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본 영화나 뮤지컬 중에서 가장 마음 깊이 남아 있는 것은? |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266장 – 주의 피를 이룬 샘물 ● 복음성가 – 주님이 흘린 눈물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커튼콜이 시직된지 오래입니다. ● 본문 : 히브리서 9:1-14 1) 첫째 장막(성소)과 둘째 장막에 있엇던 성물들을 말해 보자. ① 첫째 장막 (성소) ⓶ 둘째 장막 (지성소) |
2) 휘장(커튼)을 주님이 찢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들을 열거해 보자. ⓵ 누가복음 23:46 ⓶ 히브리서 8:12, 히브리서 10:10 |
3) 적용하기 커튼콜이 이미 시작되었다. (히브리서 9:11-12) ⓵ 새겨야 할 부분: 담임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⓶ 팀 켈러 목사의 갈파를 통해 성찰해야 하는 새김 | 사역하기 (WORK)이번 주간 사역
1) 주일 대면 예배 참여하지 않은 셀 지체 파악 후 심방하기 2) 피선교지 중보하기 3) 셀 지체들의 기도 제목 나누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 설교요약 (SUMMARY)2022년 5월 29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부활주일 이후 일곱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9:1-14 제목: 커튼 콜이 시작된지 오래입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히브리서 저자는 첫 언약 즉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성소외 지성소를 소개합니다. 그랜트 오스본 교수에 의하면 장막 성소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난 이후로 아론의 자손들이 민족의 제사장으로 섬기도록 선택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그들은 성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고, 성전을 관리하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의 일체를 지도하였다. 이 당시에 국가 전체에 약 20,000명의 제사장이 있었다. 한꺼번에 성전에서 섬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였다. 그래서 다윗의 지시에 따라 제사장 한 명당 1000명씩 구성된 24개의 집단으로 제사장들이 구분되었다. 이 24개의 각 그룹 제사장들은 해마다 2주 동안 성전에서 봉사하였다. 아침마다 제사장은 성전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였다. 차례가 된 반열에서는 성소에 들어갈 사람을 뽑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그렌트 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성서유니온, p, 213.)
오스본의 해석을 전제하면서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장막 성소는 두 개의 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24개조로 나뉜 제사장들이 2주에 걸쳐 관리하고 돌보는 성소 즉 본문에 있는 단어로 그대로 말하면 첫 장막인데 그림에서 보이는 오른쪽 공간입니다. 이 공간 즉 성소에는 7개의 촛대가 놓여 있는 등잔대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상인데 이 상은 금이 박힌 상입니다. 이 상에는 언제나 진설병을 올려 놓았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에 제사장이 들어가 12개의 구운 빵을 올려놓았던 기구입니다. 이제는 그림 왼쪽에 있는 공간 즉 지성소입니다. 본문에 있는 단어로 말씀드리면 둘째 장막입니다. 지성소는 성소와 구별된 공간인데 그 공간 구별을 휘장이 했습니다. 휘장으로 막아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지성소에는 법궤 즉 언약궤가 제단 위에 놓여 있었는데 그 법궤 안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십계명이 새겨져 있는 두 돌판이 담겨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가장 거룩한 장소로 구별된 지성소에는 영광의 빛을 발하는 그룹(천사)들이 지키고 있는 장소임을 히브리서 저자는 밝힙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지성소는 제사장들의 접근도 불허했습니다. 1년에 단 한 번만 제사장 중에 제사장인 대제사장만이 7월 10일 대속죄일에 제물로 드린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먼저는 자신의 죄를 씻는 피를 뿌리고, 이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집단적 속죄를 위한 피를 뿌리는 제사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장소가 지성소였습니다.
