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4월 17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2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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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와 찬양 (WOR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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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읽기와 적용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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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하기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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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SUMMARY)
2022년 4월 17일 주일 설교 (부활주일 설교)
본문: 사도행전 9:17-22          제목: 바뀌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척결하기 위한 대장정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에 거의 도착할 즈음 인생 최고의 사건에 직면합니다. 부활하신 예수와의 엔카운터를 생전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이후 사울은 강렬한 빛으로 인해 비늘 같은 것이 눈을 가려 시력에 문제 생기게 됨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한 채 같이 동행했던 그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은 직가라는 동네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서 비참하게 은거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4일후에 하나님은 다메섹에 살고 있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셔서 사울을 찾아 가게 합니다. 그곳에 가서 은거하고 있는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위험인물로 정평이 나 있는 사울에게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주저하던 아나니아는 사울을 이방의 사도로 삼기 위하여 내가 택했다는 하나님의 전언을 받고 그에게 즉시 가서 안수를 하여 눈을 뜨게 합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본문은 아나니아가 다메섹 기독교 공동체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사울임에도 불구하고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해준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성령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 이후에 성령으로 충만한 인생인 바울로 바뀌게 되었음을 17-18절이 시사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다메섹에서 강렬한 빛을 봄으로 야기된 비늘 같은 것이 사울을 덮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레피데스’는 흔히 물고기 비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복수 명사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울의 눈을 물고기 비늘 같은 것들이 휘덮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울이 앞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눈을 덮고 있었던 비늘들로 인하여 전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울에게 아나니아가 다가서서 안수를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본인의 의과적인 전문성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안수 이후에 벌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적시합니다. 사울을 덮고 있었던 비늘 같은 것이 제거되어 다시 보게 되었다고, 우리나라 성경은 ‘다시’라는 부사와 ‘보게 되었다’는 동사를 분리해서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은 ‘다시 보게 되었다’는 단어가 ‘아나블레포’라는 한 단어입니다. ‘아나’라는 단어는 ‘다시’ 라는 부사의 의미가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위로, 위쪽으로’ 등의 전치사의 의미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아나’라는 단어를 전치사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본문 18절을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더니 그가 위를 보는 삶을 시작했고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 즉 사울이 위에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신학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후 18절을 기점으로 사울 인생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음을 누가는 이어지는 19-20절에서 보고합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다시 위를 보는 삶을 구가한 된 사울은 음식을 섭취하게 됩니다. 그는 육체의 힘을 재충전하고 다메섹에 있었던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동고동락했습니다. 이윽고 다메섹의 회당으로 나아갑니다. 회당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2절을 만나보십시다.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요청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회당을 맡은 장들에게 보내는 협조 공문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존재하는 기독교인들을 박멸하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회당과 회당장이 해주기를 기대하는 공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회당과 회당장은 적어도 다메섹으로 출발하기 전까지는 적절한 사울의 아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회심한 뒤 칩거를 끝내고 그가 다시 방문하기로 했던 제일의 장소가 역시 회당이었습니다. 장소는 동일했지만 방문 목적은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사울과는 정 반대의 목적이었습니다.

그토록 증오했던 다메섹의 예수주의자들을 척결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그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한 방문이었다는 점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즉 이제 사울은 회당에 있는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적군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회당에 도착하자마자 유대인들을 놀라자빠지게 할 정도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20절을 다시 복기합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하나의 회당이 아니었습니다. 각 회당이었습니다. 다메섹에 산재해 있었던 각 회당을 방문하며 사울이 전한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메시지가 유대인들을 경악하게 만든 충분한 이유를 본문 21-22절이 보고합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울은 완전한 배신자가 된 것이기에 유대인들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다메섹에서 거주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유대인들의 시선을 볼 때 사울의 행보는 점입가경이었습니다. 22절의 한 문장 때문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오늘은 2022년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 아침에 부활절에 전혀 걸맞을 것 같지 않은 본문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 2022년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울처럼 땅의 것이라는 내 이전 삶의 비늘을 벗고 위의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내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일임을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은혜를 오늘 내 삶의 영역에 적용하지 못하는 자들은 여전히 나로 하여금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세속적인 비늘들로 겹겹이 쌓여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변화되어 회당에 들어가 제일 먼저 외쳤던 선언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벼락이었고 천둥의 소리였습니다. 이 선언이 사울의 입에서 나올지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메섹으로 혈기왕성하게 올라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결박하고 척결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신념으로 무장한 사울이 바로 그의 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언할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이미 아나니아가 안수할 때 바울에게 임했던 놀라운 영적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이었습니다. 