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11:3-12:26
제목: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서론)
“하나님은 인간을 좇으신다. 이것이 성경적 신앙의 역설이다. 마치 하나님이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인간을 선택하여 당신을 섬기게끔 하신 것 같다. 우리가 그분을 찾음은 인간의 일만이 아니고 그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홀로 인간이 해내야 하는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열망 속에 그분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에 묘사된 인류의 역사는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신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사람을 찾는 하나님”, 한국기독교연구소, 174쪽)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기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믿음의 객체를 찾는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천(一賤)했던 신학적 지식에서 깨어나 조금씩 신학의 내공이 깊어지면서 동시에 계속 공부하면서 깨달은 성서의 신비 중의 하나가 바로 주군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신다는 신학적 명제였습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내가 선택한 기독교 신앙의 정수로 인해 감격해했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공동 번역으로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오늘은 2023년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대림절이 되면 공교회에서 성서 일과로 많이 읽고 다루는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성서적 근거가 되는 이 구절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 그 자체이셨던 예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대표적 성구입니다.
독일 출신의 희망의 신학자라고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은 그의 걸작인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미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아들이 고난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아버지는 그와 함께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아들과 같은 방법으로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중략)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210-212쪽)
이렇게 말하면 우리들이 적용하는 공식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하지만 몰트만의 신학적인 이해는 그렇게 좁은 이해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었다는 적극적 神(하나님) 죽음의 해석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실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직접 찾아오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중요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종교도 믿음의 주체가 믿음의 객체를 찾아온 종교는 없습니다.
기독교만이 유일하고 독특한 신이 사람을 직접 찾는다는 은혜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사회면 톱뉴스 중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자승이 사망했음을 여론이 보도했습니다.
불교의 대표적 사판승이었던 자승이 자신이 칩거하던 사찰에서 직접 방화를 했고, 그 안에 있었던 승려 자승이 스스로 소신공양을 했다는 뉴스였습니다.
진의야 어떻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적인 구도의 길이 참 대단하다는 소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불태우면서까지 자신이 믿는 종교적 구도의 목적을 이루려는 시도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위 고등종교라는 분야에서 흔히 회자 되는 명제를 증명해 낸 것입니다.
“사람이 신을 찾는다. (Man search for God.)”
이 행위도 자신이 확신하는 종교적 확신이 없으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엄청난 종교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제 성찰은 바로 이 대목에서 더 큰 감동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자승은 자신이 직접 행위로 구도의 대상이 원하는 것을 실천했지만, 내가 믿는 주군은 주군께서 직접 구도의 완성을 위해 사람에게 오셨다는 이 엄청난 은혜와 감동 때문에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습니다.
주군이신 하나님은 직접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이 인간을 찾는다. (God search for man.)”의 증명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요체이지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 설정을 하는 데에 적지 않게 고민했습니다.
본문의 맥을 잇기 위해서는 오늘 제시한 전 구절을 잇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너무 긴 절수이기에 부분적으로 자르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긴 절수 전체를 본문으로 제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빨리 본문 해석을 마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오늘 본문의 절수는 대단히 길지만 교우들에게 지루함을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줄여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주일에 성벽을 건축한 후, 그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할 사람들이 필요했기에, 당시 정치적,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황폐한 예루살렘 성읍에 기거하려는 거민들이 지지부진한 것을 알고 있었던 느헤미야 총독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예루살렘 거주민을 확정하는 정책을 폈음을 살폈습니다.
군사적인 필수 요원이 필요했던 예루살렘이었기에 군사적인 지도자들은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상주하도록 명했고, 여타 유다의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던 인구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1/10의 인구를 제비뽑기로 선출하여 이주하게 했음도 나누었습니다.
더불어 제비뽑기에서 선택되지 않았지만, 기꺼이 예루살렘 성읍에 자원하여 거주하겠다던 대견한 백성들도 있었음을 지난주에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한 사람들의 면면을 장황하지만 의도를 갖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10가지의 내용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⓵ 11:4-9절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로 한 지방 가문의 지도자 즉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지도자들을 소개합니다.
⓶ 10-14절은 예루살렘에 거주한 제사장 가문을 소개합니다.
