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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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흐름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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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11-04 09: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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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일의 ‘라틴어 수업’(2020년, 흐름출판 간)을 읽고 100쇄를 찍었단다. 나는 첫 번째 책 1쇄도 못 찍었는데. 부럽다. 이런 마음을 갖고 저자의 글을 읽었다. 그러다가 두 손 들었다.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저자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모자란 자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럼에도 건방지게 1쇄도 못 찍은 작가가 100쇄를 찍은 작가를 부러워했다니 회개했다. 책의 겉표지에 소개된 저자에 대한 인트로는 칭찬 일색이다. 한국인은 물론 동아시아인 처음으로 로타 로마나 즉 로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라는 소개가 그랬고, 석사, 박사 모두 최우등으로 졸업한 재원이라는 덧붙임까지 그렇다. 이렇게 대단한 저자의 프로필을 선 이해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범인(凡人)이 아닐 것이라는 경계심을 갖고 글을 읽었다. 하지만 이것도 빗나갔다. 그는 너무 따뜻한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역발상적인 은혜(?)를 받았다. 수재인데 전혀 수재스러움이 없어 보이는 사람다운 사람이 쓴 삶에 대한 이야기에서 풍겨지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 저자는 첫 수업 시간을 아주 짧게 오리엔테이션을 끝난 뒤에 휴강을 선언하며 한 마디를 툭 던진다. 남은 시간은 바로 운동장으로 나가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는 것이 수업의 시작이라고. 그는 라틴어로 아지랑이를 ‘네불라’라고 소개했는데 그 원뜻이 ‘보잘 것이 없는 사람’, 혹은 ‘허풍쟁이’라는 의미의 단어임을 알려주며 이렇게 苦言 한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 것이 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힘든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p,35.)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특히 목사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보잘 것이 없는 존재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공부다. 하찮은 것을 경시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상식이다. 공부의 목적은 Ph.D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남철과 같은 성찰의 삶을 사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시대의 지성이었던 신영복 선생이 이렇게 말한 것은 모두가 경성해야 할 울림이다. “지남철의 여읜 바늘 끝처럼 불안하게 전율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지식인의 초상이다.”(신영복, “담론”, 돌베개,p,403.) 이러려면 ‘네불라’를 보아야 한다. 필자는 책의 초입에 기록된 이 글을 읽다가 뭔가 아지랑이 같지만 내 마음을 들뜨게 할 것 같은 흥분의 마음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 생각은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 “Ego sum operarius studens” 에고 숨 오페라리우스 스투덴스”(p,80.) 직역하면 이렇다.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다.” 노동자라는 말이 눈에 크게 들어왔다. 노동자라는 계급은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士農工商이라 하여 별로 환영 받지 못하는 그룹이었다. 한 때는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라는 말처럼 위대한 단어가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필자는 ‘노동자’라는 단어 자체를 존중한다. 그래서 저자의 이 표현, 공부를 노동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싶었다. 조금 더 헤집고 들어가 보니 저자의 의도가 있었다. 누구든지 어느 날은 공부가 잘 되고, 또 어느 날은 엉망진창인 때도 있다. 바로 이 과정이 공부가 노동의 신성성을 상징한다고 표현한 저자의 갈파는 압권이다. “무비판적으로 안일한 태도를 갖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신의 공부 리듬과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지 면밀하게 관찰하고 평가해야 해요. 생활 리듬도 습관과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리듬을 살펴보아야 하고 좋은 습관을 들이려 애써야 하죠. 좋은 습관과 리듬을 유지할 때 결과물도 좋은 법이니까요.”(p,84.) 어찌 공부만 그러랴! 삶 자체가 그렇다. 매일 좋은 날일 수 없다. 필자 역시 지난 세월을 살다보니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경험했다. 이 과정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좋지 않았던 날과 시간이 더 오늘의 나를 만드는데 일조한 선생님 같은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수확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의 과정 즉 공부의 과정을 비평적으로 성찰할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김기석 목사가 이렇게 쓴 글을 읽었다.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김기석,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꽃자리,p,236.) 기막힌 성찰이다.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 천착하셨는지를 알게 해주는 성찰이다. 그렇다. 공부는 비평적 성찰을 하는 노동이다. 이 노동 끝에는 성장과 성숙이라는 선물이 기다린다. 노동하자. “Si vales bene est, ego valeo”(p,139.) 발음을 잘 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렇게. ‘씨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스’ 씨 발음을 길게 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ㅎㅎ) 한국발음으로 조심해야 하는 이 문장의 감동은 크다. 직역한다. “그대가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저자는 이 문장에 대해 이렇게 부연했다. “로마인의 편지 인사말은 언제나 타인의 안부가 중요하다.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문득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p,144.) 