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우리 교회가 행하는 사역 중에 자랑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516장 –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 ● 복음성가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말씀읽기와 적용 (WORD)제목: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자 본문: 히브리서 10:23-25 1) 히브리서 저자가 선포했던 성도가 행하여야 하는 사역 두 가지는? 2) ⓵ 항목을 전제할 때 두 가지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⓵ 설교를 중심으로 담임목사가 선포했던 레마를 중심으로 ⓶ 25절 하반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언급한 말씀을 중심으로 |
3) 적용하기 ⓵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다른 이의 신앙 자세를 판단하려고 했다면 돌이키자. ⓶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실천해 보자. ⓷ 나는 예배자로 얼마나 잘 서려고 노력하는지 성찰해 보자. | 사역하기 (WORK)사역하기 1) 공 예배 출석 최선 다하기 2) 수요 예배 설교 피드백 카톡으로 남기기 (셀 원들이 피드백은 리더가 받기 바람) 3) 일일 장터에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4) 중보 제목 기도하기
1. 8월 중에 실시될 교회학교 여름사역을 위하여 2. ‘BUT HIM’ 찬양 집회 승리를 위해 3. 공동체 지체 중에 어려움을 당하거나 나약한 교우들을 위하여 4. 수험생들을 위하여 (조예나, 장준영, 신동준) 5. 9월부터 진행될 교회 사역의 일체가 완전 정상화되도록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서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 설교요약 (SUMMARY)2022년 7월 1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이후 여섯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10:23-25 제목: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자
우리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직접 들어가셔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인해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 없는 은혜를 받은 자임을 나누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이 은혜의 수혜자들은 히브리서 수신자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며 실천해야 할 성도로서의 의무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⓵ 사회적인 책임 감당입니다. 본문 2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 선언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직접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약속을 주신 것뿐만이 아니라, 미쁘시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미쁘다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피스토스’는 ‘믿을 만하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신뢰가 간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은 신뢰해도 되는 분이십니다. 믿을 만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믿음의 주체이신 분입니다. 이런 주님의 속성을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연이어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소망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대단히 의미 있는 권면을 남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신앙공동체만을 국한해서 선언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 내용은 이 설교문(히브리서)을 듣고 있는 주후 1세기 로마 주변에 있었던 신앙공동체와 더불어 그 지역에서 공존하고 있는 교회 밖의 이웃공동체 전체를 아울러서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교회 안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의 그들까지 포함하여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칼 트르먼 교수가 했던 말을 소개합니다. “진정한 정치(그 이름에 걸 맞는 정치), 즉 내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유일한 정치는 한 마디로 주위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이며, 우리를 보고 뒤따를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 정치의 가장 깊은 뿌리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체를 향하여, 전체를 위하여, 행동을 통하여 표현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칼 트루먼, “진보보수 기독교인”, 지평서원, 189-190) 트루먼의 이 글을 만난 지가 오래되었는데 노트해 놓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정치를 거론했지만, 결코 정치가 이런 방향성으로 가고 있지 않음을 고발한 메시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트루먼이 말한 메시지의 정반대로 흘러가는 집단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트루먼의 바람에 부합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이익집단들의 이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가 트루먼의 이 지적을 곱씹는 이유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렀기 때문입니다. 트루먼 교수의 갈파에 이렇게 단어 하나를 바꾸면 적절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치’라는 단어를 ‘교회’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읽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그 이름에 걸 맞는 교회), 즉 내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유일한 교회는 한 마디로 주위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이며, 우리를 보고 뒤따를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그 정치의 가장 깊은 뿌리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전체를 향하여, 전체를 위하여, 행동을 통하여 표현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칼 트루먼, “진보보수 기독교인”, 지평서원, 189-190) 이런 섬김을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교회가 가져야 하는 사회적 책임의식이라고 정의합니다. 웨슬리 신학자인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가 말한 크리스천의 기업적 윤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음을 인용합니다. “고용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업을 운영해야 하며, 반드시 크리스천으로서의 기업 정신, 곧 고용인을 착취하지 말고, 함께 이익을 나누어 갖는 사랑의 정신으로 경영해야 한다.”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기독교서회, 199.)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진보적인 교회들이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해서 지금도 진보적 성향의 교회들은 사회적 책임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미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 사회적 책임이기는 하지만 주의할 것은 교회와 성도가 이 사역에만 매몰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사역과 더불어 반드시 또 한 가지의 미션을 수행해야 합니다.
