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포기할 걸 포기해야지2024-03-08 17:24
작성자 Level 10

2022년 12월 7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여든 한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24:1-9

제목포기할 걸 포기해야지

 

세간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고집이 센 사람대화가 안 되는 사람배타성이 강한 사람 등등으로 정의하며 공격합니다.

목사로 사역하는 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있다는 것을 지적 받으면 함구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아무리 그래도 양보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사라가 세상을 떠난 나이가 127세였으니까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입니다.

창세기 25:7절에 의거하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고, 25:20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한 나이가 40세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배경이 된 아브라함의 나이는 사라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시기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팁은 오늘 본문 배경의 시기를 기점으로 아브라함은 앞으로도 35년을 더 살았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 1절에서 창세기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이런 여운을 남깁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내 사라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크게 어긋나지 않았음을 강하게 피력해 주는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는 날 동안 그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실천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기자가 본문에서 앞으로 살 수명이 35년이나 남아 있는 아브라함이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기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아브라함의 시대는 저물고이삭의 시대가 도래(到來)했음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전망해 봅니다.

24장의 메시지는 이삭의 아내를 구해 오는 장면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본문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아브라함이 늙은 종을 부릅니다.

아마도 엘리에셀로 추측되는 종입니다.

종을 부른 아브라함은 그에게 중요한 하명을 내립니다.

본문 2-4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하인에게 가나안에서 아들의 배우자를 찾지 말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가서 며느릿감을 구해 올 것을 비장하게 하명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해석할 것은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으라는 문장의 의미입니다.

허벅지로 번역된 야레크의 문자적인 의미는 넓적다리를 의미하지만 속내의 의미는 사타구니 혹은 남자의 성기 밑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24:2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집 안 일을 도맡아 보는 늙은 심복에게 분부하였다너는 내 사타구니에 손을 넣고

이렇게 한 이유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중요한 약속을 맺을 때 흔히 쓰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부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가나안은 안 되고밧단 아람 즉 갈대아 지역의 여자여야만 했는가에 대한 이해입니다.

송병현 교수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씨가 가나안 사람의 씨와 섞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9:25-27에 의하면 함족의 후손이었던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저주를 받은 자들이었다또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15:16) 그러므로 만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피를 섞는다면 문제는 그만큼 복잡해지는 것이다게다가 자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셈족의 자손이었다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셈족에게서 이삭의 아내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p,417.)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하명을 받은 늙은 종은 주인에게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하여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본문 5절입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충분히 종의 입장에서는 되물을 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장소인 밧단 아람에 가는 것도 두려운 일이었지만혹여나 처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녀가 멀고 먼 가나안을 향하여 오겠는가에 대한 자신감이 종에게 있을 리 만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다시 종에게 강하게 하명한 내용이 본문 6-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절대로 안 된다는 단호함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이삭을 갈대아 우르를 데리고 가서 얼굴을 보이면 그 준수함 때문에 따라올 처자가 있지 않겠느냐는 종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아브라함만이 갖고 있었던 믿음의 정수를 바로 이 대목에서 보여 줍니다.

나를 갈대아 우르에서 구별하여 그곳을 떠나게 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너보다 천사를 먼저 갈대아 우르로 보내 반드시 따라올 처자를 예비해 놓으셨을 것이라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기시킵니다.

며느릿감으로 따라올 처자가 있다고 아브라함이 확신한 또 하나의 이유는 본인에게 네 씨를 통하여 창대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바로 여기 이 구절에서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에 찬 주인의 믿음을 보았던 종은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

같은 믿음을 갖고 주인이 하명한 미션을 감당하겠다는 종의 결연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해입니다.

다시 복기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비장함입니다.

종에게 내 환도 뼈에 손을 넣으라는 종용아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로 가지 말라는 단호함하나님께서 며느릿감으로 예비해 놓은 처자가 있을 것이라는 토로에서 아브라함의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어떤 비장함입니까?

 

※ 하나님의 선()을 긋고 지키겠다는 각오입니다.

