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32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10:1-27 제목: 뭣이 중헌 디! 서론) 지난달에 묵상하는 성서일과의 텍스트가 시편 119:33-40절이었습니다. 그 중에 제게 크게 와 닿은 38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이 구절을 영어성경 KJV 버전으로 읽어보겠습니다. “Stablish thy word unto thy servant, who [is devoted] to thy fear.”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에 헌신하고 있는 당신의 종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세워주십시오.” 그날 저는 묵상의 제목을 이렇게 설정했습니다. “말씀 갖고 장난질치지 말라” 그리고 묵상 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목사가 당할 수 있는 치명상이 있다. 말씀 가지고 장난질 치는 거다. 목사만큼 성경에 익숙한 자가 또 어디에 있나. 웬만한 목회 경력이 쌓이면 말씀을 갖고 저울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이런 수준에 이르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말씀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장난질하는 못된 짓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불편해도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말씀 그대로 가르치고 사는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거다. 헌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목사로 부름 받았는데 부름과는 전혀 관계없는 쪽(?)팔리는 인생을 살면 되겠는가. 그래도 주님의 주님 되심에 목숨 걸고 사수하는 로드십으로 무장하며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젊은 시절, 교회 부흥에 목을 걸고 살았던 적이 있다. 그게 내 일이 아닌데 나는 그렇게 어리석게 살았다. 나를 위한 부흥이 슬로건이었다. 얼마나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지천명을 넘기면서 조금씩 각인했다. 오늘 성서일과인 시편 119:38절을 조금 더 젊은 날에 깨달았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목사로 살고 있을 텐데 주군께 죄송하고 송구스럽다.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상투성 기도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영성의 기도다. 오늘 이 기도가 나를 다시 세운다. 몇 년 전에 전국에서 개봉된 ‘곡성’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배우가 던졌던 한 문장에 전국을 강타하며 여러 가지 분야에서 회자되고 또 화두로 떠올랐던 문장이 바로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뭣이 중헌 디!” 대단히 악센트가 강한 전라도 사투리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주의 종에게 말씀보다 중한 게 또 어디에 있습니까? 크리스천들에게 말씀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에 하나 있다면 그건 그렇게 생각한 사람의 자의적인 착각입니다. 목사나 신자에게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느헤미야 역사서 기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게 해주는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바벨론과 바사의 포로로 살다가 극적으로 고국 예루살렘에 귀환한 포로공동체의 지체들이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를 경험한 이후, 열조들이 저질렀던 죄악을 낱낱이 회개하고 난 뒤에 우리들은 결코 그런 죄악을 저지르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겠다고 결의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결코 떠나지 않고 올바르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 것을 약속한 뒤에 그 약속 용지에 서명했음을 살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서명을 한 뒤에 그 서약서를 인봉하였다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 9:38절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오늘부터 살피게 될 10장은 그 약속에 서명한 자들의 이름(1-27)과 약속의 내용(28-39)들을 소개해 줍니다. 먼저 오늘 우리들이 살피는 1-27절을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는 하나님께 말씀대로 살 것을 약속한 자들의 신분과 이름이 열거됩니다. 2-8절까지 21명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21명의 이름을 소개한 느헤미야 기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히며 마무리합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마아시야, 빌개, 스마야이니 이는 제사장들이요” 제일 먼저 소개된 21명은 ‘제사장들’이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이어 9-13절에서는 17명의 이름을 소개하는데 역시 소개 전에 사족을 남깁니다.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레위 사람 곧 아사냐의 아들 예수아, 헤나닷의 자손 중 빈누이, 갓미엘과” 여기에 소개된 17명의 실체는 ‘레위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14-27절까지를 살피겠습니다. 총 44명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데 이들의 정체는 ‘백성의 우두머리들’이라고 소개됩니다. 14절을 읽습니다. “또 백성의 우두머리들 곧 바로스, 바핫모압, 엘람, 삿두, 바니,” ‘백성의 우두머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쉐 하암’은 문자적으로 ‘가문의 대표’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열거된 총 82명의 공통점이 있는데 성직자 그룹이요, 지도자라는 공통점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성직의 계열에 있는 사람이고, 백성의 우두머리들은 가정 공동체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세 종류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결단하고 행했습니까? 다시 9:38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재강조하며 다시 한 번 복습하겠습니다. 이들이 결단한 것은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선조들이 자행했던 죄악을 다시는 자행하지 않겠다는 결의였습니다. 그런 뒤에 하나님과 다시 약속하는 내용에 대해 사인하고 거기에 이름을 포함시킨 뒤, 다시 번복하지 않기 위해 그 서명지를 인봉하는 일에 동의한 것입니다.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이들이 열조의 죄에서 떠날 것을 전제하며 약속한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⓵ 횡행하고 있는 이방인들과의 통혼을 금지할 것 ⓶ 성전을 정화할 것 ⓷ 십일조 신앙생활을 철저히 준수할 것 ⓸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킬 것 네 가지의 내용들은 이어지는 강해에서 교우들과 나눌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결단한 내용의 주체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언약의 주체적 체결자들은 영과 속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제사장, 레위 사람, 그리고 가문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1절 본문에 등장하는 시드기야와 느헤미야입니다.