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씨름하다.
- 토마스 G. 롱 지음.
201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필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통과 씨름하다”를 접하게 되었다. 사실 신정론 물음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2013년 종교철학 강의를 통해서였다. 박영범 교수에 의해 진행된 강의는 과거 신앙의 선배들이 연구해왔던 신증명에 관한 논의부터 시작하여 어거스틴의 "선의 결핍", 라이프니츠의 가장 최선으로서의 세상, 헤겔의 변증, 바르트의 "아무 것도 아닌 것", 유대 신학자였던 한스 요나스의 "침춤"과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그리고 리꾀르에 이르기까지 신정론 물음과 더불어 신정론 물음과 그 물음이 갖는 한계에 대하여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정론적인 질문이 직접적으로 필자에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2014년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2014년 2월 17일 경주 리조트 붕괴 사건 발생, 4월 7일 윤일병 구타 사망사건 발생, 4월 16일 세월호 사건 발생, 5월 2일 지하철 상왕십리역 추돌 사고 발생, 6월 22일 임병장 총기난사 사건 발생, 12월 1일 오룡호 베링해 침몰 사건 발생 등 2014년 한 해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그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필자에게 있어서 발생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함, 그리고 악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분명 필자는 종교철학의 강의를 통해 신정론 물음에 대한 질문이 사변적이고도 관념적인 논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니고 있던 앎은 실제적인 삶의 문제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필자는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사변적이고도 관념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대면하고 질문하고 있었다.
저자는 에모리 대학교의 캔들러 신학대학원에서 현대 설교 이론과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What shall we say?(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까?) 라는 함축적인 질문을 책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는 저자가 애초에 신정론의 물음을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내포한다. 오히려 저자는 “실제적으로 경험되어지는 악의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이러한 구조를 통해 전개해 나간다.
① 신정론 물음에 대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논증 소개
② 신정론 물음에 대한 대답의 한계(삶의 현장에서 가지는 한계)
③ 신정론 물음에 대한 반박과 그에 대한 대안 제시
즉, 저자는 반복적인 구조를 통해 결국 그의 주장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구조는 각 파트가 각각 하나의 설교로 읽혀지게 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게하며, 이렇게 설교해야 한다는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듯하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신정론 물음에 대한 답변은 고난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하며, 결국 신정론 물음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의 전능성, 선함, 그리고 악의 존재에 대한 트릴레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정론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명제 속에서 어느 한 가지가 포기 되거나 혹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더불어 목회자들의 신학적인 답변은(예를 들어, 고난 뒤에 오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십시오, 혹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언어적 폭력을 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 역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담론에 대하여 필자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 가지 존재한다.
① 저자는 하나님과 악을 대등한 위치에 놓아둔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빛이 어두움의 일부분만을 비추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중략)··· 악의 근원에 관해 어느 정도는 불가지론자로 남아있어야 한다.(p. 211)
저자는 바르트의 악에 대한 이해를 어느 정도 차용한 듯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악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분명 바르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강력하게 선포한다. 반면 저자는 "알 수 없는 것으로서의 악에 근원"에 관해 어느 정도는 불가지론자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악의 위치를 하나님과 거의 대등하게 두었다.
저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악의 대립을 통하여 우주적인 전쟁을 통해 결국 승리하실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에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저자는 악의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이 하실 수 있으나 하지 않으심을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오히려 악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는 불가지론자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상충하는 주장을 제시한다.
② 저자가 중간에 부록처럼 삽입한 욥기에 대한 문제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욥기 자체의 Text는 고려한 듯 보이지만 Context에 관해서는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저자는 욥기에서 드러나는 욥의 고난을 철저히 의인의 고난과 하나님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욥기라는 책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지 않았다. 필자는 욥기라는 책이 신정론의 질문을 유발하는 책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욥의 고난과 하나님은 정당한가? 라는 질문은 충분히 유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욥기가 쓰인 목적은 사실 인간이 겪은 개인적인 고난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미 고대 근동에는 욥이라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신정론에 대한 문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욥기는 고대 근동에서 이미 존재하였던 신정론 문학을 이스라엘의 신학적인 물음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욥기가 기록된 연대는 일반적으로 포로기 후기라고 추정한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 이후 기록된 책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특히 유다의 멸망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삼하 7장에 기록된 나단신탁, 이른바 다윗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주요한 신학으로 자리매김 해왔기 때문이다. 다윗의 왕조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윗의 왕조는 절대 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야훼와의 약속은 절대 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가운데에서 자라왔다. 그러나 유다가 멸망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야훼 하나님이 이방의 신에게서 패배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유대의 신학자들은 유다의 멸망에 대하여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변호는 유다에 대한 변호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변호였다. 욥기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기록된 문서였다.
그러나 저자는 Context는 무시하고 욥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통하여 자신의 논증을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3. 결론
롱 교수는 저서를 통해 신정론 물음과 그 답변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실제로 신정론 물음에 대한 문제는 사변적이고도 관념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악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동안의 신정론적인 답변 즉,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 제시된 해결책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폭력이며, 죄악이다.
저자는 분명 악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철학과 신학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 문제 속으로 직접 들어가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저술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책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가 지적한 함정에 자신이 주장한 논리도 그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결국 신정론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한다고 결론짓기 때문이다. 신정론의 문제는 결국 관념적이고 사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국에 경험되어지는 악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연 저자가 주장했던 신정론에 대한 문제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적용될 수 있는 가에 대하여서는 확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