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목양 편지를 남기는 것이 옳을 것 같아 용기를 내여 몇 자 적습니다.
평생을 통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죽음의 문턱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못난 종을 그래도 더 쓰시기 위해 기적적으로 교통사고 속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운신하기가 쉽지 않은 육체의 굴곡 속에서 고통을 경험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부족한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가? 를 깊이 사유했습니다. 그것은 두 말 할 나위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또 한 번의 은혜였습니다. 종이 유별나게 하나님께 충성을 해서도 아니요, 하나님께 성별한 삶을 살아서는 더 더욱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이 땅에 남아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코 특별히 유익이 되는 존재가 아님에도 이번에 차량이 폐차되는 극단적 사고 속에서도 종에게 다시 한 번 사역의 기회를 허락하신 은혜는 그 동안 교우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선포했던 수없이 많은 말의 언어들을 삶의 언어로 이어나가는 것을 네가 보여 주라는 채찍으로 조명하였습니다.
사고를 당하기 전, 기도원에서 한 주간 있으면서 읽었던 토마스 롱 교수의 ‘What shall we say? Evil, Suffering, and the Crisis of Faith.’ (새물결 플러스간 : 고통과 씨름하다.)의 말미에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Jean Vanier)가 쓴 ‘인간되기’에서 그가 정신병원의 소아 병동을 방문했던 힘겨운 경험을 소개하는 글이 담겨 있었습니다. 읽다가 깊은 상념에 잠긴 기억이 있습니다.
“언젠가 정신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치 그곳은 불행을 가득 쌓아 놓은 창고 같았다. 중증 장애를 가진 어린이 수백 명이 작은 간이침대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끔찍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한 명도 우는 아이가 없었다. 아무도 자기를 돌보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을 것을 그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에만 운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을 줄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은 운다는 장 바니에의 갈파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고속도로 상에서 만신창이 된 육신을 맨 처음 보았던 생면부지의 타 보험회사 레카 차 운전자가 체온이 떨어지고 있는 부족한 사람을 자기의 의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차로 옮겨 태워주고 직접 보험회사 견인차를 수배해 주고 그리하여 도착한 견인차와 119를 구급차 탑승한 뒤 실신하여 병원 응급실로 도착하여 기본 처치를 받은 뒤 눈을 뜨자 아내와 아들이 양손을 잡고 있는데 살아있다는 감동보다도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이 나를 위해 울어주고 있는 그 울음 때문에 나는 희망의 울음을 비로소 울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응급실로 달려온 교회의 지체들의 안타까움과 안도의 한 숨들이 교차되며 흘려주는 눈물이 또 다사 나에게 희망의 눈물을 흘리게 해 주는 뜨거운 액체가 되었습니다.
손을 붙들고 있는 아내가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우리 아버지를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제 어깨를 감싸 안는 아들에게 나는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더 이상 이론적 설명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병 문병을 찾아온 지체들은 목 보호대 필라델피아를 대고 있는 담임목사를 보고 또 안타까움과 이 만 함의 감사의 눈물들을 흘리는 것을 보며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제 사고 8일째, 차량을 폐차하는 중증 교통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외상이 없는 상태라 더 걱정하고 있는 지체들에게 또 한 주간 안정과 요양을 요구하는 치료의 과정에 들어가는 담임목사로서 너무나 미안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지만 마음대로 거동할 수 없는 육신의 상태이기에 또 한 주간 치료의 과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랑의 표현과 울음소리를 들어주는 그 관심에 목매인 종이 교우들에게 중보를 부탁드리며 이 번 주간 훨씬 더 좋아진 상태에서 주일에 교제할 것을 기대하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세인 지체 여러분!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을 2015년에 허락하실 하나님을 기대해 보며 한 주간 저는 병상에서 교우들을 위한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