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시드기야는 본문 1절에만 나오는 인물이기에 그가 누구인지를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정치적인 지도자라는 추측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1절에 번역된 “그 인봉한 자는 하가랴의 아들 총독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라는 표현에서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를 연결해 주는 접속사 ‘베’가 이를 증언해 줍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글을 작성할 때 히브리어 접속사 ‘베’를 사용하는 것은 접속사의 전후에 있는 단어들의 동등함을 나타낼 때만 사용합니다. 결국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느헤미야와 누군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드기야의 정체는 똑같이 정치적 지도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또 하나 주석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느헤미야’입니다. 저는 느헤미야 9장의 연대기를 에스라 9장 앞에 놓여야 함을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동시에 수문 앞 광장의 부흥회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성벽 재건 이후가 아니라 성벽 재건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느헤미야 10장 역시 느헤미야 9장과 연계해야 하는 데 그렇다면 느헤미야 1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름들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교우들과 함께 나누는 느헤미야 10장에 열거된 이름들 중에 상당수가 에스라 2:3-30절에 나오는 제 1차포로 귀환자의 명단이기에 느헤미야 10장도 에스라 시대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을 해야 역사성에 있어서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본문에 기록된 이유는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 서기관의 실수 ⓑ 최종 편집자의 의도적인 기술 “편집자는 느헤미야 8-10장을 율법선포(8장) → 신앙고백 (9장) → 언약 갱신 (10장)의 구조로 나열함으로써 성전과 성벽을 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셈이다. 성전과 성벽이라는 하드웨어는 반드시 말씀과 고백과 실천이라는 소프트웨어로 채워져야 함을 역설했다는 것이다.” (민경진, 『에스라, 느헤미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느헤미야 8-10장 주해와 적용』, 281쪽) 결국 민경진 박사의 결론은 후자인 셈입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교통정리를 하겠습니다. 느헤미야 10장의 시대적 배경도 에스라 시대로 적용하는 것이 옳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에스라 시대로 본문을 설정하기로 한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 1차와 2차 포로귀환 공동체라고 한정할 수 있습니다.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열조의 죄를 따르지 않고,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것을 사수하기로 결의하며 서명한 뒤에 약속을 변개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서명지를 봉하기까지 한 것은 너무 결연한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찾아내야 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 윗물이 맑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지켜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맑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맑아야 교회 공동체 전체가 맑아집니다. 사사 시대에 벌어졌던 난장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사사기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레위 지파 출신의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를 떠돌다가 우연히 미가라는 사람의 눈에 띠었습니다. 미가는 그냥 막 살던 그저 그런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더 영적으로 망가진 여인이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각종 우상들을 집에 만들어 세워놓고 그것에게 복을 빌던 여인이었고, 급기야는 한 아들을 자기 맘대로 제사장으로 세우기까지 하는 말 그대로 신앙의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그의 아들이었던 미가 역시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막 사는 아들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연출되었을까요? 그들이 살고 있었던 사사 시대의 에브라임 지파 자체가 랜덤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던 레위 청년이 에브라임 지역에서 거주할 곳, 먹고 살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미가는 적절한 사례와 거주할 집과 먹을 것을 제시한 뒤에 자기 집의 사설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집을 위해 복을 빌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무당 고용이었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해 주겠다는 미가의 청을 가뜩이나 곤궁하던 레위 청년은 즉각적으로 허락하고 미가 집안의 사설 제사장으로 취직하며 막 살고 있는 미가 가정을 위해 복을 비는 종교적인 무당 역할을 감당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바로 이 시점에 긴장감이 있는 내용을 하나 소개하는데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골칫거리 중에 하나가 단 지파를 무대 위에 올립니다. 단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분배된 땅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받았건만 그들이 쫒아내야 할 가나안 거민이었던 아모리가 두려웠기에 포기했던 지파였습니다. 사사기 1:34절을 소개합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국 단은 그들이 살아야 할 땅을 얻지 못한 채 다른 지파에 기생하며 빌붙어 살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비겁하고 나약했던 단이 사사기 18장에 다시 재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점입가경입니다. 평화롭기 그지없이 살고 있는 동족 라이스의 땅을 빼앗기 위해서였습니다. 단 지파의 군사들은 라이스로 가기에 앞서 중간 도착지인 에브라임의 산지에 살고 있었던 미가의 집에 도착합니다. 