⓷ 15-18절은 레위 가문들입니다.
⓸ 19-24절은 기타 봉사자 가문으로 성문 지기, 성전 봉사자, 노래하는 성가대원들입니다.
⓹ 25-36절은 마을과 주변 동네에 거주하는 백성들의 목록을 소개합니다.
⓺ 12:1-7절은 스룹바벨 시대의 제사장들을 알려줍니다.
⓻ 8-9절은 스룹바벨 시대 레위인의 목록입니다.
⓼ 10-11절은 대제사장 6명을 소개합니다.
⓽ 12-21절은 대제사장 요아김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⓾ 22-26절은 엘리아십, 요야다 및 요나단 시절의 레위인 가문의 우두머리들을 알려줍니다.
자, 여기까지 정말 재미없는 족보와 이름들을 열거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이들의 이름들 열거를 들으면서 도대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더 심각한 것은 지금 저들의 족보와 이름들 열거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지!라고 반문하며 마음속으로 짜증을 내는 교우들도 있을 줄 압니다.
설교하고 있는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해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과 족보에 대한 세밀한 해석은 포기하고 차치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주석서에 기록된 숨은 의도가 본문 정황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에 대한 해석의 진도도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이 정도로 마감하려고 합니다.
다만 느헤미야기 구약 정경 안에 들어 있는 오늘 본문이 주는 레마는 그래도 찾아야 할 것 같아 본문이 주는 영적 시사점 즉 레마에 대한 접근을 하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실시하던 구약 톺아보기 챕터 중에 담임목사가 맡았던 주제는 역대기 역사서와 신명기 역사서에 대한 비교 이해였기에 심도 있게 성경 안에 있는 두 역사서에 대해 상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중에 역대기 역사서를 연구할 때 그 목록 안에 해당하는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기에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온 이스라엘 귀환공동체가 시급히 재정비해야 했던 것은 이스라엘의 신앙적 정체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정체성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 데 하나는 “이스라엘은 누구인가?”라는 테제와 “이스라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들은 전자(이스라엘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혈통에 대한 순수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이스라엘 순수 혈통에 대한 증거인 족보 찾기에 최선을 다하는 문서를 작성하려고 했음을 밝혔습니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 바로 역대상, 역대하,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기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스라엘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이스라엘은 정치적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라는 명징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최선을 다해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 다윗 왕조에 대한 회복이었고, 그래서 역대기 역사서의 주인공은 다윗으로 점철되어 있음도 밝혔습니다.
이런 역사 신학적인 의도가 그 배경에 있는 역사서가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느헤미야기이기에 역시 포로 귀환공동체 중에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또 거주하려는 사람들의 이름을 철저히 공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역대기 역사서의 정점에 있는 본문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또 거주하게 될 포로 귀환공동체 사람들의 면면을 느헤미야기 기자가 세밀할 정도로 밝힌 것에서 찾아내야 할 영적 시사점은 무엇일까요?
※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찾고 계신다는 교훈입니다.
이 레마를 오늘의 설교 제목으로 이렇게 환언(換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아오시고 또 찾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장에서는 예루살렘에 이주해 온 각 지파의 후손 중에 중요했던 역할을 행한 유다 지파 사람들이 468명,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928명, 제사장들은 1,192명, 레위인 284명, 문지기 172명 등 총 3,044명이라고 보고합니다.
또한 12장에서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스룹바벨 시대부터 이어져 온 6명 제사장들의 족보로 제시된 인구는 1,192명이고, 문지기들의 수도 172명임을 밝힙니다.
외에도 24그룹의 제사장들도 소개하고 있고, 여타 소개된 사람들의 총수까지 대단히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이런 의도들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혹은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등등의 대답을 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 이면에 담겨 있는 신학적 함의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들을 주목하고 계심을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를 느헤미야 역사서 기자가 제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주하고 있었던 75세 되던 어느 날에 하나님이 그에게 오셨습니다.
