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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서머나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2024-06-04 16:06
작성자 Level 10

오늘 수요일 7월 1일 수요 설교 원고를 사랑방에 올립니다.

조금 더 많은 지체들이 소아시아 순례에 대한 후기 식 말씀에 은혜를 공유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즈미르 즉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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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터키의 이즈미르에 있는 서머나 유적지에 남아 있는 로마 시대의 건축물인 아고라 터  

 

 

 

2015년 7월 1일 수요 기도회 예배 설교

 

 

본문: 요한계시록 2:8-11
제목: 서머나 교회의 교훈       

 

서론)

 

몇 해 전에 중국 교회의 신실한 종들이 한국교회의 승리의 비결을 배우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부흥한 교회들을 탐방하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한국 방문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지금 중국의 공산 정권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반면에 한국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귀족적인 양반 예수를 믿고 있다는 차이점을 발견하고 돌아갑니다.”
한국교회가 중국의 지하교회의 성도로부터 카운터펀치를 맞은 것입니다.
사실은 그로기상태로 몰린 것입니다.
그 중국 교회의 신실한 주의 종들이 말한 것은 우리로 보면 얼굴을 들 수 없는 창피한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들의 말이 우리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하는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본인이 쓴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살아 있는 참 교회의 첫 번째 표지가 사랑이라면 두 번째의 표지는 고난이다.”
교회가 교회인 이유는 고난이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교회를 내가 바로 이 지점에 세우겠다고 천명하셨던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단순히 멋들어진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어마어마한 도시에서 세속적 그 위용 앞에서도 나는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겠다는 분명한 로드십을 근간으로 한 고백이기에 또한 당시 유대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로마 제국주의자들의 서슬이 시퍼런 핍박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신앙고백이기에 주님이 바로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한 것은 교회는 고난이라는 기초석 위에 세워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존 스토트의 갈파는 적절합니다.
고 옥한흠 목사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책에서 아주 의미 있는 진술을 서술했습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의 특징은 조건적인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똑똑한 이성을 가지고 신앙의 선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한다. 온전한 신앙이 아닌 반쪽 신앙 밖에 되지 않는다. 자기가 어떤 선을 그어 놓는 것이다. 넘어가면 안 되는 도로의 노란 선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을 갖고 있다. 그 안에서만 믿으려고 하기에 그 선을 벗어나면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친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설교로 선포하였을 때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서울 강남의 부자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냥 자연적인 예로 웬만한 목사 이런 설교를 강단에서 강남의 한 복판에서 외치면 대부분 비토당합니다.
그래서 쫓겨나기 쉽습니다.
헌데 옥한흠 목사는 가장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가장 이 설교를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왜 그 어르신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한국교회가 그 분의 영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의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그어놓은 선이 무엇입니까?
축복은 언제든지 yes 이고 고난은 언제든지 no 라는 선입니다.
은혜는 언제든지 ok 이고 십자가는 언제든지 that’s not ok 라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yes 이고 광야는 no thanks 라는 것입니다.
아주 뚜렷한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에서 오늘 저녁에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에게 전해준 편지의 소아시아의 두 번째 수신자인 서머나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교훈은 너무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오늘 이 서머나 교회를 본문에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터키의 3대 도시라고 하면 제일 큰 도시가 이스탄불이고 두 번째 도시가 수도인 앙카라이고 세 번째 도시가 이즈미르입니다.
버스를 타고 에베소로 가다가 본 엄청난 도시가 눈에 들어왔는데 가이드는 그곳이 서머나라고 직접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오늘날도 엄청난 도시인 이즈미르임을 눈으로 보았지만 성경 당시의 서머나 역시 아주 부유했던 도시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시아의 자존심’이라고 서머나는 불렸고 당시 최고의 도시였던 에베소와는 경쟁적인 관계였기에 서머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부를 이용해서 외곽에서 도심까지 도로를 잘 닦아놓았고 천혜의 항구도시이다 보니 수출과 무역이 활발해서 소아시아 중에 가장 번성했던 부를 갖고 있었던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던 도시가 서머나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머나는 당시 지배국이었던 로마의 황제들이 극히 아끼고 탐을 내던 도시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많은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도시였기에 이 도시에 로마의 황제들은 공을 들였습니다.
특히 티베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신전을 만들어 자신을 살아 있는 신으로 경배하도록 명령했고, 종교적으로는 데아 로마(Dea Rome) 즉 로마를 인격화한 여신의 신전을 만들어 그곳에 절하게 함으로 국가에 충성하도록 하는 정책을 펴나갔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교회들이 세워진 정보를 주고 있는 사도행전도 침묵을 하고 있어서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제 3차 전도여행 초에 에베소로 가던 길에 바울이 경유하여 복음을 전했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함과 동시에 교회가 세워졌다고 보고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당시 아주 당연히 세 종류의 부류들이 묘한 긴장감을 갖고 대립하였음이 분명합니다.
① 정권을 갖고 있었던 로마 제국의 황제숭배주의자들.
② 로마의 정권에 기생하여 나름대로 자기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함께 공생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③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군으로 인정하는 크리스티아노스들
이렇게 인구분포도가 형성되었다면 마땅히 1번은 갑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2번은 기회주의자들일 것이고 3번은 을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말 할 것도 없이 서머나 교회에 살고 있었던 크리스티아노스들은 1번에 의하여 상당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로마의 권력에 기생하여 종교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 역시 서머나의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심각한 적대감을 표출하며 공격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크리스티아노스들에 의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서머나의 기독교인들은 이중의 고통과 핍박에 시달렸다는 말이 됩니다.
본문 9절을 봅시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주님의 사자가 서머나 교회의 형제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정확한 진단이지 않습니까?
서머나 교회의 지체들이 당하는 환난은 조금 전에 설명 드렸습니다.
이중적인 핍박으로 인해 가해지는 환난은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핍박과 더불어 서머나 교회의 지체들에게 임한 상대적인 박탈감은 궁핍함일 것입니다.
서머나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항구 도시였기에 무역과 상업이 활발했던 서머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아주 윤택한 복을 받은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서머나에 살고 있었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유대인들을 포함)들에게 막대한 혜택을 주었습니다.
지배당하는 계층으로 각종 부담해야 할 세금들을 면세 받은 혜택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부유했습니다.
정치적인 주체였던 로마 사람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부유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민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은 부유층이 누릴 부를 위해 항상 희생을 당하는 계층이었습니다.
또 다른 접근을 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인지를 알게 해주었고 적어도 그들은 정직한 삶, 남을 돕는 구체의 삶 등등을 통해 항상 넉넉하지 않은 궁핍함을 당당하게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에 불편하게 사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사도 요한에게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
‘십 일 동안(길지 않을 것이라는 상징적인 표현) 환난을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렇게 고난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왜 제가 설교의 서두에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냈는지 이해가 되셨습니까?
서머나 교회는 이렇게 고난을 당한 끝에 탄생했고 또 그렇게 교회다운 교회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서머나 교회를 만나면서 우리 세인 교회의 지체들이 받아야 할 은혜와 영적인 되새김질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내가 그어놓은 내 신앙의 잣대는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직시하라는 교훈입니다.

