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대한민국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이필요함은 사실이다. 그 똥안 전능과 사랑의 미명하애에 하나님과 악의 관계에 대해선 논할 여지가 없었음이 고난을 통해 확연히 들어났기 때문이다.
저자 토마스 G. 롱 교수는 얼스킨 신학교로부터 시작하여 프리스턴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에모리 대학교의 첸들러 신학대학원에서 현대 설교 이론과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고통과 씨름하다’를 통하여 고난이라는 공적인 문제를 신학적 주제로 채택하여 설교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신학적인 기여가 크다고 하겠다. 이유인즉 살아있는 신학이란 현대의 문제와 소통할 뿐만 아니라 응답함을 통하여 자신의 기능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고통과 씨름하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본서의 원제는 'What shall we say?'로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과 대답의 자리로 초청한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18c에 태동된 신정론의 문제와 신정론적인 질문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현대를 살아가는 평신도 특별히 설교의 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안목과 실천을 제공하자고 한다.
저자는 처음으로 리스본에 일어난 대지진을 화두로 신정론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음을 표명한다. 특별히 이러한 경향은 18c이후 사상적으로는 계몽주의의 영향과 과학의 발달이라는 흐름으로부터 더욱더 촉진되었음을 표명한다.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의 존재와 상반되는 악의 존재를 인정함을 토대로 신정론문제에 직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계속하여 저자는 신정론 문제를 직면한 사람들이 봉착하게 되는 문제를 신정론적인 물음에 대한 문제로 발전시켜나간다. 기존의 신정론 문제가 하나님과 악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는 딜레마적인 문제였다면 신정론 물음의 문제는 선하고,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속성과 악의 존재라는 트릴레마 즉 복합적인 문제의 자리로 초청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그 동안의 노력과 발전을 토대로 문제를 직면할 뿐만 아니라 인식(이성적 작업)하고, 반응(실천적 작업)함을 통해 처절하게 싸워나갈 것을 촉구한다.
저자는 신정론 문제와 신정론적인 물음의 문제 그리고 불가능한 체스경기와 같은 단어들뿐만 아니라 점진적인 구성과 다양한 예시들을 통하여 종교철학 속의 신정론이란 딱딱한 주제를 비교적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그 동안의 논지들에 대해 최대한의 균형을 유지하며 비교적 탄탄한 기초를 제공한다. 심지어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통해 기존의 생각들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은 저자의 책임에 대한 철저한 반응이라고 생각되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종교철학적인 주제를 설교학적으로 표현하면서 발생하는 범주의 오류와 한계점은 조금 안타깝다고 하겠다. 물론 적은지면을 활용하여 신정론의 이론과 역사적인 흐름에 대해서 더욱이 악의 정의와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에는 분명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아우구스티누스를 시작으로 하여 라이프니치에 이르기까지 호교론적인 신정론의 모습과 리스본대지진 이후로 전환된 신정론적 물음에 대한 문제의 구분이 불명확하다고 받아들여진다. 이유인즉 자연재해와 인재의 구분 없이 두 가지 악의 형태를 한 가지의 고난으로 묶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파생되는 신정론과 인정론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양상을 조장한다. 이는 곧 하나님이 부당한 문제에까지 연루되는 안타까운 현상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까지 한다.
특별히 이러한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구절은 “악의 근원에 관해 어느 정도는 불가지론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표현을 들 수 있다. 그 동안 신앙을 가지고 고난을 조장하는 악을 직시하며 “Soluitur ambulando” 즉 걸으면 해결된다는 명제를 제시한 저자가 갑작스레 제동을 걸 듯이 악에 어느 정도 신비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모습은 저자의 일관성을 의문하도록 할 수 밖에 없다.
신의 존재와 악의문제에 대한 사유는 비단 우리시대만의 문제가아님을 플라톤과 티마이오스의 대화편을 통해 볼 수 있다. 티마이오스는 악의 근원에 대하여 물질을 창조한 하등신인 데미우르고스로부터 파생되었다고 정의한다. 물론 이러한 사고를 가능하도록 한 배경에는 그리스의 정치적인 상황과 신화의 발달로부터 야기된 다신론사상에서 가능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보편적인 유대 그리고 그리스도교적인 상황아래에서의 이러한 논지는 수용될 수 없었다.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각각 독특한 이론을 도출하게 된다.