⓶ 예배하는 공동체와 그 일원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문 25절을 나누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익숙하게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모이기를 폐하다.’라는 문구를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D, 거쓰리 교수의 말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은 아마 예배를 가리킬 것이다. 비록 예배라는 단어를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모임’을 의미하는 ‘에피쉬나고게’는 종교적으로 완전한 모임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거쓰리, “틴데일 신약주석 15-히브리서”, CC, 316.)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일련의 무리들이 교회 공동체 예배의 무용론이나,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예배를 방해하려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왜 사수해야 하며, 지켜 나아가야 합니까? 저자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날이 가까이 와 있는 영적 상태에서 예배는 성도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 신학적으로 정의를 말한다면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두 개의 예배 정의 문장을 소개합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신앙 안에서의 인간들의 인격적인 정성어린 응답이다.” (플랭클린 지글러) “예배란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엎드리는 것이다.”(로버트 레이먼) 이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는 주군이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저자가 이 설교문을 작성할 때,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동에 교회 공동체 안에 예배하기를 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지성소에 직접 들어가셔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하심에 반응하는 예배를 폐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는 단호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모이기(예배)를 폐하는 자들과는 습관을 같이 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제가 앞에서 예배 신학적인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학문적으로 정의하려면 언어를 통한 이론 정립이 절대적인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예배 정의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리얼하게 예배드림에 대한 의미를 표현하겠습니다. 저는 주일을 준비함에 있어서 최대의 집중력을 동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배입니다. 예배드림의 후담들이 제게는 대단히 민감한 사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의 바로미터가 성도들의 후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우는 이렇게 소감을 피력합니다. “목사님, 아주 가끔은 격려하는 말씀이 듣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일주일, 성도들이 살아온 현장에서 매우 힘든 일들을 경험하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친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는데 목사님이 전하는 메시지 중에 위로가 담겨 있으면 힘을 얻고 돌아갑니다. 위로의 메시지를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어떤 교우는 이렇게 전언해 줍니다. “목사님, 일주일을 살면서 내가 처해 있는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에 타협했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 후에 예배당을 빠져 나왔는데, 현실의 무게에 또 무너졌습니다. 이런 절박함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허나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 지난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얼마나 고생했냐고, 너무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듣노라면 화가 납니다. 내가 실패했으니까 말씀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다시 경종시키는 벼락과 천둥소리를 듣고 싶은데 성도들이 상처를 당할까봐 어르고 달래는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나를 두 번 힘들게 하는 소리로 들려 화가 납니다.” 또 익명의 성도가 이렇게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배 시간, 성경봉독을 하는 순서에 자리에서 기립할 때, 나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와 있는 임재의 감동을 받습니다.” 또 다른 지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하늘로 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예배에 들어와 이 임재찬양을 드릴 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나는 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전 존재를 느낍니다.” 또 다른 교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 시간, 회중 대표기도 순서를 맡은 지체가 준비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때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표현 자체가 서툴러서 그렇지, 교우들이 예배를 통해 느끼는 소회들이 어디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불의 사자후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탄생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반역자들을 예배자들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아이든 토저,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13.)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는 죄로 인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도록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저와 여러분의 예배의 이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예배를 폐하는 자들과 습관을 같이 한단 말인가를 히브리서 저자가 경고하며 선포한 것이 본문 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제 우리는 본문 설교를 위해 서두에 드렸던 문제제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성도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로 가르치는 영역이 보수적 복음주의라는 영역입니다.
반면, 전술했듯이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미션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영역이 진보적인 영역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의 언어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는 사회개혁적인 진보적 기독교의 가르침인 반면, ‘모이기를 폐하는 그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는 복음적인 보수적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사역에 더 힘을 써야 합니까? 그 답을 오늘 설교의 레마로 정했습니다.
※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기울어진 운동장의 상황을 교회가 만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영역에 있는 자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 영역으로 들어가야 살아남습니다. 태생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적어도 크리스티아노스들은 본문 24-25절중에 그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놓쳐서도 안 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는 삶도 살아야 합니다.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나에만 기울어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수아 1:7-8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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