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이어령의 마지막 수업2024-06-11 10:07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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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지수
ㆍ출판사 열림원
ㆍ작성일 2022-03-15 09:55:50

 

김지수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2022년 간))을 읽고


책을 덮고 책 뒷면에 사족을 이렇게 남겼다.

사랑하는 내 아들 요한아, 논문 쓰느라 産苦 중이겠구나. 응원한다. 이어령은 거대한 산이자, 파도다. 지성적 영성의 산이자, 파도다. 이 산을 등반하고, 파도를 넘어보면 좋겠다. 그 뒤에 밀려오는 희열은 이론이 아니다. 감동의 울음이지. 선생님이 말하네.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고(p,147) 아들의 보폭을 같이 디디며 응원한다.
(2022년, 3월 14일, 오후 9시 04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말을 나눴어. 내년 3월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때 책을 내라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내지마. 살아 있을 때 내면 내가 멋쩍잖아.” (p,182.)

인터뷰어이자 선생의 제자인 저자 김지수는 선생의 이 유언과도 같은 부탁을 어겼다. 선생이 소천하기 5개월 전에 이 책을 출간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저자는 스승과 나누었던 황금율과 같은 이 주옥같은 보물들을 스승에게 헌사하고 싶었으리라.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나 서재의 천장을 올려보았다. 떨어지는 눈물을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거대한 감동의 시나리오를 몇 자로 적는다는 것이 부끄러워 서평을 남기지 말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조금은 많은 글벗들이 이 책을 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자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인간은 지혜를 아는 죽는 자야. 그래서 슬픈 거라네.” (p,295)

저자가 에필로그에 남긴 스승의 유훈이다. 나에게도 강타했다. 인간이 슬픈 이유를 상투적이고 루틴 한 스펙트럼이 아닌 전혀 다른 철학적 관점에서 성찰한 선생은 거인이다. 학부 때, assignment report를 쓰기 위해 처음 만난 이어령은 내게도 그냥 선생이었다. 하지만 이민아 목사를 매개로 만난 이어령은 거대한 지성의 산이자, 영성의 파도였다. 적어도 지성적 영성의 필드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책 전반에 피력된 ‘memento mori’ 라는 외침이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는 고대 로마 장군의 군사적인 울림이 아닌 영적인 피 흘림의 소리로 들린 것이 나만의 객기인지는 모르지만 독서를 하는 내내, 선생이 마지막으로 펼친 강의의 내용을 1인칭 객관화하느라 치열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지웠던 글감 하나 남겨본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미소를 지으며)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것이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항상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당신의 인생은 촛불과 파도 사이에 있었네요. 정오의 분수가 왜 슬픈지 알겠습니다.”(pp,293-294)

‘메멘토 모리’를 외친 선생의 자신감이 의지적인 고집이나 객기가 아닌 삶의 토함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 울림 때문에 눈자위가 붉어졌다.
목사로 사는 나는 수없이 많은 장례식을 집례 했다. 직전 교회에서는 주마다 장례식이 한 건, 두 건씩이 발생하다보니 장례 전문 목사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의 죽음과 만났다. 뒤돌아보니 선생이 가졌던 삶과 죽음에 대한 包越 의식을 갖고 생사를 다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머리를 숙였다.
랍비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그 존재의 뿌리에서는 궁극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생각과 행동에서는 떨어져 있고 고삐에 매여 있지 아니하여 행위하고 억제하는 것을 자유로이 한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p215) 

궁극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해제에 대해 삶의 굴곡을 경험자들은 동의한다. 폴 틸리히의 말대로 궁극적인 관심과 관계없는 인간은 없다. 이 성찰에 민감한 자들은 죽음에 대하여 소홀히 여길 리 없다.
스승이 누군가? 저자가 인용했듯이 죽음을 건네주는 스승이 최고의 스승(p,234)이라고 말한 시인 이성복의 말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어령은 독자들 모두에게 최고의 스승이 아닐 수 없다.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생각이 아니야. 상기하는 거지. 이미 알았던 것을 깨워서 흔드는 거야. 머리를 진동시키는 거지.”(p,164)

이 촌철살인을 읽다가 레베카 솔닛의 갈파가 기억났다.

“사람들이 얼마나 진실에 굶주려 있는가를 볼 때, 바로 그때 희망이 생기지요. 진실을 건네주면 사람들은 그걸 움켜잡지요.”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창비,p,163.) 

스승 이어령은 알았던 것에 천착하는 그 증거가 상기라고 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나! 동시에 그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인가를 되묻는다. 선생의 지적대로 상기해 본다. 지난 대선이 몹시 힘들었던 이유는 진실의 상실 때문이었다. 나는 목사로 산다. 목사가 진실을 상기하는 삶을 포기하였기에 지금 내 사랑하는 교회가 힘들다. 하지만 솔닛의 권언을 믿기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 오늘도 진실이라는 테제를 내가 알고 있는 것의 목표로 삼자. 삼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상기해 내자. 그래야 진실을 상실하고도 거짓으로 무대의 정 중앙에 올라선 자들과 맞설 수 있기에 말이다.
저자가 참 부러웠다.

“그는 나의 흉곽과 나의 뇌곽을 뒤흔들어 ‘최대치의 나’로 넓혀갔다.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빌려온 진실은 빌려 입은 수의만큼이나 부질없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나에게 꼭 맞는 영혼의 속옷을 찾았다.” (p,10)

저자가 프롤로그에 남긴 격한 감동의 표현을 보고 한없이 부러웠다.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부러웠지만 책을 덮고 나서는 그 부러움이 상쇄되었다. 나도 영혼에 꼭 맞은 속옷을 챙겨 입었으니 말이다. 부탁한다. 서평으로 만족하지 말기를. 책에 그은 밑줄을 심비에 새기는 감동의 주인공이 되려면 책 여행을 마쳐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찬미하는 의무와 즐거움이 진정으로 열렬하지 못한 이유는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의식이 무척이나 까다로운 탓에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시울, p,146.)
 

수전 손택의 까칠함이 내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어령이라는 모두의 스승을 높인다. 나의 무지함을 상기하게 해주었기에.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답한 ‘메멘토 모리(열림원, 2022년 간)’에 담긴 지성적 영성의 엑기스들이 오버랩 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