본문 6-7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런 엄격한 규레와 의식을 거쳐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집단적 속죄가 인정되었습니다. 1-7절까지가 바로 이 땅에 세워진 성소에서 진행되는 제사와 그 의미를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이제 오늘 설교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8-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라는 설교를 듣고 있는 수신자들과 청중들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갑자기 성령 하나님을 등장시킵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 독자들에게 말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무엇을 저자가 강조합니까? 이 땅에 세워진 보이는 장막이 있을 때까지는 앞에서 말한 제사법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적시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성소는 장막 성소가 아닙니다. 8절에 소개된 성소는 하늘 성소입니다. 장막 성소(땅위에 세워진 성소)의 유효함은 히브리서가 읽고 있는 현재까지임을 히브리서 저자가 강력하게 천명합니다. 제사장들이 행하는 일체의 제사는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9-10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제도 아래서 드려진 예물과 제물은 예식과 행위의 문제에 해당할 뿐 문제의 핵심에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본질적으로 이 제도는 철저히 재정비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차용된 제도일 뿐입니다.” 이 말을 오늘 설교 제목과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이렇게 부연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통해 진행되어온 속죄의 행위는 커튼 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라는 분명한 해석입니다. 이 말의 반대급부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커튼 콜이 시작되면 제사장이 대신해 준 속죄의 예식이 폐기된다는 말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커튼 콜이 시작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기에 이렇게 엄숙하고도 고전적인 속죄 사역이 그 끝을 알린다는 말일까요?
※ 커튼 콜이 시작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복음이라는 은혜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했던 커튼(휘장)이 어떻게 열리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44-45절을 인용합니다.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 땅 성소에서 드려야 했던 제물이 왜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까? 주님이 직접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46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드린 제사는 한시적이고, 1년에 한 번씩 지속적으로 드려야 했던 불완전한 제사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제사를 다시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님이 제물되신 사건은 영원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8:12절에서 저자는 역설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복기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께서 직접 행하신 십자가 대속의 사건은 완벽한 복음의 소식이자 은혜입니다. 이 보다 더 좋고 완벽한 복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저자는 이어지는 13-14절에서 분명히 선포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가 얼마나 위대하며 완벽한 속죄의 도구인지를 재삼 강조하고 있습니다. 후에 살피겠지만 저자는 이 완벽한 복음의 은혜를 반복하기 위해 10:10절에서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 설교문을 작성한 것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이상의 본문 해석을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작 연대를 주후 60년대 초반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기는 오늘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내용들이 정리되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중구난방으로 예수에 대한 설들이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심각한 핍박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배교의 유혹에 빠져 있었던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로드십을 전하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던 시기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주 예수께서 오셨지만 대다수의 이방 공동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커튼 콜이 반쯤 열렸다고. 하지만 세인 공동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2022년 5월 29일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미 커튼이 완전히 열린 커튼 콜 후기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계시, 자연계시적인 모든 것들이 드러난 시대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커튼이 열린 무대의 위에서 예수께서 적극적으로 말씀하시는 시대입니다. 이 엄청난 은혜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분명한 커튼 콜 후기 시대를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문제는 더 커보이는 시대라는 아픔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믿지 않는 아픔입니다.
지난 주간 우연히 제 귀에 들려온 노래입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6월 1일 제천 경제 확 바꿀 날 좀 보소.” 시장 선거에 나온 한 후보자의 유세 차량에서 들린 노래 가사입니다. 우리는 매번 선거를 치릅니다. 그리고 그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이 제시하는 공약들을 믿으라는 선전에 속수무책으로 넘어갑니다. 가짜를 진짜로 믿고 싶어하는 웃픈 심리를 갖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짜를 가짜라고 생각해 버리는 안타깝고 아쉬운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12)
이 진짜 복음의 은혜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후에 살필 히브리서 10:16-19절의 진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팀 켈러의 글을 읽다가 밑줄 그은 한 대목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나는 무조건 내 마음대로 살겠다며 대놓고 하나님께 독립을 주장한다. 반면, 종교적인 사람은 그분께 내세우는 독립이 훨씬 은근하다. 나는 성경에 순종하여 뭐든지 다 하겠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복과 행복한 삶을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전략 모두 하나님을 대적한다. 나는 순전한 은혜에 주목해야 하고 그것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 나를 구원하시고자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일에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팀 켈러, “예수 예수”, 두란노, p,170-171)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커튼 콜 이후 시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대의 정면에 서 계십니다. 주 예수께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 일하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충분합니다. 주 예수께서 주신 순전한 은혜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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