 

에둘러 교훈을 문장화시켰지만 이 교훈을 단도직입적으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도를 추구하는 교회와 성도라면 풍요함의 신앙을 추구하려는 불신앙에서 벗어나 고난 속에서 진정으로 주시는 정금 같은 주님의 복을 추구하라는 교훈입니다.
저는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은혜 중에 짜릿함을 느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9절 전반절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기막힌 반전이 아닙니까?
서머나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서머나 교회의 지체들이 당하고 있는 아픔들, 고난들, 핍박들을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가난함과 물질적인 곤고함도 잘 알고 있단다. 그런데 이것을 명심해라 내가 알고 있기에 너희들을 결단코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반드시 책임질 것이다. 이런 면에서 너희들은 진짜로 부요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들 중에 대부분은 주님이 하신 이 격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피부로 그 격려가 와 닿지 않는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래서 내가 그어놓은 선에서 한 발자국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오늘 선언하고 있는 주님이 부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동산과 부동산이 흔들리지 않을 때만 안심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내가 그어 놓은 선을 절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현대 크리스천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자들의 자화상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다가 아주 의미 있는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31절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오늘을 사는 많은 이기적 그리스도인들이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품에 깊이 잠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는 그 분이 나를 사사건건 간섭하실까봐 그것이 부담이 된다고 믿기에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저도 거듭나기 전에는 이런 형편없는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그 반대편을 우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에서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것에 대해서는 무방비입니다.
아니 이것은 도리어 편하게 받아들입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불편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든지 이렇게 돌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떻게요?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을 한계에 도달했을 때, 예수께 그것들을 해결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몰려도 한 가지는 불변합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나의 문제의 해결만 해 주시고 나의 선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의 최대의 적은 사탄이 아니라 거리감을 두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불신앙”이라고 마크 뷰캐넌 목사는 자신의 책 ‘열렬함’에서 갈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를 통해 꼭 기억해야 은혜는 이것입니다.
내가 그어놓은 신앙의 선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선인을 명심하고 그 선을 삭제하기입니다.

