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33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0:28-39 제목: 약속합니다.(1) 서론) 진보주의적인 성향의 역사관을 갖고 있는 목회자, 신학자들은 에스라-느헤미야 읽기를 대단히 불편해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배타성 때문입니다. 금년 초에 김기석 목사와 사석에서 만났습니다. 대화중에 김 목사께서 에스라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목사님, 나는 에스라 읽기가 대단히 불편합니다. 특히 에스라 9장 같은 본문은 정말로 아찔합니다.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김 목사께서 일견 지적한 에스라 9:1-3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9:1-3) 김 목사께서 제게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에스라서에 있는 이 대목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름하는 대표적인 구절인데, 이럴 경우에 대단히 위험한 이분법적인 가름의 정치가 생기고, 타자를 매도하는 아주 나쁜 행태들이 자행될 수 있기에 에스라 본문은 내게 참 힘든 본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목사께서는 목회 현장에서 이런 이분법적인 편 가름을 깨기 위해 평생을 달려왔고, 품음이라는 화두를 목회의 철학으로 여기고 사역한 목회자이니 왜 에스라 9장 텍스트가 불편하지 않았겠습니까? 듣고 있노라니, 선배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작금에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하마스와 이스라엘과의 전쟁도 바로 이런 이분법적인 민족적, 종교적, 정치공학적인 구도로 볼 때 빗금을 치는 것에서부터 야기된 것이기에 김 목사께서 지적하신 내용이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성찰이라고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 동의는 전제가 있는 동의였지, 무조건적인 동의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면은 동의했지만 또 다른 한쪽 면에는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다루어야 하는 느헤미야 10:28절 이하의 텍스트는 여러 차례 밝힌 것처럼 연대기적인 해석해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굳이 연대기적으로 순서를 맞추려면 김 목사께서 언급한 에스라 8-9장의 연속적인 기사로 본문 느헤미야 10장도 읽어야하는 텍스트이기에 역시 해석하기가 꽤나 불편한 텍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부터 나누게 될 본문 이해를 김기석 목사께서 언급한 염려의 차원이 아니라 또 다른 동의하지 않은 부분을 다루면서 설교 사역을 이어갈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본문의 해석함에 있어서 본문의 외연을 확장하면 한편으로 불편하기 그지없지만, 본문 정황을 그 시대에 맞추어 설명하면 나름의 본문 주인공들이 결의한 내용들이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본론) 지금부터 본문 이해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10:1-27절까지 적어도 포로귀환공동체의 지도자들 82명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습니다. 제사장들이었고,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으며,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었음을 나누었습니다. 모두가 포로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였음을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밝혔습니다. 오늘 본문은 열조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열조들의 죄를 답습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서명한 82명과 더불어 그 뜻에 동참한 포로공동체 지체들의 면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8-29절을 소개합니다.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28-29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머지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인과 문지기와 노래하는 사람과 성전 봉사자,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지키려고 외국인과 관계를 끊은 모든 사람과 그 아내와 아들딸들과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된 모든 사람이, 귀족 친척과 더불어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고, 우리 주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결정과 기준을 지키고 이행하기로 굳게 맹세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본문은 하나님의 율례대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을 10종류로 구분하여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⓵ 제사장 ⓶ 레위 사람 ⓷ 성전 문지기 ⓸ 노래하는 사람 ⓹ 성전 막일꾼 ⓺ 율법에 따라 살기위해서 이방인들과 인연을 끊은 자 ⓻ 아내들 ⓼ 아들딸들 ⓽ 알아들을 만한 지식이 있는 자들 ⓾ 귀족 형제들 그렇다면 결국, 여기에 언급된 자들은 포로귀환공동체에 속해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 자기들의 일을 감당하던 유대인 모두를 지칭한 셈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총 6가지 약속을 합니다. 포로귀환공동체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우리는 6가지의 테마를 갖고 몇 주 동안 살피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의 약속 내용을 살피겠습니다. ※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선언입니다. 본문 30절을 봅니다.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첫 번째로 약속한 내용은 대단히 예민한 문제입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김기석 목사가 에스라-느헤미야 역사서를 설교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고 지적한 바로 그 대목일 것입니다. 김 목사의 지론은 이 선언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배타성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는 비판적 성찰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21세기라는 특수한 오늘이라는 시대로 적용해 해석한다면 일견 귀를 기울여야 하는 성찰이라고 생각되는 대목입니다. 다양한 시대, 다양한 인종, 다양한 사상들이 조화롭게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시대가 작금이기에 그렇습니다. 더불어 성경의 여타 다른 글, 특히 율법서에서는 노예, 여인, 이방인들과 함께 상생하라는 메시지가 수없이 권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빗금치고 가름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본문의 이 선언이 21세기에 합당한 메시지라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은 논쟁거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설교의 범위를 제한한다고 이미 설교의 서두에 언급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라와 느헤미야 역사서가 갖고 있는 특수성을 배제하고는 이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제 논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 30절의 정황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로 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삶의 정황은 포로 이후 시기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선민이었던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다윗의 공동체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망함이었고, 거의 70년간을 식민지 백성으로 살며 치욕을 당했습니다. 