사울은 후에 바울 되도록 역동하신 압도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충만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을 경험한 사울은 음식을 먹어 강건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혹시나 그냥 스치고 지나갈 위험성이 충분한 한 구절을 집요하게 붙들어볼까 합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봅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여기에 기록된 ‘며칠’을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certain days’라고 번역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며칠’보다는 ‘숫자 개념을 달 수 없는 ’특정한 날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날들이 얼마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19절에서 암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마동안 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울이 함께 했던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제자들’입니다. ‘마쎄테스’라는 단어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흔히 이 헬라어 단어는 배우는 사람의 부류를 지칭하는 통칭이지만 적어도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차용한 ‘마쎄테스’는 순교적 자세를 갖추고 있는 자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옆에서 사울의 회심 이후를 돕고 있었던 동역자들이 사울에게 얼마만큼 엄청난 영적 도움을 주었을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때 사울은 제자들에게서 본인이 다메섹에서 만났던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부활하신 주님, 나를 다메섹에서 고꾸라뜨렸던 주님, 그 분이 바로 나의 구주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담대하게 전하는데 있어서 사울은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 전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이나 흔들림이 없었기에 훗날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6-19절입니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울은 육신적이고 다분히 세속적인 비늘을 벗은 뒤에 예수의 삶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내 중심의 삶과 시선에서 예수 중심의 시선과 삶으로 바뀌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 산하 목회자들이 용인 소재 새 에덴교회에 모여 은혜로운 동행 기도운동이라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우연히 유트브 동영상을 통해 그날 설교 강사로 섬긴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날 이 목사가 선택한 본문이 2007년 이찬수 목사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고 옥한흠 목사가 성령강림 100주년 기념 부활절 연합 예배를 통해 설교했던 요한계시록 3:1-6절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에 주시는 경고성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찬수 목사는 그날 예배 장소였던 새 에덴 교회의 으리으리한 교회 예배당을 빗대어 이 엄청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수고하며 눈물 뿌린 새 에덴교회 신자들의 그 눈물과 수고가 귀하고 귀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뒤 오늘 이런 큰 행사를 하는 장소로 귀하게 쓰임 받는 이 교회가 50년 뒤에 존재할까를 물었습니다. 혹시나 50년 뒤에 이 건물이 술집으로 바뀌어 있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대형교회와 메가 처치의 환상에서 벗어나 이제는 한국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본질적인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공교롭게 이찬수 목사가 사역하는 분당 우리 교회는 4월 10일 주일이었던 지난 주일에 10,000명 성도파송예배를 드리며 29개의 작은 교회로 분가하는 실질적인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말로만 그치는 사역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 사역과 새 에덴교회에서의 이찬수 목사 설교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작은 교회와 중소형 교회들은 이찬수 목사의 실천적 사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감사해 하는 성명서들을 내고, 한국교회 중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솔선수범해 준 분당 우리교회와 이찬수 목사에 대해 무한 감사와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불편해 하는 입장입니다. 당사자인 새 에덴교회 목사는 이찬수 목사 설교 이후,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사들의 사역과 생각이 같을 수 없으며, 목회적인 철학이 다를 수밖에 없기에 이찬수 목사의 말을 존중하지만, 불편한 일이라는 속내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영 편치 않은 감정임을 밝힌 것입니다. 일련의 일들을 접하면서 현직 목사인 저 역시 왜 소회가 없겠습니까? 저 역시, 제가 원하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육십을 넘긴 목사가 어떤 하나에 대한 날선 비판의 각을 세우고, 또 어떤 한편에 대해서는 지지의 변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정도로 그치고 싶습니다. 다만 이렇게 밝히는 담임목사의 의미를 오늘 설교와 결부하여 부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내 욕심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부활을 믿으며 사는 백성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내 눈으로 보는 시각은 영적으로 희미합니다. 수많은 세속의 이익이라는 비늘로 덮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내 눈에 끼여 있는 비늘들을 성령의 바람과 불로 제거하고 보기에 선명합니다. 후자의 삶으로 위를 바라보는 (look up)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자를 저는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루살렘의 사울이었지만 다메섹의 사울로 변화된 크리스천들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눈에 끼여 있는 세속적 가치라는 비늘들을 성령의 은혜로 제거하고 있는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십니까?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2022년 4월 15일 새벽에 말씀 묵상 읽기 담당을 맡은 박영순 집사께서 성향대로 조용히 묵상 집을 읽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렇게 문장을 읽어가던 박 집사께서 평소의 성향과 목소리 톤과는 다르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며 울음이 섞인 멘트로 계속해 이렇게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시며 온갖 고난과 멸시와 조롱당하심은 그분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온 인류에게 참된 구원을 베푸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온 몸에 채찍을 맞으시고 온갖 조롱과 멸시를 들으면서도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이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박 집사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박 집사의 울음이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악어의 눈물입니까? 성금요일 새벽, 박 집사의 심령에 압도하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 박 집사의 지정의를 만지신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고난이 1인칭 객관화의 은혜로 적용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대한 감사가 박 집사에게 눈물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고난의 은혜가 박 집사께 그렇게 전인격적인 만지심으로 왔다면 부활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박 집사의 삶을 또 변화된 삶을 살아내도록 만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은혜와 감동이 어찌 박영순 집사만의 일이겠습니까? 부활이 믿어지십니까? 은혜 이전의 삶과 은혜 이후의 삶이 동일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2022년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여러분의 눈을 덮고 있는 세속적 가치의 비늘들을 벗어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세인 공동체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