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눈은 그럭저럭 버티겠는데 말이 꼬인다. 아내가 아주 냉정하게 말한다. “이제는 제발 천천히 말하는 자세를 가져요.” 나름 갖고 있었던 자존심을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 바가지다. 가장 표준말에 가깝게 또박또박 발음하며 설교하는 자라고 자부했건만, 내상이 깊은 스크래치를 남기는 아내의 공격에 속수무책인 나를 보며 두려워진다. ‘아, 옛날이여’라고 외치는 꼰대 짓도 할 수 없다. 아내의 말이 사실이기에. 저항인지는 모르겠지만 오기가 생겼다. 말이 그렇다면 글이라도 남겨야지 객기를 부려본다. 하지만 글마저도 아내의 평가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이젠 글도 그만 쓰라고 성화다. 까칠하고 읽기에 불편한 어려운 글을 어떤 독자가 읽으려 하겠냐고 핀잔을 주며 민폐 끼치지 말고, 남은 정년 목회나 열심히 하라고 다그친다. 평생, 한 이불을 덮고 잔 이에게 독설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5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이것마저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다. 용기를 낸 이유다. 작가들의 팔자가 이렇다는 글을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 또 하나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목사 양심 때문이다. 작년 초에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Ⅰ』이라는 제하로 현장 목회자가 치열하게 읽었던 사사기 독서 소회를 출간했다. 1〜12장에 대한 독서 글감을 정글 같은 목회 현장에서 목회 신학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진솔하게 나눴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졸저를 보고 긍정적 평가를 해준 독자들에게 했던 2권 출간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기에 조금은 늦었지만 1권에 대한 속편을 완성해 내놓게 되었다. 졸저는 사사기 13〜21장에 대한 내레이션(narration)이다. Ⅰ 권에 이어 잇대면 제8부에 해당하는 13〜16장에서는 최후 사사라고 지칭되는 삼손 이야기를 대단히 비평적 틀 안에서 살폈다. 필자는 삼손 내레이션을 “존재했음이 더 불행이었던 사사”라고 부제를 달았다. 말 그대로 삼손은 최악의 사사였다. 혹자들은 삼손을 미화하려는 무모한 시도까지 한다. 하지만 삼손은 결코 미화돼서는 안 되는 실패의 전형을 보여준 사사다. 그는 존재했음이 더 불행이었던 사사다. 제9부인 17〜21장에 소개된 사사 시대의 담론은 공교롭게 사사 후기 시대와 초기 시대의 영적 기상도를 공히 독자에게 알려 주는 좋은 자료다. 물론 너무 아픈 보고이지만 기실, 2024년이라는 신 사사 시대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그대에게 더없이 좋은 반면교사를 삼을 만한 성서의 보고문이다. 필자는 17〜21장을 “랜덤 클라이맥스”라고 부제를 달았다. 막 살던 시대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단락이기에 부제 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현장 목회자가 거침없이 비평, 성찰한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를 출간하기 위해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필자는 오전 내내 서재에서 공부하며 씨름했다. 학술 학위가 없는 저자의 글은 역시 허접해! 라는 수모를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도 근시 시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책 읽기만큼은 견딜만하기에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사사기 주석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뒤돌아보니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Ⅰ,Ⅱ』권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필자에게 참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다.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장인 전성민 교수가 집필한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시대-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필자의 졸저를 이 땅에 내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其餘)했다. 그의 책은 마치 졸저의 집필 의도에 가장 결이 맞는 쌍둥이 모양새의 글들이었기에 올바른 교회관 확립을 위해 세워졌던 교회 리서치 연구 기관이었던 『바른 교회 아카데미』(유감스럽게 지금은 해체됨)를 통해 눈인사를 한 게 전부였던 필자에게 감사했다. 왠지 모르게 사사기를 비평적으로 읽으면 불온한 목사로, 은혜롭지 못한 신앙인으로 해석되기 쉽다. 이런 거대 교회의 하이어라키 구조 안에 있는 것이 기독교 작가들은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니 전통적 해석에 대해서는 섣불리 저항하지 못하는 분위기인데, 전 교수의 글을 읽다가 손바닥을 쳤다. 진보성을 지닌 신학자이기에 다분히 냉소적이고 비평적 관점에서 사사기를 다루었지만, 필자는 도리어 전 교수가 펼쳐 나간 사사기 연구 기록을 보면서 대단히 높은 신학적 지성을 토대로 분석한 사사기 연구를 만났다는 감동 때문에 독서 내내 행복했다. 