70년 만에 예루살렘에 극적으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여전히 없습니다. 여전히 식민지 백성입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자들이 본문에 열거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더 없이 소중하고 긴박한 것은 도대체 이스라엘은 누구인가?(Who is Israel?) 라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돌아온 포로공동체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이 이슈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포로 귀환 공동체 지체들은 성전도 건축한 것이고, 성벽도 재건한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 앞에서 이루었던 영적 부흥을 사모하고 지속하기를 원했던 것도 바로도 이것을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이라는 뿌리, 혹은 선민적인 정체성을 찾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결국 이들이 도착한 정점은 유대인으로써 가져야 할 뿌리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만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송병현 교수의 주석을 한 부분 발췌해 소개합니다. “첫 귀향민들이 예루살렘에 발을 들여놓은 후로부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변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방관해 왔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제사장들마저도 이방인 아내를 맞이했다. 이방인과의 결혼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역시 종교적인 것이다. 이방인들의 우상과 경건하지 못한 풍습이 이스라엘을 오염시키고 좀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에스라, 느헤미야”, 345-346쪽)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공동체는 초기에 이방인들과의 결혼, 결합에 대해 그리 엄격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벨론-바사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 문화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살았기에 이방인들에 대한 유입이나 결합에 대해 대단히 자유분방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다윗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이방문화의 유입이나, 이방인들의 섬기던 신들을 허용했던 것이 멸망의 원인이었음을 알게 된 이들은 에스라의 강력한 권면과 교훈을 수용하고 이방인들을 수용한 것에 대한 결별을 선언한 것이고, 다시는 그런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겠다는 실천으로 30절을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 2023년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질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순결한 그리스도인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순결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지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 영적 부흥을 경험한 뒤에 첫 번째로 결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겠다는 것입니다. 절교뿐만이 아니라 딸과 아들을 이방 백성들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결심을 야훼께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교우들에게 전하면서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교우들이 단순히 내 아들과 딸을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의미로 축소시키면 어떻게 할까? 의 염려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결의한 내용은 단지 자녀들을 이방인들과 혼인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본문의 의미를 축소시키면 안 됩니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로공동체가 야훼께 드린 약속은 다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영적인 우상숭배와 영적인 간음을 행하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본질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나라를 빼앗겼습니까? 왜 이스라엘이 솔로몬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까? 왜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바사에 볼모로 남아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까? 그 옛날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이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7-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택한 백성이요, 나는 이스라엘의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라”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사이에서 체결한 언약입니다. 이 언약 체결 이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 체결한 이 언약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이방의 나라를 들어서 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했던 수모와 수치는 전적으로 그들이 언약을 깨뜨린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포로공동체가 다시 선언한 결의가 무엇인지 자명해 집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이 파기된 것에 대한 회개와 더불어 그 언약으로 회복하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순결성을 다시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입니다. 호세아 5:4-7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이 구절은 공동번역 버전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짓들을 하면서 어떻게 저희 하느님께로 돌아오겠느냐? 음탕한 바람이 들어 야훼는 안중에도 없구나. 이스라엘은 거드름을 피우다가 납작해지리라. 에브라임이 제 죄에 걸려 넘어질 때, 유다도 함께 넘어지리라. 양떼 소떼를 몰고 야훼를 찾아 나선다 해도 이미 떠난 그분을 만나지는 못하리라. 야훼를 배신하고 사생아를 낳은 것들, 적군이 쳐들어와, 그 있는 재산과 함께 멸망시키리라.” 