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는 또 가서
본문: 호세아 3:1-3
서론)
이기주 작가의 글 하나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신촌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이들보다 확연히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는데 두 분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새가 꽤 묘하게 보였다. 난 유심히 지켜봤다. 키가 큰 할아버지는 키가 작은할머니가 두 걸음 정도 내딛는 모습을 확인한 뒤 찬찬히 한 걸음 내디뎠다. 다리를 저는 할머니를 위해 미묘한 타이밍으로 보조를 맞추는 듯했다. 노부부의 모습에 가슴 한쪽이 아릿해졌다. 별안간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상대보다 앞서 걸으며 손목을 끌어당기는 사랑도 가치가 있지만 한 발 한 발 보조를 맞춰가며 뒤에서 따라가는 사랑이야말로 애틋하기 그지없다고, 아름답다고. 그래, 어떤 사랑은 한 발짝 뒤에서 상대를 염려한다.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황소북스, 48쪽)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작가의 이 문장이 마음을 타격합니다.
저는 금년 4월에 아들의 혼례를 마쳤습니다.
아들 장가를 보내면 만세를 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7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보니 만세를 고사하고 제 어깨가 훨씬 더 무거워졌음을 실감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제는 마음이 아리도록 돌보고 사랑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 두 명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아들이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가 먼저 치열하게 걸었고, 며느리가 걸어야 하는 길을 아내도 역시 치열하게 걸었기에 아들 내외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절절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를 위해 아버지로, 시아버지로 어떻게 서는 것이 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일까를.
그러다가 내린 결론이 저 역시 이기주 작가의 표현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뒤에서 받쳐주며 걷는 부모가 되자.
뒤에서 받쳐주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전적인 희생이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하며, 결코 앞서는 경우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무엘상에 기록된 한 문장을 목사 초년 시기에 영어 성경으로 만나고 나서 목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바로미터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로 사는 제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말씀은 사무엘상 15:22절 2f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라”
사울의 불순종을 타격한 사무엘 선지자의 갈파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제사’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바꾼다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영어 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KJV 버전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Behold, to obey is better than to sacrifice.”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보라, 복종하는 것이 희생하기보다 낫다.”
하지만 성경은 ‘희생’이라는 단어를 ‘제사’라는 단어로 대신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분명히 ‘제사’라는 단어에 걸 맞는 ‘제바흐’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 ‘희생’을 뜻하는 ‘sacrifice’로 기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가 되려면 예배자는 반드시 희생하는 삶이라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가 삶의 현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누군가를 경배하거나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대상을 위해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그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야훼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결혼하라는 명령이었는데 결혼 대상이 경악할 만한 대상이었습니다.
호세아 1: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음란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자눈’의 문자적인 의미는 ‘몸을 파는 행위’ 즉 ‘매춘’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내린 미션이 창녀와 결혼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이 명령에 대한 부연 설명은 폐일언하고 호세아는 순종하여 창녀 고멜과 결혼합니다.
이후 2남 1녀를 낳고 가정이 이룹니다.
문제는 음란함이라는 기질을 갖고 있었던 고멜이 가정을 내팽개치고 가출하여 성매매 시장에서 다시 몸을 파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2남 1녀를 둔 남편 호세아는 기가 막혔을 것이고 죽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를 조명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야훼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잔인한 명령을 다시 내립니다.
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표준 새 번역으로 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서 건포도를 넣은 빵을 좋아하더라도,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정말로 기막힌 운명입니다.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호세아에게 하명 된 야훼 하나님의 지시는 정말로 잔인할 정도로 무서운 명령이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을 다 버린 패륜적인 아내를 다시 데려오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도저히 아내라고 인정할 수 없는 패륜적인 아내를 데리고 오라는 명령은 아무라 예언자라도 결코 순종하기 쉽지 않은 미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본문 2-3절은 눈물겹습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는 사창가에 인신매매범들에 의해서 팔려 나온 아내 고멜을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삽니다.
