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소준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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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푸른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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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3-24 14:18: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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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의 “가난의 문법”(푸른숲, 2020)을 읽고 2011년, 가을 즈음에 섬기는 교회 명예 권사님 두 분이 봉투를 내미셨다. “목사님, 건축헌금인데 씨앗헌금으로 드립니다.” 두 분이 봉헌하신 액수는 각 100만원씩 200만원이었다. 건축헌금을 드리신 권사님들의 직업은 필자가 서평을 쓰고 있는 본서의 저자가 사용한 용어로 표현하자면 ‘재활용품수집노인’ 즉 폐지를 줍는 일을 하시는 차 상위 계층의 노인들이다. 어르신들이 드린 건축헌금은 건물을 갖지 않고 사역을 하려 했던 필자에게 대단한 부담을 준 게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건축 당시의 무언의 약속을 깨고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필자는 젊은 계층의 개혁적인 모드의 신자들에게 약속을 깬 정직하지 못한 목사라는 적지 않은 공격을 당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난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이유는 두 분의 눈물 때문이었다. “목사님, 우리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의 집을 하나 건축하고 하나님께 서고 싶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물질이지만, 벽돌 헌금으로 여겨주셔서 교회를 건축해 주셨으면 합니다.” 건축 이야기는 여기까지. 지금 필자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건축이 팩트가 아니고. 두 어르신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 논지기에. 노 권사님들이 드린 헌금의 액수는 가히 두 분에게는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어르신들은 폐지를 줍는 노인(재활용품수집노인)으로 오늘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경제적 궁핍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두 권사님들의 소망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층인 폐지를 줍는 노인(재활용품수집노인)을 저자는 이렇게 정의했다. “가난한 여성 노인은 이전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 양육으로 삼게 하고,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게 하지 못하게 한 결과인 것이다.” (p,12.) 저자는 이 글에서 1945년 생, 즉 이 책이 집필된 시기인 2020년을 기점으로 만 75세의 재활용품수집노인 윤영자(가명)를 주인공 삼아 2020년 대한민국 사회에 존재하는 17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폐지 줍는 노인의 가난을 심층 취재하고 추적한다. 글을 읽는 내내, 필자는 앞서 언급한 섬기는 교회의 두 분의 명예 권사님들이 드렸던 눈물의 헌금이 물질이 아니라 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끼며, 오늘의 세인교회 예배당이 어떻게 세워진 예배당인가가 희미해지는 작금, 다시 한 번 어르신들의 피로 세워진 세인 교회에 대해 되새김질하는 각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인공 윤영자씨는 1965년 결혼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남편은 공무원으로 일했지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착오로 인도네시아 파견기술자로 자원했고, 돌아온 후 경제적 상황은 나름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작한 사업들이 실패함으로 가세를 기울어졌다. 잠시 시장에서 가게를 경영했지만, 그도 시원찮아 영자씨에게 맡기고 택시 운전을 하며 경력을 쌓은 뒤, 개인택시를 몰았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져 일을 그만두고 경비원으로 취직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 견디지 못했다. 경제적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3남 3녀의 자녀들은 출가했지만, 딸 둘과 둘째 아들은 경제적 독립을 한 반면, 외의 자녀들이 그렇지 못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집을 팔아 자녀들을 지원한 끝에 집 없는 말년을 경험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암으로 발전했고, 암 투병을 해야 하는 남편이 경제적 금치산자가 되는 바람에 급기야는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전형적인 가난의 굴레에 빠지게 된 케이스가 영자씨다. 저자는 이렇게 갈파했다. “우리는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p,27) 저자의 이 말이 필자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늙음을 맞는 국가의 국민들은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 때문에 비정상적인 개체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 당연히 국가는 노인 인구에 대하여 정상적인 삶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이다. 저들 세대의 가난은 대한민국의 경제적 자립이라는 거대한 목적을 향해 가는 동안 속죄양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불특정 다수들이기에 그렇다. 조금만 더 영자씨를 추적해 보자. 저자는 주인공 영자씨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추적하여 기술한다. 저자의 추적을 따라가다 보면 대단히 화나고 불편해진다. 