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거룩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508장: 우리가 지금은 ● 복음성가: 주가 일하시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대강절 살아내기 (1) ● 본문 : 히브리서 12:14-17 1)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강력하게 권면하며 경고한 네 가지 성도의 삶은? 2) 여호야김이 신탁을 칼로 도려내고, 화롯불에 태운 이유와 이후 다시 예레미야에게 하명한 내용은? ⓵ 태운 이유 (예레미야 36:30-31절 참고) ⓶ 이후 다시 내린 하명의 내용 (예레미야 36:27-28절 참고) |
3) 적용하기 ⓵ 쓴 뿌리 제거는 말씀의 능력을 다시 새길 때 가능하다. 나는 말씀을 잘 새기고 있는가? ⓶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⓷ 대강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되새기며, 성도의 삶을 살아내자. | 사역하기 (WORK)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성탄절에 진행할 태신자 초청 1-4주 사역 나누기 1주차 사역하기 및 독려하기 (태신자 명단 12월 4일까지 제출하기) 3. 환우들의 회복을 위해 4. 성탄절 사역 중보하기 (태신자 초청 주일) 5. 피선교지를 위한 기도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 설교요약 (SUMMARY)본론) 히브리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경고하는 멘 트의 성격이 강한 내용들로서 1:1-12:13절까지의 권면을 길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고의 말씀을 거절하고 배교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 내용을 우리가 대강절 4주 동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지켜가야 할 신앙의 행동강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강절 기간 동안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평화를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 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제일 먼저 주목할 것은 ‘화평함’이라는 단어입니다. ‘화평함’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이레네’는 문자적인 의미만을 적 용한다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가 작성된 시기는 주후 60년대이고, 지역적 배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교일 것이라고 진단 했습니다. 세계사적인 해석으로 볼 때, 주전 27년부터 주후 180년까지 약 2세기 동안, 로마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자평합니다. 로마라는 제국이 통치하던 일체의 영토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팍스 로마나’라고 한다면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짜 평화’입니다. 로마라는 막강한 군사력, 공권적인 물리력으로 반대 세력 을 짓밟고, 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였던 위장된 평화 혹은 가공된 평화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작성될 때가 이런 가공된 정치적 평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평화’라는 단어에 대해 수신자들은 익숙했을 것이고,또 한편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가짜 평화’, ‘만들어진 가공된 평화’인데도 그것이 진짜 평화인양 세뇌되던 시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가공 된 ‘전쟁이 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던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충분히 ‘팍스 로마나’에 길들여져 있는 시대였기에 평화라는 단어를 저자가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저자에 의해 언급된 평화는 가짜 평화를 말하는 단어가 아 닙니다. 14절 후반절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이 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추구하고 따르고 쫓아야 하는 화평 함의 주인공이 되어야 주를 볼 수 있다고 저자는 강하게 역설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20절에서 이렇게 강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 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 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에게 주어지는 화목하게 하는 화평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때 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화평함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연히 친구 목사에게 본인이 섬기는 내년도 교회를 표어를 ‘다시 연결되는 교회’라고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표어의 기저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 사람에게서 끊어진 관계의 줄을 다시 연결하는 교회가 되자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탁월한 의미의 교회 표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4주 동안의 대강절 시즌 동안,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제일 먼저 선포하실 ‘에이레네’의 화평함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일체의 것들을 회복해 나아가는 peacemaker 들 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는 삶입니다. 다시 14절을 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함’과 함께 병행하는 단어 ‘거룩함’이라고 번역된 ‘하기아스모스’의 의미는 철저하게 영적이며, 종교적인 그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기아스 모스’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 단어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분리’ 혹은 ‘구별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이 정치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룩한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구별된 분리함을 통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 때 도달하는 거룩함의 상태입니다. 저는 특히 ‘구별됨’이 라는 단어에 천착하고 싶습니다. 이 구별 됨을 실천하는 자가 영적인 거룩함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적용하고 싶은 성경적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 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걸인을 일어나 걷게 하는 기적을 베풀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들썩이기 시작했음을 보고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운 자가 누구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수소문 끝에 베드로와 요한인 것을 알아낸 산헤드린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신병을 확보해 공회로 소환합니다, 더불어 이런 일을 누구의 이름으로, 무슨 권세로 행했는가를 추궁하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해프닝을 벌입니다. 유대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권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력을 잠재우려는 폭력에 두 사람은 기죽지 않고 본인들이 이룬 일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4:8-12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 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구별 됨입니다. 세속적 권위에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입니다. 베드로의 이 어마어마한 구별된 거룩함을 보았던 종교지도자들의 독백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사도행전 4:14절입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세속적 권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거룩한 구별됨 을 살았던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4:19-20절은 감동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 주는 권위를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보게 됩니다.
