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나태주 |
---|
ㆍ출판사 | 열림원 |
---|
ㆍ작성일 | 2021-12-17 11:21:29 |
---|
나태주의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열림원, 2021년)를 읽고 그냥 줍는 것이다/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버려진 채 빛나는/ 마음의 보석들 (p,218) ‘詩’라는 제목의 시다. 저자가 말한 詩語는 너무 담백하여 정곡을 찌른다. 아, 그런데 말이 쉽지 어디 버려진 것에서 마음의 보석을 찾아낸다는 것이 그리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일이란 말인가! 단언하건데 이 보석은 시인의 마음으로 사는 자만이 주을 수 있고 찾아 건질 수 있다. 그러니 시인은 천재들이다. 한 여론에서 대학에서 인문학 같은 것은 소수만 하면 되고, 대학원에서까지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발언한 모 대선후보의 발언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곧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는 재앙이라고. 언젠가 읽었던 슬로보니아 출신의 사회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했던 말에 공감하여 밑줄을 그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비극적인 재앙은 감성의 사막화다.”(슬라보예 지젝외 6인 공저, “나는 누구인가”, 21세기북스, 2014,p,174.) 감성이 사막화가 된 시대가 어떤 시대일까? 그냥 무심코 버려진 것들에서 마음의 보석을 찾아내는 일이 묵살되는 시대다. 당연히 희망이 없는 시대다. 세상 어디엔가/ 우리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골목길과/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던 꽃밭이/ 숨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 얼마나 희망적인 일이겠니!(가보지 못한 골목길에서 p,212) 펜데믹 3년차를 맞이한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인해 압박당해온 지난 2년, 왜 두렵고 힘든 것일까를 많이 질문하고 성찰하며 지내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읊조린 자답(自答)은 경험해보지 않은 낯섦 때문이고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던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동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의 도출이었다. 이것이 범인(凡人)들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사고일 텐데, 시인의 이 시어를 읽다가 무릎을 쳤다. 물론 소개한 시어가 시인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염두 한 시작(詩作)의 건더기는 아니겠지만, 낯섦과의 동행과 만남 자체를 긍정의 언어로 토설한 것은 인문학이 왜 인간에게 절실한 학문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준 멋진 저항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류시화 시인이 감수하며 기록한 인디언들이 갖고 있는 마음속의 언어들을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읽었던 적이 있다.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는 주위 모든 것들에 대해 배우고 있다. 소리, 음악에 대해, 다른 문화 사람들은 그런 깨어 있음을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그 깨어 있음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혼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사람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런 깨어 있음 속에 사는 일이다.”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김영사, 2010,p,719.) 야만인, 미개인이기에 ‘접근금지구역’(Indian Reservation)를 만들어 문명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법과 물리력으로 강제한 퓨리턴들에 비해 인디언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은 그들이라는 대명사로 대치한 문명인들이자 침략자들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가질 수 없는 자연, 대지, 문화,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을 존중했던 시인의 마음이었다. 시인의 마음과 감성을 갖고 살아가는 자를 감히 누가 넘어뜨릴 수 있을까. 인문학을 물리력이 제언한다고! 어불설성이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그리움에서, p, 285) ‘바로 너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나’에게 ‘너’는 있나? 이제 환갑을 지난 연륜을 보내고 있기에 그런지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필자에게 보인다. 바로 ‘너’다. 나는 내 삶의 스티그마를 들추어 낼 때 못 견디게 그리워하는 ‘너’가 있는가를 근래 곧잘 반추하곤 한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어떤 것도 훼방할 수 없는 갖고 싶은 ‘너’, 만나고 싶은 ‘너’가 나에게 있는가를 곱씹는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저자가 이렇게 읊조리기까지 한 것은. 쓸쓸해져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다. (길1,p,313.) 이게 나이 듦이라는 미학의 창을 통해서만 통찰할 수 있는 혜안인가 보다. 저자의 시 씀이 부럽고 부럽다. 그의 필력이 부럽다. 문학 평론가 정실비가 저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태주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가장 잘 내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노련한 악기다.” (p,333) 100% 동의한다. 저자의 시집에 담긴 시어들을 읽으면서 평론가의 갈파를 진중하게 느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살해 위협으로 인해 깊은 번 아웃을 경험하며 브엘세바 근처에 있는 로뎀 나무 그늘로 들어가 죽기를 간청했을 때, 바람,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그를 찾아오셔서 위로하셨던 야웨 하나님의 소리를 저자의 시어에서 들었다면 너무 큰 과장이자 비약일까! 괜찮다. 그 정도의 비난의 소리 듣는 것은. 2021년의 막바지에 있다. 숨이 잘 안 쉬어지는 형국이다. 어찌 필자만 그러랴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녹록하지 않은 작금이지만, 호흡하기가 버거운 오늘이지만 독자들의 손으로 저자의 이 시집을 한 번 펼쳐 보기를 바란다. 폐를 다시 살게 하는 시인의 공기를 맛보게 되리라. 나태주는 펜데믹 2년차에 필자가 처절하게 경험한 무력함의 시간 속에서 내게 다시 인문학적인 감성을 되살려 줌으로서 분연히 일어서게 해준 2021년, 최고의 선생님이었다.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