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신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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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인플루엔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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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2-15 10:1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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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의 “언어의 높이뛰기” (인플루엔셜 간, 2021년)를 읽고 그 언젠가 작가 이기주의 소리가 내 귓가를 세차게 때렸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이기주, “말의 품격”, 황소북스, 2017,p,10.) 목사는 말을 하며 먹고 사는 자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 같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당위다. 목사는 평생 말을 해야 한다. 싫든 좋든 목사는 생각의 지성을 통해 만들어진 신앙적 함의들을 도출하여 교회 공동체 안은 물론 밖의 ‘너’와 ‘우리’에게까지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존재다. 필자는 목사의 한 마디 말이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무게감이 있음을 지난 30여 년의 세월 사역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체감했다. 그러기에 목사는 허튼 소리, 순화되지 않은 언어, 상식의 도에 어긋나는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이런 품격이 있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목사 공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 공부라 함은 단지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지식 습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언어 공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국어 언어학 전문가인 신지영 교수는 본서에서 현 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대단히 불편한 언어 사용의 용례를 10가지로 나누었다. 강의록의 형식을 갖춘 글을 통해 오류투성이지만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난맥들을 지적한다. 실례 몇 가지만 나누어 보자. “민낯이 왜 나쁘지?”(p,58) 저자는 민낯이라는 단어를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라는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소개하며 대중적으로 여성들이 민낯으로 다니면 예의를 갖추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회적 인식에 대하여 강하게 도전한다. ‘민낯이 드러났다’는 문장 자체는 대단히 부정적인 의미의 표현으로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이유를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주류 세력들의 조작이라고 일갈한다. “언어표현에는 대체로 그 사회 주류의 관점이 주로 담기는 만큼, 주류 남성의 관점을 담아 만들어진 이 표현이 문제의식 없이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p,64) 필자도 남자다. 그러기에 저자의 통찰에 무언가를 불편한 반론해야 하겠는데 딱히 거론할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저자의 설명이 적확하다는 의미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전제하며 이렇게 간단하게 소회를 피력해보고 싶다. 여성 스스로가 사회적 냉소를 두려워하여 민낯으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민낯하기에 용기를 가져보라고. 필자처럼 민낯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성을 높이 평가하는 남성들도 있다고 응원까지 하고 싶다. 필자는 이름이 있는 커피 브랜드 상호에 가뭄에 콩 나듯 다닌다. 지인 만남을 통해 끌려가는 뭐 그런 경우다. 그러다보니 이런 단어가 통용되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무지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p,77) 저자의 인용에 의하면 다반사란다. 이 문장이 틀린 이유는 높임법이 문법에 맞지 않기 때문임을 저자는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언어에만 존재하는 높임법의 –시-가 왜 이렇게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일까? 저자의 해석은 대단히 탁월했다. “공손성의 요구 뒤에 숨은 일상의 갑질”(p,87)이라고 해제했다. 대체적으로 소비자는 생산자에 비해 사회구조상 ‘갑’의 형태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원치 않게 ‘을’의 위치에 있는 대상자들은 ‘갑’에게 공손함을 표현해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기에 표현 자체의 무리수가 그 무슨 대수냐며 무조건 고개를 숙인다. 이런 움츠림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런 부조리함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의미심장하다. “친절하고 공손하기 위해 문법성을 훼손하는 일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공손성은 문법성을 이기게 되었다.” (p,87.) 필자가 섬기는 교회 주보에는 ‘님’자를 배제한다. 공적인 대중들에게 보고되는 글말은 보편타당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 필자의 목회 철학 때문이다. 저자가 일갈한 한 문장이 오롯이 내 이성을 자극했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다. 그런데 그 도구가 생각을 담지 못하고 있다. 언어가 생각을 담지 못한다면 언어를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p,43) 답은 초등학생도 안다. 제 20대 대통령 선거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옥고를 치루고 있는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에 취임하기 전까지 자신을 부른 호칭을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변경해 줄 것을 각 언론사에 요청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者)’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놈 자’를 붙일 수 있냐는 권위주위적인 발상 때문이다. 그렇다. 언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언어의 가치와 정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의 생각이 어설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의 선택을 가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필수적 내용이 있다. 인류학자 김현경의 말을 필자의 말로 대신한다. “상호작용 의례를 통하여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어야 한다.”(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p,115.) 내 말의 언어가 높아지려면 마틴 부버의 말 그대로 ‘나’의 언어가 ‘너’의 언어가 되어야지 ‘그것’의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분명히 언어의 높이뛰기는 인격의 높이뛰기다.
지면 상 줄였지만 독자들에게 강추하고 싶은 내용이 지천이다. 도전해 보시라. 당신의 언어가 도약하게 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