지난 주간, 사랑의 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머물며 내년 목회 계획을 세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원에 갈 때 꼭 경유하는 곳이 고 옥한흠 목사의 묘소입니 다. 이번에도 산책하며 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 은보 옥한흠 목사 여기에 잠들다.” 묘비명을 보고 있노라니까 그 분이 남기신 촌철살인들이 또 다시 내 심장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설교를 통해 예수 를 파는 장사꾼이 되지 말고 주존감으로 무장한 사명자가 되라는 비수로 들었 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눈물이 없다면 목사로서 이미 변질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기시킨 눈물의 목회만이 목회라는 천둥소리로 들었습니다. “은혜 없이, 감격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1급사기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도 없습니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이 악습으로 몸에 배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얼마나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얼마나 치열한 영성과 거룩함을 토대로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는 벼락 침으로 들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전 인격을 사로잡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파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없다고 할 때 십자가의 설교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예수의 이야기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이고, 살아 있는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부드러움 과 타협함이 보이는 구석은 존재하지 않는 선배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옥 목사의 글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목사로 살아가며 무섭도록 치열한 구별된 영성을 되새김질하라는 선배의 피토함 속에서 나오는 세속적 그 어떤 권위도 꺾을 수 없는 거룩함을 느끼는 감동입니다. 가공된 권위가 아닌 진짜 권위 말입니다. 목사만 그런 것 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구별됨이며 거룩함입니다. 대강절 이런 삶을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쓴 뿌리들과 결별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16-17절에서 두 가지의 쓴 뿌리의 내용을 구체적 으로 예로 들며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그것들에게서 돌아설 것을 명령합니다.
⓵ 세속적 음란함입니다. 16절 전반절입니다. “음행하는 자” 그랜트 오스본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성적인 부도덕성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교회에 서도 용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도덕성의 기준을 지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성적인 죄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우 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신다.어느 누구도 성적인 부도덕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랜트 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344)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망치게 하는 원흉 중에 하나가 음란함인 것 을 저자는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대도시에 살고 있었던 자들의 방탕함과 음란함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기에 저자는 강수를 둔 것 같습니다. 이 음란함은 성적인 음란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인 매춘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일체의 것들과 교 접하는 것에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⓶ 망령됨입니다. 16절 2f-17절입니다.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망령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어진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경솔함입니다. 지금 이 설교문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 본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배교를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경고성 발언 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2:3절과 10:26-27절에서 저자가 경고한 메시지를 공부했습니다. 히브리서 2:3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10:26-28절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 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저버리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것에 대해 경고한 저자는 본문에서는 이런 행위를 ‘망령된 일’이라고 못 박기까지 합니다. 영적인 이탈의 심각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혀 있는 관계를 회복함으로 화평함을 누리고, 거룩한 구별됨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아야 합니다, 적어도 거룩 함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서 세속적인 쓴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음행하려는 마음,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천박함에서 돌아설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찢어지고 갈라지고 전쟁의 소문을 누가 먼저 내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땅 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치유함을 통해 성도들은 화평함과 거룩 함을 추구하고, 이 땅을 좀 먹게 하는 쓴 뿌리들이 성령의 불로 소멸시키는 대 강절 기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대강절, 우리는 지난(至難)하지만 성도로서 히브리서 저자가 역설한 이러한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 하십시오. 그리하여 화평함을 쫓으십시오.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그리하여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음란함과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망령됨에서 돌아서십시오. 이렇게 살아내는 여러분들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편 보좌에서 일어서서 응원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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