600명의 중무장한 병력이 미가의 집에 도착해 보니 그 집 안에 사설 신상들이 즐비했고, 그것을 도구삼아 그 가정의 복을 빌고 있는 레위 청년 제사장을 발견하고 사심을 갖습니다. 사사기 18:19-2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하는지라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이 구절은 정말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구절입니다. 막 살던 단 지파의 군사들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집에 있는 드라빔과 에봇 등등의 종교적인 신상을 갈취합니다. 그러자 이것을 보던 청년 제사장이 항의를 합니다. 바로 그때 미가의 집에 있던 신상들을 갈취하던 단 지파의 정탐꾼 5명이 사설 제사장에게 엄포를 넣은 메시지입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고 명한 뒤에, 당근 하나를 제시합니다. 미가 집을 위한 제사장을 포기하고 우리 단 지파를 위한 제사장 되라는 당근이었습니다. 이런 유혹을 받은 레위 청년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그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했다.” ‘기뻐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타브’는 ‘마음에 만족함을 느끼는 희열’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한 또 다시 배를 갈아타는 막장 인생의 제사장을 고발하는 사사기 저자의 울분을 보게 해 줍니다. 지금 소개한 사사 시대의 막장 드라마를 통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들레헴이 있어야 할 레위 출신의 제사장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지파 공동체의 타락으로 인해 먹고 살 방법이 없어지자 그 자리를 이탈하고 에브라임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자기의 땅인 아닌 전혀 다른 땅에서 문전걸식하며 살아야 했던 레위 청년은 이미 제사장적인 자존감, 하나님의 구별된 지파 사람으로의 최소한의 주존감을 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에브라임에 살고 있었던 막장 가정의 사설 제사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탈을 주저 없이 감행했고, 그 죄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동족의 부족을 몰살시키고 자기들의 터를 삼으려는 사악하기에 그지없는 단 지파가 제시한 더 형편없는 막장의 유혹에 서슴없이 오케이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도자인 레위 지파가 망가진 결과물이 어떻게 그 외연들로 나타났습니까? 공동체 전체의 패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전혀 신학적이지도, 성서적이지도 않은 개인이 자기 집을 위하여 사설 제사장을 만드는 참담한 패역,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레위 청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용인하고 사설 제사장이 된 참담한 패역, 그저 아무런 죄 없이 살던 라이스 주민을 학살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마련하고자 했던 단지파의 참담한 패역, 이제는 개인의 제사장이 아니라 단 지파라는 거대한 집단에서 놀아야 한다는 유혹에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주저 없이 배를 갈아탄 청년 제사장의 참담함이라는 패역, 레위 지파의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근원적인 길을 내팽개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십일조 생활의 포기라는 참담함이라는 등등의 종합 세트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사시대의 막장을 설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대단히 아프게 다가온 것은 레위 지파 청년 무너짐이었습니다. 왜? 그래도 그는 성직의 반열이었다는 유감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여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것을 다짐했던 부류는 느헤미야 9:38절에 소개된 방백들,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이었습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에 다시 재 기록된 정치지도자, 제사장, 레위 사람, 백성의 우두머리들이었던 지도자였습니다. 끝까지 무너지지 말아야하는 마지노선은 그래도 지도자들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재철 목사의 책에 담긴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이재철,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홍성사, 45쪽) 가톨릭 시인인 구상 선생님과 몇 몇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를 할 때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정말로 온 세상이 온통 어둡습니다. 온통 흙탕물입니다. 이럴 때 크리스천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구상 선생이 대답했다. “크리스천은 맑은 물을 계속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 물었다. “선생님, 온 세상이 흙탕물인데 크리스천이 맑은 물 몇 방울을 보낸다고 이 세상이 맑아지겠습니까?” 이 반론에 대해 구상 선생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글을 읽은 지 23년이 지났습니다. 그러기에 저 또한 글에 소개된 질문자의 자리에 서서 이렇게 부연을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몇 방울의 맑은 물을 흘려보낼 그 몇 사람의 크리스천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 고민하다가 제가 대신 구상 선생의 입장이 되어서 대답해 보기로 했습니다. “네가 맑은 물이 돼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도대체 뭣이 중헙니까? 복기하고 다시 결단하십시다. 목사로 사는 저 역시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 주의 그루터기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맑은 물을 흘려 보내주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의 가치와 병행하여 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보다는 더 엄격한 신앙적, 윤리적,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의 영역에 있는 자들보다 위에 있는 자들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운명적으로 우리는 위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흘려보내야 하는 자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들이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계속 맑은 물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 결단에 사인하고 인봉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요합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 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 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