 주전 44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격동의 13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루살렘 성읍은 무정부적인 혼돈의 시기였고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결정적인 리더십으로 위기들을 영적인 위기들을 극복했지만그렇다고해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다윗 공동체처럼 견고한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예루살렘 성읍은 사람들이 살기를 기피하던 황폐한 땅의 대명사였고아브라함모세 시대로 전수되어온 하나님 신앙과는 대단히 요원했던 장소였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고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온전하고 정직하게 드리는 십일조와 첫 열매가 전무한 상태에서 레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활을 할 수 없는 사지로 내몰리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무모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전제합시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고 일행들과 출발하여 바벨론의 유프라테스 강 지류인 아하와 강에 이르러서 일행들을 살펴보니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음을 포로귀환행렬에서 발견합니다.

레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소위 말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을 자각한 에스라는 12지파의 두령들을 가시뱌에 살고 있는 잇도에게 파송합니다.

그리고 협조를 요청합니다.

예루살렘 귀환대에 레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잇도에게 요청합니다.

가시뱌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특별히 이곳에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파가 레위 지파였기에 에스라는 잇도에게 지도자들을 보내 예루살렘 귀환에 레위 형제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는 응원을 요구한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간청한 끝에 잇도의 지지를 받은 38명의 레위 지파 형제들이 2차 포로귀환대에 동참합니다.

이 38명은 대단히 큰 신앙적 결단을 한 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사지로 들어가기를 결단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레위 지파 사람들은 그렇게 귀환한 예루살렘에서 무려 13년을 버텼습니다.

그들에게는 땅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지난한 시간을 보낸 뒤, 13년 만에 성벽이 완공되었고지난 주에 살폈던 것처럼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도 마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성벽 봉헌식이 진행되는 어간벌어진 엄청난 감동의 내용을 맛보게 해줍니다.

성벽을 봉헌하는 날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벽 봉헌에 참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동안 정직하지 않았고인색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기에 자기들의 물질을 쌓아두기만 했지하나님께 봉헌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고 거제물의 처음 익은 첫 것들(첫 열매)과 십일조를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본문 44절은 감동의 보고입니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성벽 봉헌식이 진행되던 날그 동안 꼭꼭 숨겨 놓았던 물질들을 하나님의 곳간으로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왜 갖고 나왔습니까?

왜 강퍅하기 짝이 없는 저들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까?

44절에 보고된 한 구절은 눈을 의심하게 하는 전율케 하는 감동을 줍니다.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

놀라운 변화입니다.

제사장 그룹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유다 백성들이 너무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보고입니다.

이 구절 전체를 표준 새 번역 성경 버전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 날사람들은 헌납물과 처음 거둔 소산과 십일조 등을 보관하는 창고를 맡을 관리인을 세웠다유다 사람들은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고마워서관리인들을 세우고율법에 정한 대로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돌아갈 몫을 성읍에 딸린 밭에서 거두어들여서각 창고에 보관하는 일을 맡겼다.”

오늘의 언어로 대치하자면 이스라엘 포로 귀환 공동체가 드디어 회심한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놓는 것을 남의 집 이야기로 치부하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애써 외면했던 자들이 드디어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똑바로 서겠다고 결심한 분깃점을 본문이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열매와 십일조의 온전한 드림이 이루어졌음을 보고합니다.

이렇게 성전의 곳간이 채워지자 어떤 현상이 벌어졌습니까?

이어지는 45-47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으니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지도자가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되 그들이 성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그 동안 중단되었던 노래하는 자들(아삽의 때로부터 성전 예배를 도왔던 성가대원)들에게 삯을 주며 대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레위 사람들과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후손들과 성전 문지기 역할을 감당했던 레위 지파로 여겼던 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생활비가 지급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 및 관리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섰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전체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요약해도 될 것 같습니다.

 

※ 포로 귀환 공동체의 비정상적인 신앙의 행태가 정상적인 신앙의 삶으로 회복되었다.

 

이 레마가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세인 공동체 지체들에게도 요구하시는 미션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부터 불편한 메시지가 교우들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말라기 3:7-10절을 읽어드립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저는 이 구절을 외웁니다.

고향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담임목사님께서 십일조 헌물에 대해 기도하실 때 이 구절을 암송하시면서 축복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외우고 싶어서 외운 것이 아니라그냥 자연적으로 외워졌습니다..

그만큼 목회자들이 십일조에 대한 해석을 할 때 반드시 인용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바로 말라기 3:7-10절입니다.

미리 전제한다면 말라기 3:10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으로 교우들에게 선포하면 목사는 십일조 생활을 독려하라는 메시지로 선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라기 3:10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10절을 선포했던 말라기 예언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대상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마땅히 십일조에 대한 율례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고 실천해야 하는 모범적인 그룹은 제사장 그룹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말라기 시대 즉 주전 400년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학개 예언자가 약속했던 축복도 이루어지지 않자 제사장 그룹과 포로 귀환공동체의 2세대들이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놀라은 것은 이 반항에 대한 선두에 제사장들이 섰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벽 봉헌식 때 이루었던 그 감동들이 채 식기도 전이었던 성벽 봉헌 후 약 50년 뒤에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 신앙을 배격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율례에 도전하는 더 나빠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기막히고 참담한 현실이 바로 말라기 예언의 시대의 영적 기상도였습니다.