라틴어의 접두어로 많이 쓰임을 받는 ‘cum’은 ‘함께’, ‘더불어’의 의미다. 저자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라틴어는 ‘cum’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이 참 많다고 적시한다. 로마인들의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묻는다. 당신은 그대의 안부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가를.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가장 인기가 있는 글은 한강이 쓴 ‘소년이 온다’에 대한 북-리뷰다. 오늘까지 약 5,300명 정도가 다녀갔다. 왜 목사가 쓴 종교적인 냄새가 나는 글에 적지 않은 사람이 다녀갔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공감 때문일 것이다. 필자의 첫 졸저에 이렇게 담아놓은 문장이 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이 아픔을 잊지 말자는 공감으로 이렇게 썼다. “두 번 읽고 싶지 않은 책, 그러나 여유가 있으면 다시 촉촉한 눈으로 읽게 되는 ‘소년이 온다.’를 80년, 광주에 파견되어 총질한 그들과 그들의 총질을 당당하게 사인한 이 땅에 호흡이 있어 숨 쉬고 있는 자들이 꼭 한 번 읽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읽는 독자들은 꼭 한 번 질문해 보시라. 소년들을 잠들게 하는 날이 과연 올까를. 유감스러운 것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면 당분간 소년들이 계속 잠들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이강덕,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p,165.) 나 같은 목사는 물론, 상식과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cum’이라는 삶을 삶의 메뉴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게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40만 명의 도시에 80만발의 실탄을 제공한 자를 향하여 그래도 정치를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이니 아프기 그지없다. “Hodie mihi cras tibi” 번역하면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부연했다.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오늘은 내가 관이 되어 들어왔고, 내일은 네가 관이 되어 들어올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문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한 삶을 살다 다시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숨이 한 번 끊어지면 그만인데도 영원에서 와서 인지 인간은 영원을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삽니다.” (pp,151-152.) 저자는 연이어 이렇게 말한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p,157.) 필살기 같은 글을 읽다가 숙연해 졌다. 일본의 호스피스 전문의로 각광을 받는 오츠 슈이츠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대개 자신의 일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율존재를 상실하기 쉽다. 그러므로 자율존재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을 초월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본인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만 갖게 되는 것이다.” (오츠 슈이츠, “죽을 때 후회하는 25가지”, 21세기북스, p,218-219.)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에서 왜 메멘토모리를 외치라 했는지 로마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또 글이 길어졌다. 비난의 목소리가 쇄도할 느낌이 있어 줄이고자 한다. 하지만 하나만 더. “Religio est bortus” (종교는 정원이다.) 저자는 신실한 가톨릭 공동체의 성원답게 이렇게 단호하게 적시했다. “종교는 무엇일까요? 저는 종교란 마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정원과 같다고 생각해요.” (p,250) 저자의 따뜻한 일설에 전적으로 아멘 했다. 프랑스인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평생 사역한 빈민 구호단체인 엠마우스 공동체의 창설자 아베 피에르 신부다. 그가 말한 천둥소리를 필자는 목회자로 살면서 가슴에 담았다. “나는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우리가 또는 비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간의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확신한다.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과 타인들의 고통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있을 뿐이며,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길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마음산책,p,93.)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자가 우글거리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지 않을까. 부정적인 동사를 긍정의 의미로 사용하니 어색하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자극적인 도전을 위해 사용했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자, 사랑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자들이 많은 곳은 정원이 된다. ‘누구의 것’이 아닌 ‘누구나’의 정원 말이다. 제발 교회가 펜데믹의 지난한 고통이 휩쓸고 간 오늘, 누구든지 함께 쉴 수 있는 정원이었으면 좋겠다. 한동일의 책을 읽고 난 뒤에 곧바로 그가 쓴 ‘그래도 꿈 꿀 권리’를 구입하기 위해 알라딘에 들어갔다.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아쉽게도 품절이다. 구입할 방법을 아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기를 바란다. 그를 글벗으로 가까이 두고 싶다. 얼마 전, 최인아 책방에 방문했다가 본서를 추천받았다. 최인아, 한동일과 같은 글벗들이 있어 그래도 한국은 돌아간다.
서평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연주와 파벨 길릴로프의 피아노 협주로 울려 퍼지는 ‘MEDITATION’이 천상의 소리가 되어 서재에 가득하다. 난 참 행복한 목사다.
ps: 아내가 독촉하지만 내가 읽은 책 중에 아내에게 읽으라고 권하는 책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내가 읽은 책 중에 상당수가 재미가 없거나 어려워서다. 아내가 지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열독 중이다. 강추 해서 건넸기 때문이다. ‘라틴어 수업’은 또 넘겨 줄 거다. 놓치면 안 되는 양서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