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12월 11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살면서 누군가에게 예상하지 못한 대접을 받은 일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420장: 너 성결키 위해
●  복음성가: 내 주의 은혜 강가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대강절 살아내기 (3)
● 본문 : 히브리서 13:1-8
1)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도의 신앙 강령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자.
1) 1-3절:
2) 4절:
3) 5절:  

2) 다음을 설명해 보자.
1) 타인을 환대하는 삶의 신학적 의미는? (삭개오에 대한 성경적 내증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2) 성적 타락의 매개가 21세기에 범람하는 이유를 설교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자. (로마서 1장 참고)  

3) 적용하기
⓵ 돈에 대한 성서적 관점과 나의 관점을 비교해 보자.
⓶ 나는 타인에 대하여 어떤 돌봄을 실천하고 있는가?
⓷ 우리 가정은 건강한가?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성탄절에 진행할 태신자 초청 3주차 사역하기
  (태신자와 만나 식사 및 차 마시기)
2. 환우들의 회복을 위해
3. 성탄절 사역 중보하기  (태신자 초청 주일 및 전 교우 대면예배 참석하는 주일)
4. 피선교지를 위한 기도
5.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오늘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저자는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권면 겸 본인의 의지를 밝힙니다. 수신자 공동체를 위해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인 도널드  헤이그가 이렇게 ‘형제’ (brotherly)에 대해 그 범위를 넓혔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모든 기독교 윤리의 중심 사상인 사랑 즉  ‘형제 사랑’(philadelphia)으로 직접 접근한다. ‘형제’는 교회내의 남성은 물론 여성을 포함한다. 즉각적으로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탁월한 요약인 이중 계명을 생각하게 한다. 즉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권면이다.” (도널드 헤이그,
“히브리서의 신학적 강해”, 도서출판 크리스천, p,249.)

    결국 히브리서 저자가 역설한 것은 히브리서 설교를 듣는 모든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실천  강령으로 제일 우선순위에 둔 것이 예수님이 천명하신 ‘사랑하기’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인데 그 대상이 남녀 모두를 포함한 인간 전체를 지적한 것입니다. 이 명백한 주님의 명령을 다시 천명한 히브리서 저자가 사랑하기의 구체적인 하부 강령으로  제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 2-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손님 대접 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저자의 역설 중에 대단히 강력한 어조로 선포한 그리스도 공동체 지체들이 감당해야 할 몫은 설교의 도입부이 말씀 드린 낯선 자들에 대한 환대였습니다. ‘손님 대접’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필로넥시아’를 어원적으로 직역하면 ‘환대’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환대를 실천하라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유대인들의 정경인 구약성서 안에 담겨 있는 아브라함과 롯의 환대를 기억해서 일 것입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자가 누구입 니까? 소돔으로 내려가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했던 아브라함, 멸망의 장소였던 소돔에 도착한 천사들을 대접한 롯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또한 갇힌 자를 생각하라는 권면은 히브리서 10:32-34절을 전제한 것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우리는 이미 히브리서라는 설교문을 받는 공동체 중에 심각하게 영적인 핍박을 감수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음을 이미 10장에서 살폈습니다. 이 고난 받고 있는 형제들을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선대하라는 메시지가 본문입니다.

1) 성도가 행하여야 할 환대는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세리장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여리고 공동체 안에서 모두가 꺼려하고 교제하지 않던 대명사였던 삭개오를 만난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복음 19: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삭개오가 언어로 주님에게 그 무슨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통상, 예수께서 화자에게 그 어떤 은혜를 주실 때는 그 대상자에게서 받은 신앙 고백이나, 특정한 무슨 일을 경험했다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가령 백부장이 병들어 있는 종을 고쳐달라고 했던 사건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이 병들어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의 공통분모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일례로는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것과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었던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경우에는 예수께 그다지 별 큰 느낌을 줄만한 명제가 없었습니다. 다만 키가 작아 예수님을 잘 볼 수 없었던 삭개오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었던 것 말고는 딱히 주목할 만한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죄의 대상이자, 색안경을 끼고 이미 제쳐 놓은 물건 같은 비인격적 존재로 낙인을 찍은 삭개오에게 먼저 손을 내미신 사건이 누가복음 19:5절의 선언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에서 사역하는 강남순 교수가 환대라는 단어를 신학적으로 풀었는데 삭개오를 인용합니다. 제게는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의미 있는 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비존재(non-being)’로 취급받던 삭개오를 ‘존재 (being)’의 영역으로 전이시킨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 공동체가 해야 할 환대다.”(강남순,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 새물결플러스, p,190 -인용자 주 첨가)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는 환대를 해야 할 대상을 차별하지 않으신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사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행하셨던 위대한 일은 환대이었습 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께서 행하셨던 이 환대를 차별적으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있는 김현경 교수가 그의 글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환대란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이다. 환대에 의하여 타자는 비로소 도덕적인 것으로 들어오며, 도덕적인 언어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된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환대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 지성사, p,242.) 기억하십시다. 적어도 대강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적 행보는 모든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하며 환대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 하고 손님 대접하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삶입니다.