 

이 신앙의 걸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보입니다.

창세기 12:1-3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75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내용입니다.

창세기 17:3-8절입니다.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9세가 된 아브라함에 오셔서 다시 한 번 이미 주셨던 약속을 확인해 주신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22:17-18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에 통과한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재확인하신 언약 실행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적어도 이런 일련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이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절정이 오늘 며느릿감을 구해 오라는 종에게 내린 하명에서 완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코 다른 씨와 혼합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더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지조를 지킨 것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한 시기가 주전 586년입니다.

이렇게 멸망을 당한 유다 백성들 중에 상당수가 바벨론으로 끌려가 식민 백성으로 볼모가 되어 치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 주전 538년에 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바사시대가 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바벨론을 점령하고 새로운 제국의 패권자가 된 고레스(정확하게는 고레스 2)는 포로로 끌려와 있는 유다 백성들 중에 자원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어 예루살렘 귀환할 수 있는 혜택을 줍니다.

이런 유화정책으로 인해 나라가 멸망한지 58년 만에 세스바살스룹바벨예수아라는 지도자 그룹의 인도 하에 42,360명의 일반인과 7,337명의 종들까지 포함하여 총 49,697명이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시행한 일들은 제 2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중간에 여러 가지 일로 성전 건축이 중단이 되기는 했지만 정말로 우여곡절 끝에 주전 516년에 제 성전이라고 하는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여 봉헌하는 감격을 맛봅니다.

문제는 성전 재건 이후돌아왔던 제 1차 포로귀환자들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유다가 패망했던 당시에 벌였던 영적 붕괴를 다시 경험하고 하나님의 신앙에서 떠나 자기 멋대로 랜덤의 삶을 또 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선조들이 자행했던 죄악으로 다시 회귀한 것입니다.

귀환 공동체의 영적 상태는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또 다시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였습니다.

에스라를 제 2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로 삼아 남자 1,500레위인 38그리고 돕는 조력자 220명 등 총 1,758명을 인솔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합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이스라엘 공동체는 영적으로 무너질 대로 무너져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를 모르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치명적인 죄는 지도급에 있는 자들이 뜻을 모아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들임으로 혼합적인 죄를 범하고 있었다는 참담함이었습니다.

마치 솔로몬 이후 남북 분열왕국 시대에 자행되어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바로 그 범죄를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가 다시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보았던 에스라의 반응을 기록한 에스라 9:3-6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분노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분노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잘못된 일을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했습니다.

에스라 10:1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에스라의 영적인 행보는 무감각해 있던 공동체의 무리들을 깨우기 시작한 촉수로 작용하여 본인들의 잘못을 인지하게 한 동기로 작용합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적 분위기가 다시 올바른 하나님 신앙으로 바뀌고 있음을 직시하고 단호한 선언을 내립니다.

한 구절만 더 읽겠습니다.

에스라 10:8-11절입니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들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무엇이 보입니까?

타협하지 않는 에스라의 단호함이 보입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보입니다.

적지 않은 반대(에스라 10:15)가 있었지만 에스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기회주의혼합주의세속주의 척결과 맞섰고 결국 이방 여자들을 다 내쫓는 영적 순결 찾기 싸움에서 승리하였음을 에스라 10장이 보고합니다.

영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순교적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오늘입니다.

수많은 타협과 물 타기를 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보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타협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긋고 그 선 안에 서겠다는 영적인 호기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자신앙인의 기개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여인이 아니라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여인을 며느릿감으로 삼겠다는 것에스라가 이방여인을 며느리로 들인 것을 회개하고 척결하라고 명령한 것은 타협의 내용이 될 수 없는 신앙인들의 마지노선 긋기입니다.

 

(영상 하나 시청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송태근 목사가 옥한흠 목사에게 질문한 내용 영상 시청)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길을 똑바로 내기 위해 저는 안이한 설교와 타협하지 않고교우들은 그 선에서 이탈하지 않는 순결하고 성결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