보리 한 호멜 반은 이스라엘의 화폐가치로 은 15세겔입니다.
그렇다면 은 열 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의 가치는 은 30세겔의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은 삼십 세겔’이라는 가치를 떠올리니까 문득 떠오르는 아픔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팔면서 제사장 무리들에게 가롯유다가 받기로 한 가치가 은 삼십이었습니다.
세속적인 표현으로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은 패륜적인 아내 고멜을 데리고 오기 위해서 호세아가 사창가에 지불한 대가가 은 삼십이었습니다.
이렇게 속전을 지불하고 돌아온 호세아는 아내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호세아에게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히 없는 희생입니다.
철저한 희생적 헌신이 보입니다.
더 엄청난 의미가 호세아의 반응에 담겨 있습니다.
희생을 담보한 수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자에게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쉽지는 않겠지만 결심만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그럴만한 가치가 1도 없는 패륜적 아내에게 이렇게 헌신하며 희생했습니다.
돈을 지불하여 아내를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것은 물론, 아내에게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이 아니라 애절하게 부탁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설명 불가의 일입니다.
그런데 설명 불가한 호세아의 행위를 보면서 신약성경 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요?
로마서 5:8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교우들에게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호세아에게 하나님이 무리수를 둔 이유가 보입니다.
‘호세아’라는 히브리어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호세아’ 혹은 ‘여호수아’ 그리고 신약성경이 기록된 ‘예수’라는 단어는 모두가 ‘구원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함축하여 설명해도 큰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호세아 예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고 있다고 유추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쓸모가 없었을 때에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대신 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바로 고멜에 비해 전혀 낫지 않은 존재였는데도 불구하고 오셔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가 고멜을 데려오기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라는 은 삼십의 가치를 지불한 것과 똑같이 우리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은 삼십에 팔렸고 또 죽으셨습니다.
오늘 호세아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두 구절이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소리는 크게 지르지는 않겠지만, 이 구절들을 묵상하다 보면 도무지 다 담을 수 없는 격정적인 감사를 자아내게 합니다.
첫 단어는 ‘너는 또 가서’이고, 두 번째 단어는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저는 “너는 또 가서”라고 정했습니다.
이 구절이 왜 이리 절절하게 다가오는지요.
호세아가 고멜에게 가야 하는 이유와 당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멜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슨 부차적인 설명이 더 필요합니까?
필요치 않습니다.
호세아에게 하나님이 명하셨습니다.
“너는 또 다시 가라”
이 문장은 하나님이 나와 그대에게도 똑같이 보이시는 반응입니다.
아주 가끔 부르는 찬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오래전에 제게 이런 말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전도 하라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전도했는데 이제는 전도하기가 무서워요. 내가 전심으로 최선을 다해 전도 했는데 전도한 이들이 내 의도를 선하게 받은 게 아니라, 나를 이용하려 했던 것을 너무 많이 경험해서 전도하는 게 너무 두렵고 무서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권사님이 전도한 그 지체들이 권사님을 선용한 게 아니라 악용한 경우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그 영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훼께서 포기하지 않은 영혼을 내가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요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이런 공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나는 유구무언입니다.
나 또한 아직은 죄인이었을 때 주님이 죽으셨고,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을 때,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내가 오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우리는 또 다시 가야 합니다.
이제 두 손 들고 항복할 수 없게 만드는 2절에 삽입 되어 있는 또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살피고 설교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야훼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엄청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녀에게 또 다시 가서 대가를 지불하고 건져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고멜을 돈 주고 사는 이유 설명입니다.
“나를 위하여 그녀를 사라”
말 그대로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를 대십니다.
고멜을 건지는 것은 너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다.
무슨 말입니까?