2)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공동체를 위해 순결성을 지켜가야 합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히브리서 저자가 이 권면을 한 것은 히브리서가 저술되던 주후 60년대에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서 횡행했던 금욕주의자들에게 결혼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종용이기보다는 이미 결혼한 기혼자들 에게 결혼 관계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라는 권면에 가까운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로마서에 기록한 바울의 강력한 경고를 외면할 수 없고 또 살펴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로마서의 저술 연도를 대략 주후 56-57년으로 산정합니다. 그렇다면 주후 60년대에 작성되었을 히브리서와 시기적인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여러 가지 권면과 경고는 히브리서 저자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합니다. 이것을 전제히면서 그 유명한 로마서 1:26-27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인 하나님의 유기(遺棄)가 있을 것을 경고한 메시지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경고가 로마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진 경고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공동체 안에 로마라는 극히 세속적인 도시에서 자행되던 죄악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왜 로마라는 도시에 이렇게 동성애가 창궐했을까요?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는 로마의 남성들이 여성을 애 낳는 기계정도로 인식했습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남편들이 아내에게 성적인 만족을 느끼게 해 주지 않았던 곳이 로마라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성적 만족을 느끼지 못했던 아내들은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며 동성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역리들이 로마 교회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성적인 랜덤이 횡행하던 로마와 그 주변 상황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 설교문을 작성할 시기에도 여전했습니다. 성적인 일탈들이 죄로 여겨지지 않는 기막힘이 바로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삶의 정황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정말로 아프지만 주후 60년대 로마와 근교의 기독교 공동체가 전혀 세속 공동체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히브리서 저자의 일갈에서 엿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본문 4절에서 강력하게 성토하며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이번 대림절에서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시 한 번 다잡이 할 것은 우리 가정 공동체가 든든한 영적 순결성으로 무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성적 방종의 시대에 물 타기 하지 않게 하시고, 거룩한 성적 순결성을 사수하는 우리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외자는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 물질에 대한 올바른 방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5절을 읽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물질적인 것을 더 많이 얻으려는 데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저버리지 않겠다.나는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는 대단히 선명해 보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선진들은 물질을 고사하고 주를 위해 생명을 마 다하지 않은 순교적 삶을 살았던 선배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물질적인 손해는 저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배교의 위험성이 있는 자들은 제일 먼저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지는 세속적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돈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돈에 대한 관심이 치열해지고 결국 그 결과 오늘 본문13절에 기록된 형제 사랑에 대해 인색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자는 단언하여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본문 6-8절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 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믿음은 우리들이 안전하고 행복한 근거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돌보시는 돌보심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도 그렇게 이스라엘 공동체를 돌보셨을 때 이스라엘은 온전히 안전했던 것처럼, 오늘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저자가 역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아니라 돈이 무엇이든 지배한다는 생각을 갖는 순간, 그런 자들에게 돈은 하나님의 카운트 파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자크 엘륄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귀담아 들어야 할 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부를 주시기 때문이다. (중략) 물질의 풍요는 하나님을 무시하게 한다. 물질의 풍요는 하나님을 모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게도 한다.” (자크 엘륄, “하나님이냐 돈이냐”, pp,51-53) 물질에 대한 바른 방향성을 갖는 방법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미슈파트(정의), 헤세드(인자), 짜나(겸손) 였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천박한 방법으로 물질을 추구한 자는 모두가 맘몬이라는 하나님 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신에게 굴복한 자들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폴 트립이 이렇게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맘몬을 강타했습니다. “돈이 큰 문제라면 돈에 미친 교회와 신자는 더 큰 문제다.” (폴 트립, “돈과 섹스”, p,201-인용자 재해석 첨가) 대강절 세 번째 주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한 번 경성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결론)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교우들이라면 마땅히 모든 인간은 존중 받아야 하는 대상임을 인정하여 타인에 대한 환대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성도로서 영육의 순결함을 유지해야 하고, 맘몬 숭배가 아니라 돈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올바른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 살아내기에 승리하는 또 한 주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