필자도 이제 환갑을 맞이한 노인 세대라서 그런지 영자씨의 삶에 대한 감정이입이 진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저자는 영자씨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하여 이런 사회학적인 분석을 전제한다. “영자씨가 가난에 휘말렸던 것은 영자씨의 주도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유동적인 변화의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우리가 ‘가난한 삶으로 이끈 책임’이라며 낙인찍었던 영자씨의 결정과 행동은 각 시대의 처지에 대한 그녀 나름의 생존 법칙이었다.”(p,128)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전적으로 동의한다.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분류된다. 저자는 이렇게 이들의 삶의 질을 분석했다. “기초수급대상자 노인들 10명의 생애사적인 경험을 수집하고 연구했는데, 이들 가운데 자살위험 집단으로 파악되는 이들이 가진 삶의 태도를 살펴보았다. 이들은 체념적 수용, 불안과 무력감, 우울과 절망, 상대적 만족과 계속되는 분투에 힘겨워했다.” (pp,164-165) 설상가상으로 이들이 노출된 위험들 역시 만만하지 않다. 저자는 노인들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실례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 교통사고, 둘은 묻지 마 폭행이다. 경쟁구도가 형성된 폐지 줍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벽 1-6시 사이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해야 하는 노인들은 전자의 위험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계층들에 의해 자행되는 후자의 경우도 노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단히 큰 위험임을 제시했다. OECD 국가 중에 노인 빈곤율 1위가 대한민국이다. 아픈 현실이다. 아주 오래전에 읽다가 전적으로 동감했던 글을 기억한다. “사회학에서 소위 말하는 낀 세대의 부류인 베이비부머(1955-1963)들의 나쁜 버릇이 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다 해줘야 한다는 무모한 의무감이다. 어찌 보면 주제넘은 욕심이다.”(송호근, “그들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이와우, p,44.)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쩔 수는 없다. 지금에 와서 주제넘은 욕심을 냈다고 지성인에게 야단을 맞기는 하지만,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태어난 전후 세대 및 낀 세대 부모들의 한계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들에게 적어도 비정상적인 개체로 인정받는 굴욕을 안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오늘 국가가 해야 할 의무요 책임이다. 가난한 노인들을 향하여 ‘문명화’가 덜 됐다거나,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고 가타부타 평가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자는 역설한다. “도시의 가난한 노인들은 나름대로 도시 공간을 자신의 몸에 맞춰 전유하고 있는 특별한 존재임을 고민해야 한다.”(p,265)고. “지금 국가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한 문제는 노인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p,276) 물론 정치 역학적으로, 혹은 사회학적 해석이라는 담론 등등으로 접근 해석해야 하며, 단시간 내에 1+1=2라는 공식으로 답이 나올 수 있는 사안이 아님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표 설정에 집요함과 그 의지 관철은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판단되어서는 안 되는 대한민국의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점이다. 직업의식이 도졌다. 글 말미에 저자가 제시한 foot note의 보고가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종교시설은 노인과 여러 면에서 관계를 맺고, 이들을 안도케 하는 기능이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종교 시설에서 쌀과 같이 부족한 필수 자원을 지원 받을 수 있고, 미용과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현금 소비를 하지 않게끔 한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문안 인사를 하는 자녀들과는 달리 성직자와 임원들과 봉사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축복을 나누며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p,269) 교회가 해야 하는 순기능 중에 하나가 가난한 노인 계층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고 진단한 교회 밖의 전문가의 진단이 왜 이리 반가운지. 어떤 의미로 보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대변한 글을 보면서 교회가 무너지는 시대에 한 줄기의 서광이 비추는 것 같아 저자에게 감사했다. 필자가 서평을 하고 있는 책의 제목이 ‘가난의 문법’이다. 글을 맺으려고 하다 보니 이런 억하심정이 든다. 가난을 문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나라의 자화상이 너무 불행하지 않은가! 싶어서 말이다. 변산반도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는 윤구병은 이렇게 말했다. “가진 것이 없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우리의 희망이다. 이분들께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고,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약속해서는 안 된다. 경제주의의 해로움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이 먹고 같이 굶읍시다. 이 약속으로 충분하다.”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휴머니스트, p,265.) 그렇다. 가난한 자를 위한 연대는 나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할이다. 교회보다 세상이 이 일에 앞서 나가면 되겠나 싶다. 오늘부터 세인교회는 제천에 존재하는 수많은 윤영자와 어떻게 연대할지 조금 더 고민하련다. 대학원 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니버의 글이 공명으로 나에게 울린다. “인간관계가 밀접한 곳에서는 사랑의 길이 정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현대사상사, p,273.)
교회가 실천해야 하는 정의다. 토 달지 말자. 교회는 교회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