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일흔 아홉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22:20-24 제목: 암시 창세기 11:27-32절을 읽겠습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이제 오늘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이 구절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할 수 있는 내용은 데라의 둘째 아들이었던 나홀의 아내가 밀가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데라의 족보는 아주 단순하게 데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오늘 본문인 창세기 22:20-24절은 둘째 아들 나홀과 밀가 사이에 탄생한 아들들의 족보가 대단히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홀의 계보로 등장한 인물이 총 12명입니다. 먼저 본처인 밀가의 소생들입니다. 나홀-우스-부스-그무엘-게셋-하소-빌다스-이들랍-브두엘입니다. 두 번째로 처첩이었던 르우마의 소생들입니다. 데바-가함-다하스-마아가입니다. 그렇다면 나홀의 자식들은 총 12명이 됩니다. 그 동안 창세기 기자의 족보 열거는 10대 기록이었던 반면, 여기에 기록된 나홀의 계보부터 철저하게 12대 손까지 기록한 것을 보면서 무슨 암시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어떤 암시일까요? 앞으로 펼쳐질 족장의 역사가 12지파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러나 이 암시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본문을 동해 암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밀가가 낳은 아들 들 중에 막내아들인 브두엘의 등장입니다. 본문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대체적으로 보편적인 이스라엘 가족 공동체는 철저하게 장자 중심주의로 가족사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23절은 앞에 있는 7명의 형들의 가족사는 배제하고 막내인 브두엘의 가족사만 정중앙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렇게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스라엘 가족사가 아닌 예외적인 브두엘의 가족사 등장을 보면서 또 다른 암시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장자중심적인 관점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차자 중심이거나 막내 중심으로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시를 알게 해 줍니다. 아시는 것처럼 족장 이삭의 역사부터가 그렇습니다. 장자 에서가 아니라 차자 야곱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장자 므낫세가 아니라 차자 에브라임이 그렇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아니라 막내 다윗이 그렇습니다. 물론 족장의 역사는 아니지만 가인과 아벨의 역사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면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나쁜 짓을 한 인물은 둘째 아들인데, 큰아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 집에 있는 탕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자 중심이 아닌 차자 혹은 막내 중심의 역사 펼치기라는 아이러니가 성경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아해집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 역사 전개는 이러했습니다. 이것을 전제하면서 오늘 본문도 이해해야 합니다. 왜 막내 브두엘이 무대 정 중앙에 섰을까? 조금은 궁색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기 때문에 가타부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브두엘이 무대에 올라온 일은 무언가를 암시해 주는 메시지이기에 조금은 선명하게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브가 때문입니다. 브두엘이 낳은 딸입니다. 그렇습니다. 브두엘이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족장 역사의 무대 정중앙으로 올라서게 한 창세기 기자의 의도는 브두엘 때문이 아니라 리브가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 수요일에 살피게 될 23장은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죽음이 기록된 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 1대 족장 역사의 주인공인 사라의 퇴장과 아브라함의 퇴장을 앞두고 제 2대 족장 역사의 주인공인 이삭과 리브가의 등장을 예고하며 암시하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브두엘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본문 창세기 22:20-24절의 암시는 리브가 등장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가 선택되는 장면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복기하겠지만 아브라함이 엘리에셀로 추측되는 늙은 종에게 며느리를 구해 오라는 미션을 주었을 때 던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창세기 24:3-4절에서 만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의 비장함은 결코 내 아들의 아내를 가나안 출신의 여인이 아닌 자기 고향에 있는 여인으로 삼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비장함을 전제로 선택된 여인이 바로 리브가였습니다. 우리는 리브가의 등장과 선택이 암시하는 본문 기록을 통해 중요한 레마를 찾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은혜로 이루신다는 교훈입니다. 본문과 24장에서 만났고 만나게 될 리브가는 단순히 개인 리브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속사의 주연으로 삼으신 은혜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고 주목하고 싶은 것은 리브가의 선택은 리브가의 믿음 때문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설명 가능한 리브가가 선택된 근거는 매우 궁색해 보일 정도로 없습니다. 그러기에 리브가 담론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텍스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리브가에게 얽혀 있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녀가 밧단 아람 출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고향 사람이었고, 그의 친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혈통주의를 중요하게 여겼고, 이방 민족과의 잡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아브라함의 고집으로 선택된 자가 리브가입니다. 성경의 내증은 딱히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로 선택되었다는 신앙적 이유와 그 증언들을 보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의 선택이라는 화두는 리브가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나, 혹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 설명이 대단히 빈약하거나 인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리브가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해석의 대단히 중요한 단서이자 실마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도구들은 조건이 아닌 은혜로 주어집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리브가가 선택된 것은 영적인 자격이 아닌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후에 살피겠지만 도리어 그녀는 밧단 아람이라는 지역에서 섬기던 우상의 영향력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야곱이 아내들과 자식을 데리고 밧단 아람에서 탈출할 때, 라헬이 숨겨 가지고 나온 드라빔 우상이 그 증거입니다. 창세기 31:30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밧단 아람에 만연해 있었던 드라빔 우상에 빠져 있었던 자는 단순히 야곱의 아내들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라반도, 리브가도 매일반이었을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떤 측면에서 보면 리브가는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야웨 하나님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교도적인 입장에 있었던 여인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구속사의 도구로 선택되었습니다. 어떤 설명이 가능합니까? 전적인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를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영적 사정권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영적 사정권 밖에 있었다면 리브가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껴갔을 것입니다. 이 해석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주 가끔 소개하는 백부장의 믿음 텍스트를 참고해 보십시다. 누가복음 7:10절을 보십시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신 예수께서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맞게 되었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로마 출신의 군대 장교인 백부장이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유대인 장로 친구들을 예수께로 보냈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찾아간 이유는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된 중병 때문이었고 그 하인을 고쳐달라고 청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 친구들은 예수께 가서 백부장의 선한 일을 늘어놓습니다. 회당을 지어주었고, 유대인들을 많이 사랑하는 자임을 토로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고로 백부장의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신 뒤에 이동하는 어간, 예수님의 이동을 들은 백부장이 다시 벗들을 보내 예수님이 집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하시지 말고 그 자리에서 말씀만 해주셔도 된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감격하셔서 그 자리에서 하인의 질병 치유를 선언하셨고 그 이후의 결과를 보고한 것이 바로 읽어드린 누가복음 7:10절입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놀라운 사실에 진입하십시다. 백부장도, 병들어 있는 하인도 예수님의 얼굴을 알지도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던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동시에 공급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하인입니다. 정말로 이 하인은 은혜의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닙니까? 신분상 물건 취급을 받았던 자가 하인입니다. 그런데 이 하인은 주인이 가진 따뜻한 사랑이라는 은혜를 받았고, 동시에 전혀 알지도 못했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상하지 못한 은혜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진면교사를 삼습니다. 그가 섬기던 주인 즉 백부장이 갖고 있었던 선한 영향력과 파송되어 온 유대 땅에서 믿는 유대인들의 신앙인 하나님 신앙의 영향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구속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적 사정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하나님 신앙을 겸비한 동역자들의 기도의 사정권 안에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동선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은혜로 살아가는 동역자들의 기도 사정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담임목사와 교회 공동체가 중보 하는 사정권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속사의 주인공 반열에 들어설 리브가 등장이라는 암시가 담겨 있는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당신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사정권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시작 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 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 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은혜로다 주의 은혜 변함없는 신실하신 주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