공동번역으로 ‘음탕한 바람’이라고 해석된 이 단어를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아주 의미 있게 설명했습니다. “음탕한 바람의 반대로서의 ‘하나님을 앎’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 또는 하나님과의 동정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예언자들”, 115쪽)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주일 설교를 통해 다시 한 번 각인해야 하는 교훈을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는 단순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 자녀들 간의 결혼이나 혼인을 금한다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 알기’에 집중하겠다는 영적 선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탕한 아내, 고멜과 결혼 관계를 유지했던 호세아는 그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랬던 호세아였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신탁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호세아 6: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한 포로공동체의 결단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야훼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알려고 노력하겠다는 선언이기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는 하나님 외의 것들에게 유혹받지 않습니다. 영국은 종교개혁지입니다. 더불어 개신교회 전통으로 접근해 보면 거의 19-20세기를 주름잡던 목회자, 신학자들을 배출한 개신교회의 부흥의 진원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영국의 개신교가 2023년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국가로 추락했습니다. 18세기부터만 언급하더라도 개혁교회 지도자인 조지 휫필드와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레, 챨스 웨슬리를 비롯하여 구세군 운동의 창시자 윌리엄 뿌드도 영국이 배출했습니다. 이어 20세기 복음주의 신학과 교회의 쌍두마차라고 하는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도 영국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20세기 복음주의권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레오나드 레이븐힐도 영국 출신입니다. 20-21세기의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라고 지칭되는 C,S 루이스,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도 영국이 낳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수재들입니다. 더불어 가까운 근래인 20세기 초에는 웨일즈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이반 로버츠도 영국이 낳은 사역자이며, 전 세계 설교자인 롤 모델이라고 하는 챨스 스펄전 목사도 영국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 목사였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흥을 도모했던 21세기 영국 교회의 지금은 어떻습니까? 고사 직전입니다. 챨스 스펄전이 사역했던 런던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은 지금 면적의 반이 술집으로 넘어갔고, 유수했던 교회 예배당들은 무슬림들의 회당으로 넘어갔을 정도로 무너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영국교회가 참담한 지경으로 급전직하했을까요?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에서 영성신학을 지도했던 제임스 패커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영국이라는 사회가 탈-기독교화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기독교적인 인간관에 대항하여 흥미를 끌게 해준 세속적 매력에 빠짐으로 인해 가해진 충격이고, 둘째, 교회의 실패와 무능력함으로 가해진 충격이고, 셋째로 실용적인 물질주의로 인해 가해진 충격에서 오는 혼란 때문이다.”(제임스 패커,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 69쪽) 결국, 과학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라는 20-21세기 몰려든 신 바벨탑을 섬김으로 인해 교회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고 패커 교수는 진단한 것입니다. 21세기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과학주의의 관점에서 본 기독교, 세속주의적인 관점에서 본 기독교, 물질주의(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독교를 지금 수많이 진단하고 그 진단 이후 이렇게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박멸되어야 할 종교적 바이러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아주 가끔 이런 자존감으로 무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영적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과학주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진단할 세속주의, 그리고 기독교적인 세계관 안에서 해석해야 할 물질주의에 대한 영적 지론이 내게, 그리고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패배하면 안 됩니다. 이것에서 양보하고 나니 결국은 교회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캐나다의 뉴 라이프 커뮤니티 담임목사인 마크 뷰캐넌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인간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그들은 단 한 마리의 벌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수한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241쪽) 기막힌 성찰이 아닙니까? 인도 선교의 지평을 확고하게 한 신실했던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TV 방송국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사회를 맡은 여성 앵커가 스탠리 존스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고 계신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인데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탠리 존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183쪽)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학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라는 이방의 여인들입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의 빗금치기라는 배타성이 아니라, 아직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분명한 신앙의 노정이 정립되지 않았다면 과감히 그것들과 절교하십시오. 그리고 끊으십시오. 섣불리 줄타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들에게 절실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기입니다. 전심하십시오. 이게 먼저입니다. 약속하십시오. 이방적인 일체의 것들과 단절하겠다고.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임재 안에서 내 모든 것 나의 생명까지 다 주님 앞에 드립니다 주 임재 안에서 이제 내 영혼 자유해 내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며 예배하리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 안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