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서민석 |
---|
ㆍ출판사 | 한들 출판사 |
---|
ㆍ작성일 | 2021-10-01 14:02:26 |
---|
서민석 박사의 ‘생명은 흐른다-Life 스타일.zip’ (한들 출판사, 2021) 읽고 참 오랜 만에 목사가 목사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수준 높은 책을 읽었다. 아주 가끔은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에게서 놀라운 감동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저자가 그랬다. 저자는 아직은 젊은 나이의 감리교 목사다. 나는 저자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지식이란 같은 제천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것과 몇 년 전 부족한 사람이 진행한 북 콘서트에 참여해주어서 안면을 텄다는 것, 그리고 ‘신학자 중의 철학자이며, 철학자 중의 신학자’라고 지칭할 수 있는 폴 틸리히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정도다. 몇 주 전, 필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본인이 작가의 길을 시작하게 해 준 본서 첫 번째 책을 내게 주었다. ‘생명은 흐른다-Life 스타일.zip’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이렇게 순간 속으로 읊조렸다. 혹시 롤 모델로 삼은 틸리히의 고전적인 방법인 ‘method of correlation’ 의 구도로 생명을 해석했나 싶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이 냄새를 진하게 느꼈고 전문성에 대한 저자의 노력이 증명되는 듯해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여담 하나, 저자가 작년에 학위 논문을 가지고 왔다. “폴 틸리히의 성령론의 이해와 다차원적인 적용”이라는 제하의 박사논문이다. 저자가 이 책을 내게 주며 한 마디 했다. “목사님, 비평적 서평을 부탁합니다.” 저자가 던진 말을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웃으며 지나쳤다. ⓵ 첫째,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나! 목회학 박사를 수료한 사람이 학술 박사학위논문을 비평적으로 논찬한다. 소가 웃을 일이라 생각했다. ⓶ 폴 틸리히에 대한 신학 이해는 학부 때 현대신학을 통해 접한 것이 전부이기에 폴 틸리히 문외한인 내가 그를 전공한 박사학위자의 논문을 파헤친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일인지를 알아 한 귀로 듣고 지나쳤다. 이후, 다만 그의 논문을 읽는 것이 책을 가지고 온 사람에 대한 예의임을 알고 밑줄을 긋고, 모르는 부분은 조직신학 책의 도움을 받으며 열심히 읽었다. 그의 논문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쉰 것은 조직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무한감사였다. 주군께서 내 수준을 알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감동이 다시 일었다.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박사학위 논문의 논지를 또렷이 발견하고 저자의 수고에 박수를 보냈다. 논문에서 서 박사는 틸리히가 갖고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성령의 일하심이 획일적 일하심이 아니라 다차원적인 일하심으로 이해하여 해석했는데 내 눈에 띠었다. “틸리히는 기독교의 토대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나 주관적이고 실존적인 신앙 어느 한쪽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수용’이라는 측면이 결합된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는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다. 또한 주관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신앙적인 면도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결합시키는 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영적인 현존에 의한 성령론이다.”(서민석, “폴 틸리히의 성령론의 이해와 다차원적인 적용”, 목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20,p,186.) 흔히 해석되어 온 성령에 대한 인식이 대단히 편협하고 제한적인 것을 비평적인 차원으로 재해석하여 성령의 이해는 다차원적인 통전적 해석을 할 때 바른 신학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그의 이론 적용이 한국교회에 시급하다는 그의 제안에 동의하며 논문을 읽었다. 이번에 저자가 내게 준 그의 첫 작품도 역시 비슷한 향기를 느끼며 읽었다. 왜? 생명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다차원적으로 접근한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책은 총 389페이지의 분량이다. 근래 출간하는 도서들과 거꾸로 가는 용감함(?)이 부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런 용기를 낸 이유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생명사상에 대한 다차원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파티션(partition)하여 출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시에 그럴 경우, 이해의 단절을 가지고 올 것이라는 적지 않은 부담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이 책의 독서를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근래 400페이지를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있으랴! 지금 나 역시 스티븐 핑거의 빈 서판(blank slate-792페이지)을 읽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세간에서 세인들이 흔히 쓰는 단어 ‘생명’을 ‘온생명’(whole life)이라는 단어로 재탄생시켜 적어도 생각하고 사유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들이 살아내고 있는 삶을 온생명의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이런 승화를 위해 저자는 ‘생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함을 전제한다. 