 

2)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을 다시 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서머나 교회의 지체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이겨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결과가 해피엔딩입니다.
결과는 해피엔딩인데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충성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겨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해야 하는 과정입니다.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대전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그어놓으신 선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선을 허물어야 합니다.
근래 들어 요한복음 6장은 참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가적을 베푸신 주님은 그곳에서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감지하시고 가버나움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벳세다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도보로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따라갑니다.
기적과 표적 즉 또 다른 오병이어를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복음 6:34절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이 말을 듣고 나신 주님은 가버나움을 몰려온 무리들의 사악함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 6:48-5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에둘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줄 떡은 바로 나다. 너희들이 나로 만족하겠는가?”입니다.
이렇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기적과 표적과 떡이 아닌 주님 당신을 받으라고 말하자 무리들이 주님을 다시는 따르지 않았다고 요한은 보고합니다.
요한복음 6:66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조정민 목사가 쓴 ‘땅의 시간, 하늘의 시간’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시간표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란다. 자기 시간표대로 응답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달라고 조른다. 그어나 주님은 인간의 시간에 맞추어 일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의 시간표대로 따라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100% 동의합니다.
오늘의 저의 설교 문안이 조정민 목사의 글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어 놓으신 선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러려면 잔 머리를 굴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어놓은 선을 과감하게 지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간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내 스케줄에 맞추어 예수님이 시간을 맞추어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교회는 여러분의 비위를 맞추어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여러분과 같은 존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여러분의 세속적인 기분에 만족을 주기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성도가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지 주님이 여러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다.
아이든 토저는 ‘세상에 무릎을 꿇지 말라’ 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놀라운 사랑!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시다니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나는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머리가 되신 분 안에서 내가 살아 있습니다. 이제 거룩한 옷을 입고 담대히 영원한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나의 구주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면류관을 취합니다.”
기억하십시다.
내가 보좌를 나아가는 것이 이기는 신앙인의 모습임을.
내 선을 지워버리기 위해 나의 영적 키보드 판에서 delete 키를 누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선으로 건너오십시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둘째 사망의 늪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랑의 교회 수양관에서 무척이나 신기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묘가 있는 곳을 산책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 새까맣게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떼를 보았습니다.
어림잡아 억 만 마리 정도는 될 것 같은 엄청난 개미 떼였습니다.
그들의 이동 모습이 너무나 장관이라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그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개미떼의 모습이 너무나 장관이라 내가 나도 개미가 되고 싶다.”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도 개미보다는 인간이 낫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미가 되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당신의 선을 지우시고 우리들의 선으로 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들이 나의 못난 자아의 선을 지워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이라는 선으로 건너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됩니다.
지혜로운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문숙 15-07-02 06:24
하나님의 절대적 시간표로 고정하고
 내 선을 가감히 삭제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주를 위해 불편함도 감수하고  이를 극복하고 나아갈때.
우리의 편에 계시는 주님의 일하심을 온전히 느끼기를
소망합니다.

이강덕 15-07-02 22:20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쪽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러나 종은 그냥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이니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내 선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선으로 들어서는 것은 우리 세인의 숙제요 사명이요 또 행하여야 할 마지막 때의 선택입니다. 상투적인 신앙의 방향성이 아닌 서머나 교회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부담감이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좋은 밤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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