고멜의 소유권이 호세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구절을 접하는 데 심장에서 혈관이 퍼져나가는 듯이 박동이 더 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아도 되는가의 감격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이보다 더 크고 강력한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세인 교회에 처음 나오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께 엎드리며 기도한 지체들이 여러분에게 또 다시 가서 베푼 사랑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그러했기에 아무나 나올 수 없는 이 자리에 여러분이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10여 전에 중국인 출신의 미국 국적의 소설가인 하진이 쓴 “기다림”을 읽다가 목사인 저를 참 많이 사유하게 해준 좋은 추억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쿵 린은 중국의 문화 혁명기라는 격변의 시대에 군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형적 엘리트 계층의 군의관입니다.
그런 그는 당시 시대적 정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처자 수위와 결혼하여 딸 ‘화’를 둔 유부남입니다.
그는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그가 근무하는 육군 병원에서 수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도시적 감각과 육체적인 미모를 갖춘 간호사 우만나를 만납니다.
그녀와 애정의 관계를 이어가는 불륜의 관계를 맺습니다.
쿵린은 아내가 있고 딸이 있는 유부남임을 우만나는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유능해 보이는 젊은 의사 쿵린에게 공격적인 사랑의 공세를 퍼붓습니다.
이런 젊은 여성의 적극적인 구애에 쿵린 역시 흔들리고 결국 고향에 있는 아내와 이혼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쿵린은 딸과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대한 걱정으로 매년 만나와 약속한 이혼에 실패한 채 고향에서 돌아옵니다.
아내와 별거한 지 17년. 마침내 쿵린은 법적으로 아내의 동의 없이 법률적으로 이혼이 가능한 시기가 되고, 쿵린은 수위와 자의적으로 이혼을 하고 우만나의 재혼을 합니다.
쿵린과의 결혼에 성공한 우만나는 쌍생아 남자아이를 임신한 뒤에 난산 끝에 출산합니다.
하지만 산후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우만나 역시 아이들을 양육하고 기르는 과정에 지쳐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집니다.
결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꿔 왔던 장밋빛 그림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갈등의 갭이 생깁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만나는 심장으로 통하는 관상동맥이 폐색되는 치명적인 질환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피폐할 대로 피폐 된 결혼 생활에 지쳐 있었던 쿵린은 법적인 아내인 우만나로부터 딸과 전 부인인 수위를 보고 오라는 허락을 받습니다.
쿵린은 마지 못해 가는 것처럼 위장하고 전 부인 수위를 찾아갑니다.
찾아간 수위의 집 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쿵린을 본 딸 ‘화’가 기쁨으로 아버지를 방으로 인도합니다.
드디어 쿵린은 자기가 버린 전 아내 수위와의 만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참 나쁜 사람인 쿵린을 뜻밖에도 따뜻하게 맞이하는 자기가 버린 여자 수위의 태도로 보고 무너진 쿵린은 사랑보다 따뜻한 가정이 이제는 더 그리워지는 이율배반적이 자신의 모습에 자책합니다.
더 자신을 괴롭게 한 일은 정말 나쁜 사람이고 못난 자신을 아직도 기다리는 수위의 진심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소설의 끝은 여운을 남깁니다.
18년간 기다렸다가 결혼한 우만나의 기다림, 그 기다림 때문에 남편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심적으로 자기를 버린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한 여자의 기다림을 묘사하고 소설은 대단원 막을 내립니다.
많은 여성 독자들은 이 소설에 대해 매우 무서운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하진의 이 작품에 대하여 가장 통속적인 3류 드라마와 같은 소설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했고, 중국의 공산주의 토대가 잡히는 문화 혁명의 시기에 흔히 볼 수 있는 남성 편의주의, 혹은 남성우월주의 소설의 극치라고 매서운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주 생뚱맞은 목사만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의식이 꿈틀대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신을 버린 남편을 18년간 기다렸던 수위에게서 하나님의 기다림을 보았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그리고 오늘 교회에 초청되신 형제, 자매 여러분!
수위와 같은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는 현재진행 중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호세아 3:1)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