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천천히 아침부터 열일을 했다. 아들에게 넘겨줄 책을 박스에 담는 일을. 지난 주간, 아내가 신혼부부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살림살이들을 사들였다. 더불어 여러 밑반찬, 부식 재료들을 조금조금 준비했다. 주초에 아들과 며느리가 신접살림을 해야 하는 집에 다녀왔다. 준비한 물건들을 아들 집에 내려놓는 데 이삿짐을 나르는 줄 알았다. 가난한 전도사이기에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는 아내 성화가 그렇게 살림살이들을 마련한 동기였다. 내가 전도사 시절에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 비하며 아들 내외는 구중궁궐에 살 건만, 아내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였나 보다. 처음 방문한 아들 집, 서재에 들어갔더니 신학 공부 십 수 년을 한 놈치고 책장에 놓여 있는 책들이 너무 허접해 마음이 쓰인다. 더군다나 변변한 주석이 하나 없는 걸 보며 더 더욱 애잔하다. 논문 작성 학기라 제천에 내려와 필요하다고 가져간 부분 주석과 단행본으로 채워져 있는 빈곤하기 짝이 없는 서재를 보고 결혼 기념으로 주석을 한 질 사 줄까 생각했던 마음을 바꾸었다. 도리어 이제 목회의 마지막 필드에 들어선 애비가 애지중지하며 공부하던 손때 묻은 주석을 주는 게 낫겠다 싶어 집에 돌아와 정말 아끼는 주석 WBC 를 박스에 담았다. WBC 주석 자체가 방대하기에 가격도 만만하지 않고, 교육 전도사가 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마음먹고 박스에 책을 담는데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아내가 지천명 기념으로 사 준 의미 있는 책이고, 허접하기 그지없고 무식 그 자체인 나를 몰아치며 공부하게 해 준 주석이기에 박스에 담으면서 아들도 그렇게 지성적 영성으로 무장하는 목회자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화살기도 했다. 이제부터 천천히 책들을 줄여가야겠다. 욕심 내지 말고. 가능하면 아들이 애비의 책들을 소유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그렇게 해 줄지는 미지수이기에 그냥 희망사항으로 남겨두려 한다. WBC 주석이 차지하고 있었던 서고가 휑하다. 책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박스에 주석을 쌓는 내 모습을 본 아내는 평소에 책 마귀가 쓰였다고 쓴 소리도하고, 그렇게 좋으면 책하고 결혼하지 왜 나하고 결혼했느냐고 놀리더니 오늘은 왠지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