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말 “기적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라고 카프카가 말했던가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도 기적이지만, 오늘 우리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한 그릇의 밥을 먹는 것도 기적이지요. 마종기 시인이 말한 ‘하루의 모든 시작은 기적’이라는 시인의 말도 살아 있음 자체가 놀라운 축복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나희덕 시인이 옴니버스 형식을 엮은 시인들의 유명한 시 중에 마종기 시인의 ‘기적’을 소개한 뒤에 남긴 해제다. 시인이 남긴 글과 그것을 해제한 시인의 평(評)을 읽다가 솟구치는 감정이입이 들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지금 호흡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나는 이런 기적을 수없이 맛보고 있는데도 도대체 답이 없는 무감각으로 나날을 보낼 때가 너무 많아 아프고 쓰리다. 무감각은 악성 종양이다. 무감각은 소리 없는 총질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살지만,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종양에 쓰러지고, 총질에 난사 당하며 죽어간다. 작년 말, 섬기는 교회가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담임목사와 함께 떠나는 독서 여행’을 가졌다. 함께 나눈 교재가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였다. 여행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나눈 독서 후기는 참으로 뜨거웠다. 가장 많이 남긴 감동적인 후담은 무신론자 의사 셜록이 페스트로 인해 죽어갈 때, 치셤 신부가 친구와 나눈 대화였다. 불신자였던 셜록이 끝까지 가톨릭 신앙적인 임종 성사를 거부했지만, 치셤 신부가 무신론자까지도 구원의 포용성을 열어놓은 크로닌의 기법은 당연히 논쟁거리였다. 독서 여행 참석자들이 나눈 테마는 한편으로 열면, 상당히 단순한 일이었다. 무신론자에 대한 구원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에 대한 지지와 그 반대의 논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가 『천국의 열쇠』를 아주 오래전에,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격정은 치셤 신부와 함께 중국 외방전교회에서 동역하던 베로니카 원장 수녀와 나누었던 치셤의 어록 때문이었다. 셜록의 구원을 인정하지 않았던 원장 수녀에게 치셤 신부가 했던 말은 필자에게 충격이었다. “나름의 종교를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참마음으로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보좌에 앉으셔서 반짝이는 눈으로, 점잖은 불가지론자를 보고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너는 한사코 믿으려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여기에 있다. 네가 그렇게 없다고 주장하던 천국에 들어가거라.” 치셤의 말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켜 이단적 사상을 갖고 있는 반기독교적인 불온한 인물이라고 벌 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필자가 지면에서 나누고 싶은 치셤의 논리는 교리적 차원의 가부를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치셤이 갖고 있었던 ’생각하는 믿음‘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21세기 랜덤은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무감각을 추앙하게 하는 랜덤이다. 그리스도인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소견이 옳다고 확신하기에 조금도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증언이기도 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자의 비극은 막살아도 된다는 자충수를 둠으로써 회생 불가의 지경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비극을 넘어선 재앙이다.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의 집필 목적은 생각하고 살자는 의도 때문에 집필되었다. 무감각의 무저갱에서 빠져나오자는 취지를 갖고 출간의 용기를 냈다. 아주 가끔은 ‘멍때리기’를 할 때가 있다. 때론 좋은 생활 습관의 여백이다. 하지만, 멍때리기가 지속되면 그건 정신질환이지 삶을 재충전하는 활력이 아니다. 필자는 한국교회에 밀어닥친 비극을 단말마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한다면 이렇게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질문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교회는 중세 가톨릭과 다르지 않다. 필자는 본서를 집필하면서 사사 후기 시대 무대 주인공 삼손에 대해 계속 불온하게 비평하며 질문했다. 동시에 사사 이후 시대의 정체성도 줄곧 질문했다. 그 질문의 결과물이 본서다. 이 책을 덮으면서 필자는 후회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했기에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밝힌 것처럼,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무식한 용기(?)를 냈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이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얻었다면 저자는 그것으로 충분히 글 쓴 수고의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믿는다. 1권에 이어 까칠한 2권도 교정을 보기 위해 순교적 수고를 아끼지 않은 박명자 권사는 내겐 소중한 인적 자산이다. 야훼께서 지지하시는 건강의 복이 임하기를 중보 해 본다. 출간하는 것이 맞는가를 물을 정도로 졸저인데, 기꺼이 추천의 글을 삽입하도록 귀한 원고를 보내준 서울신학대학교의 소중한 후배 조성호 교수께 감사를 드리고, 야단맞을 각오를 해야 했던 졸고를 기꺼이 읽고 추천의 글까지 담아 주신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장 전성민 교수께도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허접한 글이지만 현장 목회자를 격려하기 위해 1권에 이어 2권 출간을 허락해 준 도서 출판 동연 김영호 대표와 편집부 직원들에게도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린다. 핀잔을 주는 데 일등공신이었지만, 정서적으로 남편의 글을 믿어준 사랑하는 아내 재열, 아들 요한 목사, 며느리 은지가 남편과 아빠의 책을 읽고 생각하는 동역자로 서주기를 기대한다. 이 책의 밑힘은 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분의 사랑은 여전히 내겐 현재진행형이다. 이 땅에서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 내가 영원히 부를 노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다. 2024년 6월, 멀리 보이는 세명대 산기슭에 멋진 운해가 낀 날, 제천세인교회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