제사장 본인들이 먼저 십일조 신앙을 저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공동체의 백성들도 그들을 따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참담한 상태를 바라보던 예언자적인 정신이 투철한 말라기는 제사장 그룹에게 직격탄을 날립니다.

⓵ 나의 규례를 떠났다.

⓶ 나에게 돌아오라는 명령을 능멸했다.

⓷ 십일조와 봉헌물들을 도적질했다.

⓸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을 것이다.

⓹ 돌이켜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면 내가 복을 부어줄 것이다.

문제는 5번 항목입니다.

학자들은 이 5번 항목의 전제적 설명을 이렇게 해석하고 동의하는데 큰 이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제사장 그룹을 향하여 저들의 태만함에 경종을 주는 하나님의 죽비가 5번 항목이라는 해석입니다.

십일조 정신과 실천을 방기하고 무시한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가 3:10절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실천이 주는 복을 제사장 그룹에게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현실적으로 말라기 3:10절을 다루어보기로 합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 여러분의 경제적 상태가 좋아집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만큼 더 움츠리게 됩니다.

그만큼 내 삶을 절제해야 하고 절약해야 합니다.

불편한 삶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삶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겠다는 각오와 실천이 십일조 신앙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저와 함께 바른교회 아카데미 사역을 같이 했던 높은 뜻 덕소 교회를 시무하는 오대식 목사가 출간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의 바른 가르침은 십일조를 내면 손해본다는 것입니다열의 하나를 떼는데 어떻게 열보다 더 많을 수가 있습니까십일조를 떼면 그만큼 남는 부분이 줄어드는 것입니다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중요합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너희가 금전적으로 손해를 봐도 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겠느냐세상의 가치관인 돈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가치관즉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겠느냐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손해도 볼 수 있는데 너희는 나를 위해 그 수고와 어려움을 감수하겠느냐의 응답이 십일조 정신입니다.” (오대식골리앗 세상에서 다윗으로 살기, 68)

저 역시 오 목사의 갈파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레마는 불편한 것 같지만기실 하나님께서 2023년을 사는 우리 세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요구라는 사실임을 알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비정상적인 신앙의 행태를 정상적인 신앙의 삶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올바른 신앙의 정신입니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제공하는 영상을 짤로 보게 되었습니다.

베이직 교회를 담임하는 조정민 목사의 누군가와 대담하는 중에 던진 메시지입니다.

적지 않은 사업을 경영하는 장로님 소유의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너무 놀란 나머지 장로님은 공장으로 뛰어 갔는데 이미 불로 인해 공장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막대한 타격을 받았습니다그날이 마침 주일이었는데그날 주일에 교회에서 장로님이 특송하며 부른 찬양이 이것이었습니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게 말이 됩니까그냥 말장난입니까놀라운 것은 이 찬양을 부르고 이 신앙의 정신으로 살아낸 장로님은 몇 년 뒤에 불타 소실된 공장보다 두 배는 더 큰 사업장을 만들고 재기했습니다내가 이 보고를 드리는 것은 그 장로님이 두 배로 성공했다는 것을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내야 하는 정신이 바로 이런 정신이어야 함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데스페라도라는 스페인어가 있습니다.

직역하면 무법자’, ‘방랑자’ 혹은 죄를 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록 밴드인 이글스가 이 제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데스페라도/정신 차리는 게 어때?/울타리를 따라 달린지/너무 오래됐어/넌 참 완강하지/너만의 사정이 있는 건 알아/널 즐겁게 하는 이것들은/어떻게든 널 다치게 할 수 있어/다이아 퀸은 고르지 않는 게 좋을걸/할 수 있다면 널 박살 낼 테니/하트 퀸이 언제든/제일 좋은 패라는 걸 알잖아/지금 보아하니/이것저것 좋은 것들이/네 판 위에 깔리고 있는데/넌 가질 수 없는 것들만/원하고 있구나/데스페라도/사람은 젊어지지 않아/네 고통과 배고픔/그게 널 집으로 가게 하고 있지/그리고 자유오 자유는/글쎄그건 그냥 어떤 놈들이 하는 말이지/이 세상을 홀로 헤쳐가는 게/너에겐 감옥이야/겨울이라 발이 얼어가고 있지 않니?/눈도 내리지 않고해도 빛나지 않지/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하기가 어려워/넌 모든 걸 잃고 있어/감정이 사라지는 게 우습지 않니?/데스페라도/정신 차리는 게 어때?/네 울타리에서 내려와문을 열어/비가 올 수 있지만/네 위엔 무지개가 뜰 거야/누군가 널 사랑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누군가가 널 사랑하게 해/누군가 널 사랑하게 하는 게 더 나을 거야/너무 늦기 전에

저의 학창시절 록 밴드 이글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도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이 가사를 많이 음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목사가 되고서야 이 노래가사 안에 복음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교 서두에 소개했던 쟈크 엘륄의 권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치 않으시는 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허락하셨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얻은 자유입니다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도전하십니다.” (챨스 링마행동하는 신앙인을 위한 쟈크 엘륄 묵상집죠이선교회, 41-42)

 

그리스도인이라면 데스페라도의 인생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막 살고 있는 내 삶의 울타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비정상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리로 들어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안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 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 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아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