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희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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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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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3-18 11: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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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꽃자리 간, 2021년)을 읽고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필자는 이런 사람을 글벗 중에서 만난다. 물론 글벗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런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 흔치 않다. 글벗 중에서도 도리어 생각이 너무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의 글감 중에 동의할 수 있는 성찰의 내용을 담을 뿐 그와 가까이하지 않는다. 반면, 가까이하고 싶은 글벗이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전술했지만 나와 목회적인 철학이나 가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벗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가르치려들지 않고 나누려 한다는 분모다. 한희철 목사가 그렇다. 필자는 저자를 한 번도 개인적으로 본 적이나 만난 적이 없는데 그의 글을 읽고, 그의 설교를 듣다보면 따뜻하고, 푸근하다. 왜 그럴까를 곱씹다보면 이유를 아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가르치려하지 않는 겸손함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가르치려하지 않는데도 그의 말과 설교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배우고 싶다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용솟음친다는 점이다. 저자의 묵상 글(정확한 표현인지 몰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을 접했다. ‘하루에 한 생각’을 한 저자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삶을 추천한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운 신변잡기가 아니다. 필자는 저자의 글 여행을 하면서 너무 깊은 저자의 지성적 영성을 배웠다. 소개하고 싶은 그의 나눔 글이 너무 많아 지면의 압박이 있는 이 공간에서 어떤 것을 인용하여 소개해야 할까에 착념하다가 거의 대부분을 포기했다. 그냥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소망은 꼭 찾아 글 여행을 떠나보라는 권(勸)이다.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에서 깨었을 때에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p,504) 현직 목사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삶이고 표현인데 필자는 저자의 이 표현에 머리를 숙였다. 목사는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는 사람이다. 설교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교우들을 위해 강복(降福)도 해야 하는 성직이라는 행위를 하는 당사자다. 그러기에 항상 목사에게 너무나 당연해서 이렇게 용어를 쓰는 게 맞다. 동시에 낯설지 않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잠에서 깨었을 때” 목사로 사는 저자가 본인 스스로 목사라는 직책에 분주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예배하는 구도자라는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 이 글이 놀라운 감동으로 네게 접목됐다. 저자는 학부를 다니던 시절, 윤리학 교수이셨던 윤성범 박사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좋은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좋은 신자가 되세요. 좋은 신자가 되기 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세요.”(p,145) 전율하는 울림이다. 필자도 치열하려고 노력하는 것 중에 하나가 좋은 신자가 되고 싶은 몸부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필자는 흑인 영가로 잘 알려진 ‘신자 되기 원합니다.’(찬송가 463장)라는 찬양은 립싱크로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심장으로 불러야 하는 찬양이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랑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온다.”(p,158) 읽는 순간, 숨이 멎는 듯 했다. 일전에 오클라호마대학의 챨스 킴볼이 말했던 글을 담아 놓았다. “한 종교의 체제를 지키는 것은 때로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모든 수단을 정당화해주는 목적이 되어 버린다. 종교가 이렇게 타락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반드시 따른다.”(챨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 질 때”, 현암사 간,pp,244-245) 지난 대선 기간 동안 정치집단은 그렇다손 치고 내가 사랑하는 교회마저도 철저한 진영논리로 무장하여 무섭게 갈라치기하는 아픔을 현장 목사로 경험했다. 교회가 수단으로 전락되는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웠다. 수단이 사랑을 잠식하는 교회가 어찌 교회일 수 있을까. “사랑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온다.”(p,158) 저자의 이 한 마디를 교회가 다시 공명하고 복기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랑 행함이 없는 교회는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길 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 끌지 말고 업고 와야 하는 것은”(p,464) 저자의 이 책 추천사를 맡은 노래하는 시인 홍순관이 이 글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목자’라는 글입니다. 교회를 잃은 이 기막힌 시대를 향한 ‘목자로서’ 다짐하는 그 심정이 뭉클하게 묻어납니다. 목회자이기에 홀로 삼킨 말도, 꺼낼 수 없는 말도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하여 오래 삭인 말들이 이렇게 책이 되었습니다.”(p,558) 한 마디 부연하고 싶다. 나는 내가 섬기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끌었을까, 업었을까. 저자의 글을 읽다가 갑자기 유행가 가사가 떠올랐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글벗이 준 선물을 받다가 무거웠고 부담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지만 너무 행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현장에는 끌고 가야할 사람보다 안아주고 업어서 가야할 지체들이 너무 많기에 말이다. 기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제자 김지수는 스승이었던 이어령 박사와 나눈 대담을 정리한 책 프롤로그에서 이렇게 깊은 감동의 여운을 남겼다. “그는 나의 흉곽과 나의 뇌곽을 뒤흔들어 ‘최대치의 나’로 넓혀갔다. 스승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빌려온 진실은 빌려 입은 수의만큼이나 부질없다고 느꼈다. 이제 나는 나에게 꼭 맞는 영혼의 속옷을 찾았다.” (p,10) 왠지 모르게 ‘하루 한 생각’의 책을 덮으며 그녀의 이 놀라운 문장을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었다. 과장일까?
“한희철의 글은 나의 흉곽과 뇌곽과 영곽(靈廓)을 뒤흔들어 나의 영혼의 최대치로 나의 영을 넓혀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