그리고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이 폴 틸리히의 생명 이해였다. 지면상 자세한 것은 열거할 수 없지만 틸리히는 온생명을 이루어가는 방법을 이렇게 전개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인간의 온 생명(참생명 다움)을 위해서는 자아실현’을 위한 실존적 삶의 모습 속에서 다양한 차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타난다.”(p,51) 그리고 제시한 자아실현은 세 가지의 필수과정을 거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통합, 자기창조, 자기초월이다. 저자는 틸리히 전공자답게 ‘온생명’으로 승화한 생명의 과정을 단순한 하나의 학문과 사상이 아니라 다차원적인 학문 간의 통섭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참 생명 즉 온생명의 정의와 이해가 가능함을 본서에서 수차례 강조했다. 저자가 제시한 온생명의 이해와 적용을 위한 학문 간의 통섭은 심리학, 과학, 철학, 신학의 consilience다. 나는 ‘통섭’이라는 단어 공부를 에드월드 윌슨의 ‘지식의 대통합 통섭’(사이언스북스, 2012)를 만나면서 접했다. 윌슨의 어록 중에 이런 촌철살인이 기억에 있다. “물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최재천, 장대익 공역, 사이언스북스, 2012,p,416.) 기막힌 성찰이다. 서 박사가 제시한 온생명 이해를 위한 학문 간의 통섭 안에 글은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든 수작의 면모가 보여 탄성을 질렀다. 조금은 아쉽지만 전부를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나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는 철학과 신학적 차원의 생명 이해에 대해 짧은 메시지를 남겨본다. “철학에서 생각하는 생명의 이해 방식이 철저히 지도상에 표시된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그 무엇이라면, 신학적 차원의 생명 이해는 이 길을 따라가며 이성적/감성적/영적으로 느끼는 의미로서의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삶(생명)의 구조를 해석하기 위해 생겨난 학문이고, 이 삶의 창조자 또는 안내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은 딱 이런 사이다.” (p,290) 저자는 이렇게 중요한 철학과 신학의 통섭을 통한 생명 이해를 소홀히 한 한국교회에 죽비를 내리친다. “한국교회가 천박해져 가고 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자신의 손 위에서 놀게 만들고 있다. 믿음을 싸구려로 만든다. ‘신앙한다.’는 의미를 추락시켰다.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말이다. 문자를 믿고 그 문자에 의지하면서 산다. 성서를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좋아하실지 안다고 생각하고, 성서만 읽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가야할 길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성서만 읽으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 않다. 자신의 이성을 작동해야 하며, 감성과 감각을 일으켜 세워주어야 하고, 영성이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달려갈 줄 알아야 한다. 성서를 읽을 때는 하나님의 생각을 읽어야 하며, 나에게 들려주시는 그 음성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성서를 읽을 때는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p,291.) 저자의 강력한 의도는 철학적 신학과 신학적 철학의 통섭이 이루어질 때, 이런 천박한 신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진단한 게 분명하다. “생명은 찾는 것,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 회복하는 것이리라” (p,294) 저자의 통설이다. “학문의 소통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학문은 통섭되고 유연하게 상호작용해야 하지만, 학문적인 성격으로만 끝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생명의 이해와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이곳’에 실질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 즉 ‘지금’, ‘여기’에 학문(앎) 간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섞이고 현실 속에 녹아내려야 하리라” (p,371.) 저자의 갈파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오래 전에 마틴 부버의 짧은 글을 읽고 밑줄 그었던 내용을 잠시 소개한다. (마틴 부버,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길”, 분도출판사, 2014,pp,59-60.)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물음에 랍비 코쓰크가 마침 그를 찾아온 선비들을 놀라게 하며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하느님은 인간이 받아들이는 곳이면 어디에나 머무십니다.”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기독교의 교리적 폐쇄성에 대해 진중하게 성찰했던 기억이 내게 있다. 도그마에 파묻혀 있는 자들의 옹졸함은 내가 접한 한 학문에 길들여져 있을 때다. 이런 자들과는 도무지 대화 불가능이다. 마치 책 한 권을 읽고 다 이해했다는 사람하고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학문적인 통섭이 주군께서 말씀하신 온생명의 바른 이해의 첩경임을 제시한 저자가 그래서 자랑스럽다. 감리교단의 도그마적인 폐쇄성 역시 오십보백보일 텐데, 그 교단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무명의 젊은 목사의 헤집음이 잔잔한 파장이기를 기대하고 무한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제천이라는 지역에 또 다른 글 벗 하나를 만난 것 같아 무척이나 고맙고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