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뒤뜰에 나가보았다. 예전 같으면 잡풀로 가득해 풀 뽑기를 해야 하는 시기이지만, 작년에 인조잔디 작업을 한 뒤라, 잡풀 제거라는 공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뒤뜰이 되어, 지금은 풍성히 자라고 있는 포도나무와 이제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6월 장미만이 자태를 뽐낼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만조만한 것들은 손을 보아야 하겠기에 정리할 셈으로 뒤뜰에 나갔다가 왠지 모를 숙연한 광경을 보았다. 인조 잔디 작업을 할 때 조각조각 작업을 했기에 부분, 부분 어쩔 수 없이 약간의 틈새들이 생겼다. 헌데 그 틈새를 공략하여 들풀들이 자라고 있는 숙연한 광경이었다. 원래 들풀과 잡풀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 광경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어 휴대폰 카메라로 담았다. 분명 뭔가 주는 메시지가 있어 흔적을 남길 양 그렇게 했다. 김수영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100%, 아니, 1,000% 동의한다. 교회 뒤 정원 인조 잔디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풀을 보면서 왜 그런지 거룩함을 느낀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어떤 이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러려면 그러라지 뭐, 시크하고 도도하게 그 생명을 유지한 풀을 보며 왠지 경외심마저 든다. ‘나’라는 존재와 ‘너’라는 존재가 ‘그것’으로 치부될 때 인생은 삭막해진다. 슬퍼진다. 외로워진다. 하지만 ‘그것’을 나와의 관계로 인격화 시킬 때, ‘나’는 물론 ‘그것’마저도 아름다워진다고 부버(Buber)는 일침(一針)했다. 목사로 살면서 누군가를 존중하며 살았는지, 타인이 무시하는 대상을 나도 모르게 나 또한 무시하며 산 공범자가 바로 나는 아니었는지 돌아본다.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인조잔디 틈새를 뚫고 의연하게 자라나 본인의 생명의 의지를 뽐낸 풀을 보면서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기회로 삼아보았다. 작은 것을, 하찮은 것을, 보잘 것 없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삶으로 남은 삶을 메워 가보련다. 글을 쓰는 시간, 교회 근처에 자리 잡은 제천여고에서 실시하는 운동회에 참여한 여고생들의 아우성들이 너무 아름답게 들린다. 3년이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일상을 향해 도전하며 포효하는 함성이라 그런지 여고생들의 조잘조잘 댐이 싱그럽게 들린다. 그래서 그랬나보다. 생물학자 최재천이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고 말한 것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