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느헤미야 27번째 강해) 본문: 느헤미야 9:4-6 제목: 타당한 이유 서론) 언젠가 음식점에 들렸더니 거기에 이런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영웅 오빠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어 행복해요. 영웅 오빠는 내 맥박이에요.” 대중 가수 임영웅의 팬 카페에 소속된 50후반의 여성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과감히 밝힌 글을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녀를 미치게 만든 임영웅이라는 가수의 정체성에 비해 나는 무엇을 했나 싶어 그랬습니다. 임영웅이라는 가수가 부르는 노래의 장르는 트로트라는 영역입니다. 그가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라는 이미지도 한몫했겠지만 그를 따르는 팬덤들이 수없이 많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부른 장르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잘 맞아떨어진다는 트로트라는 것도 중요한 인기비결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으로 하나 더 덧붙여 봅니다. 나훈아라는 가수를 너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어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 할라고 날 낳았던가/ 낳을라거든 잘 낳거나 못 낳을라면 못 낳거나 살자 하니 고생이요 죽자 하니 청춘이라/ 요놈 신세 말이 아니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 할라고 날 낳았던가” ‘어머니’를 의미하는 부산 사투리 ‘어매’의 담긴 노랫말을 새기다보면 가난했던 시절의 한을 담고 있어 60-70년에 태어난 이들의 마음을 너무 잘 표현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은 물론이요, 부르면 히트를 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감성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 젊은이들이 부르는 비트가 강하고 발음 자체도 어려운 곡들이 나는 들을 때마다 현기증이 나지만 그 곡들의 가사 안에는 소위 X-Z 세대라고 불리는 그들의 정서적 울분과 하고 싶은 말을 잘 대변해 주기에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대중음악평론가이자 팝 칼럼니스트인 임진모씨의 인터뷰 기사 중에서 이렇게 말한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중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오락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산물이다. 동시에 음악은 인류가 만들어 온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의 쉼터다.” 그의 말에 솔깃한 부분이 있습니다. “대중음악은 역사적 산물이다.” 그의 말에 대해 패러디를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적, 신앙적 보고이자 산물이다.” 본론) 수문 앞 광장 부흥회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나팔절이라는 절기를 회복하게 했고, 초막절도 다시금 새기게 함으로 선조들의 죄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대신 회개하는 영적 돌이킴의 은혜까지 회복하게 하는 일대 영적 전환점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런 승리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포로귀환공동체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다시금 성회를 열어줄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다시 성회를 열어 또 다른 삶의 결과물들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집단적 금식에 들어갔고, 굵은 베옷을 입고 공동체적인 회개 운동에 몰입했고, 더불어 이렇게 행위적인 퍼포먼스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감각하게 아니면 의도적으로 데리고 왔던 이방 여인들을 돌려보냄으로 말이 아닌 삶으로 야훼의 백성임을 실천하였음을 지난 26번째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영적 갱신 운동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하여 부합한 행위적 결단을 드리고 있던 어간, 특히 야훼 신앙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레위 사람들의 이름을 느헤미야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합니다. 이름이 거론된 레위 사람들이 행한 행보가 5-37절에 걸쳐 소개되고 있는데 전체적인 내용을 하나로 아우르면 이들이 행한 것은 찬양의 기도였습니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도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제 몇 주 동안 우리는 레위 사람들이 드린 이 기도의 내용들을 살피려고 합니다. 오늘 주일부터 살필 기도의 내용들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내용들이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먼저 4-5절을 읽겠습니다.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4-5절에 동명이인까지 포함하여 총 8명의 레위 사람들이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4-5절에 중복으로 거론된 이름의 수는 5명입니다. 추측건대 8명 중, 5명은 이 그룹 안에서 지도급에 있었던 자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이 공통으로 행했던 기도의 내용 중에 가장 먼저 소개되고 있는 것은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들이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기도했습니까? 세 가지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1)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운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모든 부분에서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일체의 것들은 한시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시적이기에 인간은 언제든지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조변석개하며, 유불리에 따라 조령모개하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삼모사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오죽하면 베드로전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24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성은 영원부터 영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며 고백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6-27) 읽다가 많은 은혜가 임한 창세기 46:1-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은 애굽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떠났던 아들들을 통해 너무 놀라운 보고를 받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아들들의 이 보고에 얼마나 야곱이 충격을 받았는지 창세기 45:26절을 이렇게 보고합니다.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 ‘어리둥절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푸그’는 문자적으로 ‘마비 증세를 보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야곱이 마비 증세까지 보였겠습니까? 잃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는 것은 물론, 당시 최대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로 등극해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야곱이 곧바로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가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마음을 다잡이 하고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자는 아들들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더불어 거의 반평생 이상을 살았던 가나안의 헤브론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 브엘세바에 도착합니다. 헤브론에서 약 36km 정도 떨어진 브엘세바에 도착한 야곱은 아주 오래 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벧엘에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야훼 하나님께 브엘세바에서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주목할 것은 제사를 드리는 야곱에게 야훼 하나님이 또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굽 행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나름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이전에도 여러 차례 그렇게 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약속하십니다. “야곱아, 나는 너에게 약속한다. 때가 되면 너를 이곳 가나안으로 다시 데리고 올 것이다. 