신학자가 첫걸음을 떼었으니, 현장 목회자도 같은 신학적 정황을 갖고 사사기를 이해하는 동역자가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거룩한 오기가 필자에게서 꿈틀댔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투적인 사사기 해석으로 인해 읽는 이들에게 식상함을 주는 경우가 많은 책에서 발견되어 매우 실망스러웠는데, 이런 차원에서 졸저가 나오도록 수훈 갑의 역할을 해준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적어도 내겐 일등 공신이었다. 그 외에도 송병현 교수의 주석서인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사사기』에서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천박하지 않았던 사사기 신학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내게는 보석같이 임한 선물이었다. 주어진 텍스트를 파헤치기 위해 책을 펼 때마다 송 교수의 해박한 사사기 성서 해석에 혀를 내 둘렀다. 성서 신학자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피나는 과정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 『엑스포지멘터리 주석 사사기』도 참 좋은 선생님이었다. J.클린턴 맥켄의 『사사기 주석-현대성서주석』에서는 사사기 신학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경험했다. J. 알베르토 소긴의 『국제성서주석-판관기』는 필자에게 사사기 안에 담겨 있는 히브리어 분석을 통해서 어원적인 사사기 이해라는 성과도 얻게 되었다. 트렌트 버틀러의 『WBC-사사기 주석』에서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간의 이음줄을 공부하게 해준 도움을 얻었다. 이런 사사기 신학의 기초는 졸저 탄생의 밑힘이 되었다. 필자는 해마다 약 100권 정도(꼭 맞추려는 것은 아님)의 독서를 한다. 꿰맞추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주에 두 권, 하루에 100페이지를 독서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다 보니 매년 이런 결과물을 얻는다. 내게 책 읽기는 취미가 아니다. 일이요 노동이요 공부다. 지인이 내 독서 목록을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잡독쟁이구먼!” 난 이 말이 왠지 참 좋다. 물론 꼭 읽어야 하는 책을 선별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 읽기의 방법론은 거침없이 읽기다. 특히 관심의 대상인 인문학적인 책 읽기는 필자에게는 거룩한 욕심이자 행복한 노동이다.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가 졸저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그렇게 나온 책이 아님을 밝힌다. 치열한 책 읽기라는 산고를 겪은 뒤에 나온 결과물이기에 그렇다. 필자의 목회 철학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균형 목회다. 많은 이들이 말장난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신학은 진보적이어야 하지만, 반면 목회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난 35년간 현장에서 부대꼈다. 나는 이 두 개의 패러다임이 공존할 수 없다는 틀을 깨기 위해 목회의 장에서 한시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이런 균형의 현장이다. 그러기에 까칠하기 짝이 없고, 융통성은 거의 제로인 담임목사와 함께 울고 웃으며 동고동락해 준 세인 교회 공동체의 교우들은 이미 성자다. 담임목사의 5번째 출간 도서인 본서는 세인 교회 교우들에게 헌정하는 게 당연하다. 이들이 있었기에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Ⅱ』도 나올 수 있었다. 신 사사 시대 한복판에서 신실한 ‘크리스티아노스’로 경주하고 있는 세인 교회 지체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다. 황인찬 시인이 쓴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을 만났다. 시인은 이렇게 읊조렸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과유불급의 적용이라고 말할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몇 년, 사사기는 내게 ‘백자’였다. 사사기가 나를 빨아들였다. 어떤 때는 분노의 블랙홀로, 또 어떤 날은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아딧줄로 나를 빨아들였다. 세상에 내놓기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졸저임은 분명하지만, 두 번째로 세상에 내놓는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가 현장 목회자들에게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서기를 기대하며, 구약학자들에게 사사기 연구에 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마중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사사기 연구에 최선을 다하는 구약성서학자 로 인해 행복해하며 감격해하는 현장 목회자가 한국교회에 아직은 존재하기에. 2024년 5월의 어느 날, 물이 맑고 깨끗해서 볼거리가 많은 제천에서 이강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