오셔서 그에게 고향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상수리 수풀 근처인 헤브론에 살고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창 15장)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던 해에 그를 다시 찾아오셔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시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창 17장)
이윽고 창세기 18장을 보면 마므레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브라함은 물론 사라에게도 내년 이 맘 때 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고지해 줍니다.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브엘세바에 거주하던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창 22장)
이해되지 않는 명령을 내린 주님의 말대로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모리아 산의 제단에서 이삭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5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은 다시 또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일대기에 있었던 일 중에 두드러지게 주목할 것이 보여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의 내용을 열거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아브라함을 찾은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앞에서 소개한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그분을 찾아가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분을 찾아내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놀람뿐이었고,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깨달을 준비를 갖추는 일이었다.” (위의 책, 186쪽)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일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일도 놀라운 일입니다.
전혀 내 힘으로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 0%인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프랜시스 톰슨이 쓴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가 있습니다.
긴 장편의 시인데 중간 부분을 발췌하여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공로가 있어야 받느니라, 너는 무슨 공로가 있느냐? 엉긴 흙덩이 같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어리인 네가? 오호라 너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치욕스럽게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나 밖에는, 단지 나 밖에는 말이다. 내가 네게서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네 어린애 같은 착각으로 잃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내가 너 위해 집에 간수 해 두었다. 일어나서, 내 손을 꼭 쥐고, 가자! 내 곁에 저 발자국 소리가 멎었네. 내 어둠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그림자였단 말인가? "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너는 나를 쫓아 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쫓아 버렸었느니라. (중략) 제 곁에 저 발자국 소리가 멎었습니다. 제 어두움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분의 손그림자였단 말입니까? 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너는 나를 쫓아 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쫓아 버렸었느니라.”
톰슨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신부로 서원했지만 신부가 되기에는 자신이 적합하지 않은 자라고 생각하고 신앙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이윽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세속적 방종의 길로 접어들고 아편 중독자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는 동안 줄기차게 자신을 부르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쓴 글에서 하나님의 집요함을 ‘하늘의 사냥개(HOUND OF HEAVEN)’와 같다고 표현하면 이 시를 씁니다,
톰슨의 시어 중에 가슴을 때리는 울림의 언어가 있습니다.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주목할 것은 이렇게 울림을 주며 찾아온 주님을 톰슨은 끝내 붙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괴로웠던 시절의 울림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는 찾아오신 주님의 손길을 끝내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1907년 런던의 어느 뒷골목에서 아편에 중독된 노숙자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합니다.
찿아 오신 하나님을 수용하지 않은 비극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기록되어있는 포로 귀환공동체에 속한 자들의 이름을 직시하면서 대단히 속 깊은 영적 울림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에 거주한 백성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여전히 동일 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에 감격해야 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유트브 방송에서 유명한 크리스천 강사로 정평이 나 있는 김창옥 TV 쇼를 잠시 시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연 중에 본인이 알츠하이머 환자임을 밝혔습니다.
50대 초반의 나이인데 알츠하이머 질병의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우울했고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충격을 받은 뒤에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번 냉정하게 반추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그동안 자라고 성장해 오면서 한 가지 심연 깊은 곳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죄책감에 빠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기를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병들게 한 요인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남편에게 매 맞는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를 구원해 내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도피했다는 죄책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죄책감은 내가 잘 살면 살수록 더 커졌지 작아지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어 했던 한 마디가 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내가 어머니를 구원해 내려는 시도는 내 만족의 수단이었지 진솔한 삶의 내용이 아니었음을 이제 느낍니다. 차라리, 맡겨야 하는 것이었는데….”
왜 김창옥 씨의 말 한마디가 제게 다가왔는지 아십니까?
그가 일반 강의였기에 에둘렀지만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기에 이것을 고백한 셈이었기에 저를 움직였습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영적 자유함을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분명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왜 사람을 찾고 계십니까?
인간은 스스로 해답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대로 저와 여러분의 궁극적 믿음의 실제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찾고 계심은 최고의 은혜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나를 찾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최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주님 나를 부르셨으니
내 모든 정성 내 모든 정성 주만 위해 바칩니다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주님 나를 사랑했으니
이 몸 바쳐서 이 몸 바쳐서 주만 따라 가렵니다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주님 나를 구원했으니
소리 높여서 소리 높여서 주만 찬양 하렵니다
주님 주님 나의 기도를 들으사
할렐루야 주님만을 사모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