더불어 네 아들, 요셉이 너의 눈을 감겨 줄 것이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창세기 50:12-14절에서 야곱이 죽은 뒤에 장엄하게 성취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당신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시공간에 제약을 받는 존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하지만 영원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약속하신 일체의 약속을 지켜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수요 예배 설교를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원고에 이렇게 적으면서 울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요셉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셉의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스룹바벨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스룹바벨의 하나님은 바울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은 주기철 목사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하나님은 오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나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훼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은 존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에 이렇게 은혜 받은 포로 귀환 지도자들이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찬양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주목할 것은 주의 이름의 특성입니다. 지도자들은 주의 이름을 존귀하다고 표현합니다. 존귀하다는 개념을 표준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야훼 하나님의 이름이 귀하고 귀했으면 인간이 행하는 일체의 종교적 행위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적시했을까 싶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야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히브리어 ‘야훼’라고 부르는 것은 구약적 전통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야훼’라는 이름이 너무나 거룩하고 존귀하기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야훼’라는 히브리어에 붙어 있는 모음만 시용하여 또 다른 이름을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아도나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 이 신학적 행위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토록 존귀하게 여겼다는 도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을 귀하게 여기를 주존심(主尊心)으로 무장되어 있습니까? 사도행전 26:29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결박된 채 말했다.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 바입니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왕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결박된 것만 빼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세계적인 찬양사역자인 베벌 세어가 드렸던 찬송가 94장의 찬양의 가사가 현재진행형입니까?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나는 오늘날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갖고 싶습니다.) 정말로 이렇게 주님을 귀하게 여기십니까? 휴가 기간 동안 월스트리트 저널의 부고 전문기자인 제임스 R, 해거티가 쓴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를 가지고 가서 짬이 날 때마다 읽었습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동료기자인 톰 바타베디안의 부고 글을 소개하면서 그의 묘비에 새길 문장을 적시해 놓고 있는데 읽다가 의미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톰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TOM VARTABEDIAN, 1940-2016. 이렇게 이름과 생애 연도를 적시한 뒤에 다음과 같은 글로 묘비명에 새겼습니다. “우리가 남겨야 하는 진정한 기념비는 묘비가 아니라 행동입니다.”(해거티,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 인푸루엔셜, 221쪽) 이 문장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훗날 묘비를 만들면 이렇게 써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참 귀하게 여긴 사람” 류호준 박사의 글을 읽고 나서 밑줄을 그은 문장이 있어 소개합니다. “현대 유물론적인 세계는 일주일을 주중과 주말로 구분하는 시간의 패턴 중에 주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요일은 새로운 한 주의 첫 날에서 주말의 둘째 날로 폐위되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41쪽) 불금의 시간을 보낸 현대인들(그리스도인들을 포함)은 주일을 주말 휴식의 둘째 날로 여기며, 거룩한 하나님의 날이라는 인식을 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일은 주일이 아니라 피곤에 절어 있을 정도로 금요일을 보낸 그리스도인들에게 단지 휴식할 수 있는 휴일의 두 번째 날로 매도되기 시작되었다는 성찰입니다. ‘안식’이라는 히브리어 ‘샤바트’는 문자의 의미가 ‘멈추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일체의 욕망, 무언가를 더 생산하려는 욕구,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소유의 욕심 등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멈추라는 의미가 안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의 의미는 거룩성이 본질이며, 일체의 세속적 욕망에서의 이탈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샤바트(주일로 해석함)마저도 세속적인 날의 하나로 인식하게 만든 천박한 유물론적인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현대판 그리스도인들이 그날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길 리 만무입니다. 하나님의 의미를 무시하거나 안이(安易)하게 여기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자는 야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아니, 찬양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야훼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렇게 말한 것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금언입니다.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영혼을 순결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손종태, 『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활동』, 크리스천서적, 161쪽) 3) 창조주이시기에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피조물의 사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나는 만들어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만드신 주인의 것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맘대로 행동하거나 내 뜻을 관철하며 살지 않고 오직 주인이 원하시는 뜻과 방법대로 살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것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선언하며 실천하는 삶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만드신 것을 보존까지 하신다고 역설한 부분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걸작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 또 다른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라는 해석 말입니다. 로마서 1:19-21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 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구절은 매우 서글픈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물론 이모저모의 계시들을 통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여기며 감사할 수 있도록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의도적으로 이런 만들어 놓은 계획을 피조물이 거부했다고 지적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거부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필드는 이렇지만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만 다시 우리들에게 희망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군이심을 믿는 자는 결코 막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서 밝혔듯이 야훼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주군이심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로공동체의 지체들은 창조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망각하고 산 것에 대해 회개하며 돌아설 것을 다짐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이 나의 주군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시편 95:1-6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타당한 이유’라고 정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야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타당성을 세 가지로 밝혔습니다. 나의 영원하신 믿음의 이유이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다. 도무지 어떤 다른 피조물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귀하신 야훼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십시다. 더불어 야훼 하나님은 당신과 나를 만드심은 물론 일체의 피조들을 창조하신 주인이심으로 인해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내 생명 다하도록 주 얼굴 만구하리 내 주 같은 분 없네 그 어느 누구도/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오 하나님 주 나의 모든 것/내 주 같은 분 없네 이 땅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