먼저 유대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창조행위 침춤으로부터 우리가 이야기하는 악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 자신을 제한하게 된다. 비로소 세상은 존재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제한하는 순간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고로 세상은 깨어진 조각과 같아서 이 조각들을 모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깨어진 균열에 대한 회복으로서의 티군올람을 이야기한다. 한편 개신교 또한 우리가 말하는 악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18c이전까지 악은 주로 privatio boni즉 선의 결핍으로 설명한다. 개신교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의 이원론적인 사상을 차용하지만 이원론적인 한계를 극복하여 선의결핍으로 설명한다. 고로 선과 악은 양립이 아니라 선의 결핍만이 있다는 일원론적 이원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이 이렇게도 처절하게 악의 존재를 부정해온 이유인즉 악의 세력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로 올리지 않고자 함에 있다. 대표적으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게 된 시대가 중세 스콜라신학에 있었다. 안셀무스는 Cur Deus Homo? 즉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보상론이라는 구원의 개념을 도출한다. 특별히 그 보상(보속)의 대상이 사단 즉 악이라는 점은 하나님과 악을 동등한 자리에 올려놓는 우를 범하게 된다.
물론 후대에 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들은 이를 ‘성부만족설’로 발전시키기는 하지만 요점은 악에게 너무 많은 권한(추가로 관심)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18c신정통주의 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저서 교회교의학에서 악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이 말인즉 악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추가한다. 악이란 하나님의 왼손의 행동일 뿐만 아니라 낯선 행동이라고 말이다. 이 말인즉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고하면 할수록 오히려 악의 문제는 자신의 자리를 넘어서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으로 다가온다는 말로 요약되어진다. 더욱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제창했던 스콜라주의적인 노력에 대하여 그는 ‘유비’라는 단어를 통하여 신앙의 덕이 되는 노력으로 평가하며 그 막을 맺는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무엇을 얘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특별히 이 물음은 전능하신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더 깊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 물음은 신정론의 문제가 아닌 신정론적 물음에 대한 문제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한다. 바르트의 악에 대한 이해와 그 원리는 탁월하다고 하겠다만 우리 앞에 여전히 존재하는 악에 대해 우리는 침묵하거나 혹은 대항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폴 리꾀르는 이에 대한 좋은 견해를 제공한다. 삶 속에 많은 고통 끝에 심지어 강의 중 자신의 자녀를 잃는 고통을 느끼며 악의 문제와 소통할 수밖에 없던 그가 내린 결론은 “악은 현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말인즉 악이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현상으로는 다가올 수는 있으나 본질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악은 결국 극복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개인의 결단에 따라 악은 후에 그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는 극복되어질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신정론은 해결되어질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극복의 대상이 되었음을 위의 사실들이 입증한 바 있다. 18c이후 신정론적인 물음에 대답하는 학자들은 위와 같은 사실을 전제로 악에 대해 대답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유대인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고난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우슈비츠사건으로 자신의 두 부모를 잃은 그는 하나님의 전능과 자비에 대한 회의 끝에 전능을 포기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존재를 강력하게 피력하기 시작한다. 계속하여 그는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유대인이 학살당하는 그 가스실에서 함께 계셨음을 이야기하며 고난의 참여와 악의 극복에 대하여 지속적인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더 나아가 위르겐 몰트만은 자신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하여 성자뿐만 아니라 성부 또한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심을 피력한다. 특별히 Vinculum amoris 즉 ‘사랑의 끈’으로 이들을 묶는 성령은 삼위의 완전한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함과 동시에 우리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연대까지의 자리로 우리를 초청한다고 이야기하며 고난의 극복과 희망에 대해서 재차 이야기한다.
정리하자면 고난으로부터 악을 인식하고 고난에 참여하고자하는 저자의 모습은 참으로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악과 고난의 문제에 너무 많은 관신 뿐만 아니라 능력을 허용한 재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정론적인 물음이 우리에게 주는 이익은 크다고 하겠다. 이유인즉 필자 또한 신정론 수업 후에 갑작스레 엄습한 고난과 악의 문제 속에서 본질과 신앙의 자세를 잘 수호할 뿐만 아니라 연대하는 발전까지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신앙의 여정은 마틴 루터의 명제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도달하게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다운 생각이 있다.”
- 박모세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